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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78)화 (78/228)
  • 78화

    ‘읏…….’

    이제 빛무리가 좀 사라졌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순간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눈을 뜬 나는 더욱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뭐지?’

    눈을 뜨니 숙소 방 안이 아니었다. 바깥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불에 타고 난 후인지 뼈대만 남은 건물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거리에는 주인 없는 자동차들이 찌그러지고 전복된 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새카만 재가 가라앉아 있는 거리 한복판에서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끼이…….

    ‘……!’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작은 표지판이 발치에 떨어졌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몸도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눈만 움직여 표지판의 글자를 읽었다. 표지판은 잔뜩 구겨지고 새까맣게 그을려 있어서, 쓰여 있는 글자 중에서 단 한 단어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KS-09」

    게이트 사태 이후로 각국은 던전이 출현한 곳들을 위주로 지역명을 알파벳과 숫자로 바꿔서 표기하기도 했다. KS-09는 시청역 부근이었다.

    어째서 시청역이 이렇게 파괴된 거지? 던전 브레이크를 막지 못했나? 시청역에서 가까운 던전은 분명…….

    ‘윽……!’

    땅이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몸을 숙였다. 이윽고 땅 밑이 푹 꺼지기 시작했다.

    ***

    “헉……!”

    “꺄우우!”

    다시 눈을 뜨니 방 안이었다. 벌렁거리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왔다 갔다 거리는 용식이를 진정시켰다.

    “용식아, 아빠 괜찮아.”

    “뀨우우…….”

    어쩐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용식이가 앞발로 내 허벅지를 꾹꾹 눌렀다.

    용식이가 내뿜은 빛을 보고 꼴사납게 뒤로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띵한 머리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눈앞에 새파란 시스템 창이 떴다.

    「챕터: 종장. 라그나로크」

    「마지막 페이지를 열람하였습니다.」

    「다음 열람에 필요한 ‘이그드라실의 정수’의 개수: 0/1」

    “허…….”

    종장? 라그나로크?

    그럼 내가 본 게 이 세상의 멸망이라고? 설마 이게 소설의 마지막이야?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느낌에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멸망 엔딩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작가 양반!

    흥분해서 손을 휘휘 내저으니, 시스템 창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앉은 자리에서 씩씩거리며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넣어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 멸망 엔딩에 대한 떡밥은 계속해서 나왔었다. 예언자가 있는 노른 길드도 그렇고, 최후의 던전이 곧 출현한다며 쓸데없이 무게를 잡는 것도 그렇고, 완결 전에 주인공들에게 시련을 팍팍 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었다 이거지.

    그래도 멸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시련을 극복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게 진정한 엔딩 아니야? 어? 그럴 거면 주인공들 레벨 업은 왜 그렇게 시키고 사기 스킬도 팍팍 줬던 거냐고. 그러고서는 멸망? 장난하나, 진짜.

    “아오!”

    하필 나는 왜 이런 소설에 빙의를 해서……!

    아니, 잠깐.

    이거 잘하면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어차피 나는 심단테가 기계만 복구하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종장이면 소설의 완결이라는 건데, 최소 1년은 넘게 걸리겠지.

    “으음…….”

    그래도 혹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종장에 대비해야 하려나. 심단테 그놈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본 건 아마 소설의 끝 장면일 것이다. 내가 읽지 못한 이 소설의 결말.

    그런데 왜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준 거지? 게다가 마지막 장면을 보여 줬으면서 시스템 창에 뜬 건 또 뭐고?

    「다음 열람에 필요한 ‘이그드라실의 정수’의 개수: 0/1」

    “다음 열람이라…….”

    이거 혹시 내가 소설에서 읽지 못한 부분까지 거꾸로 보여 주는 건가? 그러면 던전을 돌다 보면 멸망 과정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

    “흠, 좋아.”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일단 던전을 돌면서 이그드라실의 정수를 모아 봐야겠다. 그러면 이 빌어먹을 소설이 어쩌다가 그런 막장 엔딩으로 끝나는 건지 알 수 있겠지. 우선 알아야 대비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하아아, 미치겠네.”

    “까우우.”

    한숨을 내쉬자 용식이가 내 눈치를 보며 작게 울었다.

    그나저나 용식이는 대체 뭐지? 단순한 소환수라고 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꽤 있었다.

    “용식아, 너 혹시…….”

    “꺄우?”

    “…….”

    북유럽 신화에서의 니드호그는 라그나로크 이후 세상이 멸망한 뒤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역할이다. 예언가의 계시에서 니드호그가 멸망한 땅 위를 날아다니는 게 마지막 구절이었지.

