84화
따로 출발한다는 강유현이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공대는 이미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한이진 능력자님!”
“어, 해송하 능력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헤르모드 길드의 해송하. 세(Sæ) 던전에서도 길잡이로 함께했었는데, 이번에 무스펠헤임 던전도 지원 왔나 보다. 나는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또 뵙네요.”
“하하, 그러게요.”
곧 던전에 들어갈 사람답지 않게 환하게 웃던 해송하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표정을 조금 굳혔다. 물론 그래 봤자 심각한 척하는 햄스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티르 길드가 저번에 공략을 실패하면서 정예팀 능력자들이 심각한 부상을 많이 입었대요.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던 것 같지만요.”
“아하…….”
“그래서 탐지계 스킬을 가진 능력자들이 부족하대요. 저는 원래 티르 길드 쪽 지원은 잘 안 오는데,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부탁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공대 제일 앞에서 길을 찾는 탐지계 능력자들은 사실상 위험에 많이 노출되는 편이다. 전투계 스킬이나 몸을 보호하는 보조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다칠 확률이 낮아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가장 먼저 몬스터에게 공격당해 큰일이 날 수 있겠지.
“티르 길드에 원래 계시던 탐지계 능력자님께 자료를 받긴 했지만, 처음인 곳이라 많이 긴장되네요.”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세(Sæ) 던전에서도 침착하게 길을 찾던 해송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이번에도 강수현이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해송하와 강수현도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강수현 능력자님.”
“저야말로 많이 배울게요.”
저번 던전 공략에서 붙어 다니면서 많이 친해진 건지, 강수현과 해송하 사이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등급은 낮지만 베테랑인 해송하와 등급은 높지만 경험이 적은 강수현. 다시 봐도 괜찮은 조합이었다.
이번에도 길 찾는 건 어렵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하아안이지이인 능력자아아아아!”
“……?”
이게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지? 커다란 목소리가 마치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진아, 조심해!”
“윽……!”
눈앞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졌다. 이든이 나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
“어, 응.”
좀 놀라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다. 애초에 떨어진 위치를 보면 이든이 굳이 감싸지 않아도 부딪치진 않았을 것 같다.
“한이진 능력자!”
“……성유빈 능력자?”
땅에 납작 붙어 있던 몸을 일으킨 사람은 놀랍게도 성유빈이었다. 그녀를 본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 성유빈 능력자가 왜 여기?”
소설에서 성유빈이 무스펠헤임 던전에 왔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왔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버벅대는 나에게 성유빈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도 무스펠헤임 던전에 지원 왔습니다!”
“성유빈 능력자가…….”
“아, 구슬 능력자도 같이 왔습니다.”
“그래요?”
무심결에 성유빈의 양옆을 살피는데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성유빈의 뒤쪽에서 끊어질 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같이 가요오……. 성유빈 능력자니이이임…….”
헉헉거리면서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몸보다 큰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성유빈이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저 혼자 뛰어와서.”
“헉, 헉……. 괜찮아요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구슬이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곤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한이진…… 능력자님, 헉헉…….”
“괜찮으니까 숨부터 돌리세요.”
“네, 헉헉…….”
고개를 끄덕인 구슬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생수를 꺼내 구슬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데요. 뭘.”
그리고 뻘쭘하게 서 있던 성유빈에게 고개를 돌렸다.
“프레이야 길드에서는 두 분이 지원 오신 건가요?”
“맞습니다. 아마 다른 대형 길드에서도 지원 왔을 겁니다.”
“아…….”
뭔가 이상한데. 원래 대형 길드들이 이렇게 지원을 잘해 줬었나? 아무리 티르 길드가 무스펠헤임 던전 클리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도, 이때쯤은 다들 몸을 사리는 중이었을 텐데. 그래서 주인공인 강유현이 더 활개 치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대형 길드들이 뭉쳐서 연합을 만들었지. 그때부턴 라우페이 길드도 수작질이 심해져서 대형 길드들이 위기감을 느꼈으니까.
“프레이야 길드에서도 두 명이나 보내고, 의외로 지원이 많이 오네요?”
“모르셨습니까?”
“네? 뭐를요?”
“아, 박윤성 마스터님이 아직 말을 안 하신 모양이군요.”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성유빈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
“이번에 대형 길드들이 연합을 맺었다던데요.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요. 차현 언니가 저와 율이 언니에게만 먼저 말했습니다.”
“……대형 길드 연합이요?”
“네, 전부터 몇 번 말이 나왔지만 아시다시피 서로 견제하기 바쁜 족속들이라……. 하지만 얼마 전에 다들 수락했다더군요.”
“…….”
