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당연하지.”
“숨만 붙어 있음 되지 않나?”
“하여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라이수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에반을 응시했다.
“뭐, 어차피 멀쩡한 상태로 데려올 순 없을 테니까. 마음대로 해.”
“앗싸!”
“대신, 살아 있어야 해. 알았지?”
“별로 자신은 없지만, 일단 알았어요.”
“…….”
에반은 눈이 돌아가면 자칫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백시후조차 그와는 적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백시후는 천진난만한 척 웃고 있는 에반의 얼굴을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한이진.’
영상에서 보았던 한이진의 활짝 웃는 모습이 아직도 그의 망막에 새겨져 있었다. 로키 길드에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쉼 없이 웃고 있던 얼굴에서 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눈살을 찌푸린 백시후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실상 그에겐 에반을 경멸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백시후의 검은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뭐지? 목재 30개 다 모았는데, 왜 퀘스트가 안 깨지지?”
“이진아, 부드러운 목재랑 단단한 목재도 모아야지.”
“그리고 철광석도 모아야죠.”
“아씨, 뭐 이렇게 할 게 많아?”
투덜거리며 손에 쥔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그러자 내 캐릭터가 총총거리며 섬 한구석을 돌아다녔다. 이걸 보니 문득 던전에서 아이템 재료들을 채집했던 때가 떠올랐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노가다를 하고, 게임에서마저 노가다를 해야 하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대신해 줄까?”
“됐어.”
아이들용이라 그런지 게임 자체는 단순하고 쉬웠다. 다만, 노가다 하는 게 귀찮을 뿐이지.
그런데도 왜인지 묘한 오기가 생겼다. 빨리 빚을 갚고 내 섬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컨트롤러를 계속 누르게 만들었다. 역시 마성의 게임이라고 할 만하다.
내가 컨트롤러를 움직이는 동안 이든과 강수현이 번갈아 가며 내 입 안에 감자칩을 넣어 주었다. 바삭한 감자칩을 씹으며 무아지경으로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부웅.
“응?”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뭔가, 하고 봤더니 깨톡이 와 있었다. 누군가가 보낸 깨톡은 성의 없이 단 한 줄만 띡 쓰여 있었다.
「강유현: 내 방으로 와.」
“허, 참.”
이 새끼가 무슨 개새끼 부르듯 제 방으로 오라 가라 그러면 내가…….
가야지. 주인공은 무서우니까.
먹다 남은 감자칩을 주섬주섬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어디 가는데?”
“음…….”
왠지 솔직하게 강유현이 불러서 간다고 말하는 건 자존심이 좀 상했다. 어차피 나에게 소설 진행에 영향을 줄 만한 중요한 볼일은 없을 테고, 간단한 용건만 끝내면 바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화장실.”
“이 방에도 화장실 있는데…….”
“난 내 방에서 해결해야 함.”
순식간에 강유현의 방을 화장실로 전락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수현의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생각해 보니 아직까지 강유현의 방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소설에서도 강유현의 방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도 묘사가 나온 적이 없었다.
주인공의 방이라.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강유현의 방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여긴가?”
강유현의 방은 숙소 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기 때문에 꽤 오래 걸어야 했다.
커다란 방문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방들과 달리 칙칙한 색의 커다란 문이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주었다.
노크해야 하나? 노크해야 되겠지?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달칵.
“으악!”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큰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문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탁, 하고 뒤에서 문이 닫혔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형형한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유현?”
“…….”
강유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강유현이 분명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이 압박감은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왜 불렀는데?”
사실 지금까지 숙소 안에서 강유현과 잘 마주치지 못했다. 길마인 박윤성만큼이나 바쁜 강유현은 숙소를 잠만 자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강유현도 숙소에 있는 것 같아서 의아했다. 게다가 자기 방으로 나를 부르기까지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보다 키가 훨씬 큰 강유현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현타가 온다. 한이진의 몸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SS급의 주인공은 머리가 그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소설에서 자세하게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거의 2m급이지 않나, 이 정도면?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침묵 끝에 강유현이 내뱉은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한테 스킬 써.”
“뭐?”
“나한테 보조 스킬 쓰라고.”
보조 스킬이면 개박하 스킬을 말하는 건가? 놀란 눈으로 강유현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
갑자기 이게 무슨…….