    그럼 혹시 내가 본 게 니드호그, 어쩌면 용식이의 시선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용식이가 이미 멸망 엔딩을 한 번 겪었다는 건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아마 용식이가 내 소환수가 되면서 시스템 오류가 난 게 아닐까 싶었다.

    “음,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꺄우…….”

    뭐, 어쨌든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앞으로도 용식이에게 이그드라실의 정수를 먹여서 소설 내용을 파악해 둬야지.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웃으면서 용식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쾅쾅!

    “응?”

    “이진아, 한이진!”

    “뭐야.”

    문을 부술 듯 두드리며 이든이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눈살을 찌푸린 내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갔다.

    “왜?”

    “겜방 가자!”

    “아침부터 뭔 게임이야.”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이든을 쳐다봤다. 이든은 요즘 지하에 있는 게임방의 VR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혼자 하는 건 재미없다고 자꾸만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럼 밥 먹고 가자.”

    “애냐, 진짜……. 너 그러다 게임 중독 걸린다.”

    “아, 빨리이.”

    “음.”

    고민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방에서 할 일도 없었던 차였다.

    슬슬 VR 게임도 지겨워질 정도로 숙소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하긴 하다. 하지만 아마 곧 다음에 투입될 던전이 결정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다음 던전은 아마도…….

    “이진아, 왜 그래?”

    “응? 아냐.”

    거긴 아마 세(Sæ) 던전보다 더 빡셀 텐데.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강유현이 가는 곳에 껌딱지 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거기를 갈 바에는 VR 게임이 훨씬 낫지, 그렇고말고.

    “야, VR 하고 강수현 방에서 짐숲도 하자.”

    “……난 그 새끼 방 들어가기 싫은데.”

    “그럼 넌 하지 말든지.”

    “뭐? 누가 안 한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든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

    [그러면 그 숙소에서 네 분이 평소에는 뭐 하세요?]

    [저는 던전 다녀오고 거의 잠만 자구요. 이든은 거의 뭐 VR 중독자예요. 그래서 저도 가끔 같이 해요.]

    [어머, 숙소에 VR이 있어요?]

    [네, 수현이 방에는 짐숲도 있어요. 거기서는 큰 화면으로 할 수 있어서 종종 가서 해요.]

    [그러면 네 분이서 VR이랑 짐숲하고 노는 거예요?]

    [아, 강유현은 거의 안 하는데…….]

    까르륵, 하고 웃는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티브이로 너튜브를 튼 라이수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흐음, 뭐야. 예쁘게 생겼네?”

    화면은 연신 웃음꽃을 피우는 한이진의 얼굴이 꽉 채워져 있었다. 라이수가 흥미로운 눈으로 길게 튀어나온 덧니가 매력적인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렇게 생긴 애인 줄 알았으면 진작 가졌을 텐데. 그동안 감쪽같이 몰랐네.”

    “…….”

    “그치? 시후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옆에 서 있던 백시후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이진의 스킬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흥, 재미없기는.”

    입술을 비죽거린 라이수가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볼수록 예전에 키웠던 갈색 털을 가진 치즈 고양이가 생각났다.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그의 뒤에서 새하얀 팔 두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가 그렇게 예뻐요, 파파?”

    금발의 남자가 라이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마치 노란 보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남자의 머리카락과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에반.”

    “흐음, 쟤요? 쟤가 나보다 더 예뻐요?”

    에반이라 불린 남자의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 순간, 온순해 보이던 그의 눈에 흉흉한 기운이 도사렸다. 라이수가 손을 뻗어 에반의 뺨을 매만졌다.

    “당연히 너보다는 아니지. 너는 내 최고의 작품이니까.”

    “헤헤.”

    고개를 돌린 에반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이처럼 웃었다. 명화에 그려진 남신 같은 얼굴이 후광을 내뿜었다.

    [아, 그래서 그때 제가…….]

    팟, 하고 화면이 꺼졌다. 리모컨을 든 라이수가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꺼진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딘 길드는 곧 무스펠헤임 던전 공략을 지원할 거야. 꼴사납게도 상현이가 클리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지.”

    극비인 정보임에도 라이수는 예측만으로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하지만 오딘 길드 내의 게이트는 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단 말이지.”

    오딘 길드 본부 자체가 철통의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숙소가 있는 게이트 안쪽은 훨씬 더했다. 그러니 그 내밀한 곳에 콕 처박혀 있는 한이진을 꺼내 오는 방법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던전에 가서, 그 고양이 데려와.”

    유일한 방법은 한이진이 숙소에서 나왔을 때, 던전 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빼내 오는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아, 거기는 피부 많이 타서 싫은데.”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백시후와 다르게 에반은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눈을 반짝이며 라이수에게 물었다.

    “근데 꼭 살려서 데려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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