성유빈의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길드 연합을 벌써 맺었다고? 이렇게 빨리?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미심장한 어조로 중얼거린 성유빈이 고개를 내저었다.
옆에 있던 구슬이 나에게 생수통을 돌려줬다.
“잘 마셨습니다.”
“좀 괜찮아졌어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구슬을 보며 흐뭇한 얼굴로 생수통을 인벤토리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구슬이 곧바로 내뱉은 말에 손끝을 삐끗했다.
“너튜브 영상 잘 봤어요!”
“아…… 봤어요?”
“네! 정말 재밌었어요!”
“하핫…….”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땐 너튜브 영상 조회 수가 천만에 다다랐었다. 그래서 식겁하고 핸드폰을 껐었는데. 지금도 조회 수가 올라가고 있겠지? 역시 유나유나와 강유현의 조합은 시너지가 엄청났다.
“저는 뭐, 꼽사리 낀 것뿐이라서요.”
“꼽사리요? 그렇게 안 보이던걸요.”
“음…….”
본의 아니게 내가 영상에서 말을 많이 하긴 했지. 강유현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든과 강수현도 말수가 적은 편이라서 말이다.
유나유나가 눈에 띄게 당황하다 보니까 도와주려고 영상에서 너무 나댄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구슬과 성유빈에게 그걸 구구절절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유나유나라는 분이 부럽더군요. 저는 한이진 능력자와의 오붓한 시간을 항상 방해받는데……!”
“하하…… 네?”
“서, 성유빈 대장님. 진정하세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성유빈은 별안간 버럭 화를 냈고, 구슬은 쩔쩔매며 그녀를 말렸다.
“한가하군요.”
“……?”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우리를 안내했던 티르 길드의 부길마, 서하준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러 왔습니까? 다른 사람들 바쁜 거 안 보여요?”
“아…….”
서하준의 말에 나는 흘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게이트 앞에서 능력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우리처럼 다른 길드에서 지원하러 온 능력자들은 브리핑하기 전이라 그런지 혼자 조용히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서하준의 큰 목소리에 타 길드에서 온 능력자들과 용병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익숙한 사람들을 다시 만난 게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들뜬 모양이다. 던전 공략 전인데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여기 세 분과 저번 던전 공략을 같이 해서 반가웠거든요.”
“던전은 친목하는 곳이 아닙니다.”
“……네, 그렇죠.”
말투가 뾰족해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하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순순히 그에게 사과하려던 순간이었다.
나와 서하준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그럼 친목 장소로 만들지 않게 진작 잘하지 그랬어. 서하준.”
“……!”
“너희가 제대로 클리어했으면 우리가 여기 올 일 있었겠어? 응? 그랬겠냐고.”
“……야, 성유빈.”
서하준과 성유빈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나는 긴장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도와주러 왔으면 감사하다고 고개 숙이지 못할망정 면박을 줘? 지금 장난하나?”
“지금 보는 사람들 많다. 나한테 반말하지 마.”
“하.”
“…….”
어쩐지 성유빈과 서하준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보였다. 소설에서는 둘이 어떤 사이인지 나오지 않았는데, 혹시 게이트 사태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나?
“야, 사람들 빤히 보는데 한이진 능력자한테 면박 준 건 너잖아?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고.”
“…….”
“하여간 한심한 자식.”
헉, 성유빈 능력자가 이렇게 신랄하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그녀의 뒤에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서하준을 흘끗 보니, 장난 아니게 표정이 싸늘했다. 이러다 던전 공략 전에 싸움이 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성유빈, 너 진짜…….”
“부길마님!”
그때, 티르 길드원들만 입는 전투복을 입은 남자가 서하준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쪽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희 쪽 지원 인원 다 오신 것 확인했습니다. 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
“부길마님?”
이를 갈며 성유빈을 노려보던 서하준이 나를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자 뒤에 숨기나 하는 찌질한 새끼.”
“……?”
나에게 한 말인가?
뭐라고 되묻기 전에 서하준은 길드원을 데리고 휙 걸어갔다. 남겨진 나는 멍청하게 눈만 깜박거렸다.
“크르르…….”
“저 새끼 죽일까?”
“응, 안 돼.”
나 대신 화를 내는 용식이와 이든을 달랬다. 그리고 강수현과 성유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서하준과 으르렁대며 싸웠던 성유빈은 특히 더 그랬다.
“던전 공략 중에 제가 살짝…….”
“아니, 그럼 안 되죠.”
“그럼 어디 사막에 구덩이라도 파서…….”
“안 된다니까요.”
흥분하는 성유빈을 달래며 우리도 브리핑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번 던전 공략도 편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