그러나 강유현의 진지한 눈빛에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왜?”
평화로운 숙소 안에서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보조 스킬을 쓰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다 강유현이 던전에서부터 몇 번이나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빤히 보다가 결국 말하지 않았었지. 설마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너 혹시…… 부작용 때문에 그러냐?”
“…….”
개박하 스킬을 받고 부작용을 일으키는 능력자는 지금까지 강유현뿐이었다. 앞으로 다른 능력자들에게 스킬을 쓰면 더 생길 수는 있지만, 지금은 강유현에게만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점이 나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강유현은 더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부작용이 일어나는 이유를 모르니까 말이다.
“빨리 써.”
“아니…… 그런다고 면역력이 생기거나 하진 않을 거 같은데…….”
“…….”
그러나 계속 거절하기엔 강유현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방 안이 어두워서 윤곽만 겨우 보이는데도 눈에서 빔 같은 게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 손 줘 봐.”
“…….”
“아, 왜 또?”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강유현은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려면 빨리 하고 가야 된다고. 짐숲 해야 한단 말이야. 게다가 용식이가 밥 먹고 졸려서 자고 있는데, 또 일어나서 난리 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으니, 강유현이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과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좋겠다. 키도 크고 손도 커서. 꽉 잡은 엄지손가락에서 손등에 돋아난 힘줄이 만져졌다. 왜인지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흠흠, 한다.”
“…….”
“…….”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그냥 스킬 쓰는 건데. 방 안도 어둡고, 말하는 것도 어쩐지 좀…….
에이씨, 진짜. 얼굴을 구기며 능력을 끌어 올렸다. 마주 잡은 손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야, 됐어.”
“…….”
“이제 됐거든?”
“…….”
“야!”
강유현이 당최 손을 놓지 않아서 탈탈 흔들었다. 그러자 강유현이 잡았던 손을 느릿하게 놓았다.
“나 이제 간다.”
“어디 가.”
“아, 나 게임하던 중이었다고!”
버럭, 화를 내며 몸을 돌리자 강유현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 가지 마.”
“으악, 잠깐…… 야!”
나는 그대로 강유현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 주인공 놈이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그에게 방 한가운데로 끌려가다가 무언가를 밟았다.
“어?”
팟, 하고 벽 하나를 차지한 티브이 화면이 켜졌다.
근데 이 방 티브이 화면 크기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커?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멍청하게 쳐다보는데, 나오는 화면이 뭔가 이상했다.
“이거 설마…….”
맙소사. 이거 디즈미플러스의 로키잖아? 아직 디즈미플러스는 한국에 출시가 안 됐는데? 나는 놀란 얼굴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뭐야? 왜 네 방에서는 디즈미플러스가 나와?”
“……외국 계정을 쓰고 있으니까.”
“헐.”
그런 방법이……!
이, 이 부러운 자식. 지금까지 혼자서만 디즈미플러스를 보고 있던 거야? 내 방에는 넛플릭스만 나오고 있었는데.
“그럼, 나…… 이거 보고 가도 되냐?”
“……마음대로.”
강유현의 허락에 신이 난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챙겨 온 감자칩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 감자칩 먹어도 되지?”
“……마음대로.”
“…….”
얘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 같은데.
미심쩍은 눈으로 강유현을 보다가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드라마라서 그런지 금방 빠져들었다. 이 소설 속 세계가 게이트 열리고 능력자들이 생긴 것 빼고 다른 건 다 현실 세계와 똑같아서 좋단 말이지.
“하하.”
드라마 속의 로키가 익살스러운 연기를 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로키 신이 존재한다면 저렇게 잘생기고 재미있으려나. 빙의한 한이진이 로키 길드 출신이라서 그런지 묘하게 더 흥미가 갔다.
그렇게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데, 옆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하…….”
“……?”
내 옆에 앉아 있는 강유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강유현의 얼굴을 비추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감자칩을 살며시 내려놨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얘한테 개박하 스킬을 썼었지. 벌써 부작용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능력치가 올라가서 평소랑 느낌이 좀 다른 건가?
“괜찮냐?”
“신경 쓰지 마.”
“…….”
아니, 옆에서 자꾸 한숨을 내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눈치를 보다가 강유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