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오딘 길드의 최상층.
작은 회의실 안에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비단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한국의 5대 대형 길드. 오늘은 바로 그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워낙 각 길드 마스터들의 개성이 뚜렷하다 보니, 평소에도 산뜻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심했다.
침묵이 깔린 회의장을 한번 쭉 둘러본 박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들었습니까?”
“…….”
“…….”
박윤성의 물음에 각 길드의 마스터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는 프레이야 길드의 마스터, 송차현이었다.
이번에 프레이야 길드가 세(Sæ) 던전을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했다는 소식은 대형 길드들을 술렁이게 했다. 과거 세(Sæ) 던전 공략에 용병을 보낸 적이 있던 길드들은 더 그랬다.
세(Sæ) 던전은 전 세계에서 난이도가 극악으로 손꼽히는 던전 중 하나였다. 바다에 위치한 최악의 지형 조건과 다섯 구역이나 존재하는 영역의 크기, 그리고 강력한 몬스터들. 다른 길드는 관리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던전이었다.
그런 곳을 프레이야 길드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면서 단 한 번도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지 않은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던전 이상 현상이 생기면서 각 길드의 대응이 지금까지와는 달라졌다. 아무리 프레이야 길드라고 할지라도 세(Sæ) 던전만큼은 전처럼 독점적으로 관리할 수 없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능력자가 그 판도를 뒤집었다는 게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은 아직도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들 아직 믿기 힘들다는 눈초리들인데.”
“음……”
송차현의 차가운 말에 토르 길드의 마스터, 차강태가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거, 솔직히 SS급인가 뭔가 하는 강유현이? 걔 때문이라면 몰라도 고작 보조 스킬이 그 정도로 도움 된다는 게…… 응?”
“…….”
“나만 그래? 나만 믿기 힘들어?”
차강태가 어깨를 으쓱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그를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쪽이 믿든, 믿지 않든 결과가 말해 주지 않습니까.”
헤임달 길드의 마스터 서진한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차강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참, 또 나만 나쁜 놈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차강태를 외면하며 서진한이 박윤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중대한 때에 박윤성 마스터와 송차현 마스터가 장난칠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요.”
등급 이상 현상으로 각 길드들은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헤임달 길드 역시 소유하고 있는 던전을 관리할 여력이 부족했다. 솔직한 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 그건 그렇지.”
부정적인 의견만 쏟아 내던 차강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길드도 얼마 전 등급이 올라간 던전을 겨우 클리어했던 참이었다. 그의 눈이 앞에 놓인 보고서로 향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세(Sæ) 던전의 상세 보고서는 기밀이므로 다른 곳에서는 절대 언급하셔선 안 됩니다.”
“아, 알고 있다니까. 계약서에도 사인했구만.”
오늘은 유독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까다롭게 굴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난독증이 있는 차강태는 보고서를 술렁술렁 넘기다가 끝에 요약한 것만 겨우 읽었다.
“그러니까, 그 보조 스킬을 받은 A급이랑 S급 능력자들이 혼자 1구역과 2구역을 휩쓸고, 강유현 같은 SS급 능력자는 혼자서 SS급 보스몹도 해치운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보조 스킬 거는 놈은 S급 용종 소환수를 데리고 있는데, 그 소환수랑 성유빈이랑 같이 3구역 보스몹도 해치웠다?”
“그랬다고 하더군요.”
“거참, 이거 완전 난놈 아녀.”
보고서 내용이 확실하다면 당장 영입하고 싶은 인재, 아니,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던전에 데리고 가고 싶은 능력자였다.
“다 필요 없고, 그 연합인지 뭔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원받을 수 있는 겁니까? 네?”
가만히 있던 진상현이 다리를 덜덜 떨며 다급하게 물었다.
티르 길드의 마스터 진상현.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연신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사정을 아는 박윤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쉬쉬하고 있었으나, 얼마 전 티르 길드는 관리 중인 던전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바로 세(Sæ) 던전만큼이나 난이도가 극악이라고 평가받는 무스펠헤임 던전이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주요 전력인 상위 등급의 능력자들이 부상을 입어 큰 손실이 있었다. 현재 티르 길드는 자력으로 던전 클리어를 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입니다.”
“후우…….”
박윤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상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까칠해진 피부와 짙은 다크서클이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티르 길드는 그 연합에 들어가겠습니다.”
“프레이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진한 역시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임달 길드도 함께하겠습니다.”
“…….”
“…….”
그러자 차강태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뭐야, 나만 남은 거야?”
주변을 둘러본 차강태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대형 길드들이 똘똘 뭉쳐야 하는 건 맞다. 굳이 보조 스킬의 능력자를 미끼로 쓰지 않아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중심이 이번에도 오딘 길드라는 게 내키지 않았다. 자신감에 차 있는 박윤성의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알았어. 들어가겠다고. 그 연합인지 뭔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떨떠름한 얼굴의 차강태를 보며 박윤성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로써 5대 대형 길드가 연합을 만들어 똘똘 뭉치게 되었다. 이 연합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협회를 제외한다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그자는 개의치 않겠지.’
협회도 어쩌지 못할 대형 길드들의 연합을 어린애 장난처럼 볼 그 남자.
라우페이 길드의 마스터 라이수.
지금은 오로지 그의 존재만이 박윤성이 걱정하는 전부였다.
“다음 지원은 어떤 기준으로 정합니까? 알다시피 우리 쪽이 좀 급합니다.”
티르 길드의 사정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박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방면으로 살펴서 지원할 예정입니다. 무스펠헤임 던전의 브레이크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최대한 선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상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본래 국내 1위 길드라는 간판은 명실상부하게 티르 길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윤성을 중심으로 한 랭커들이 모인 오딘 길드가 치고 올라오더니, 그대로 1위의 자리까지 내어 주었다. 이젠 그 SS급의 강유현과 S급 보조 스킬을 가진 능력자까지. 격차가 점점 손 쓸 수도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 납작 엎드려야 할 때였다. 브레이크가 가까운 무스펠헤임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한 지금, 괜한 자존심을 세워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그럼 우리 쪽이었으면 하는데. 여기도 좀 급해.”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요.”
“너 고양이 키우잖아. 걔한테 도와 달라고 해.”
“장난합니까?”
질 나쁜 농담을 하는 차강태를 서진한이 경멸스럽다는 듯 노려봤다. 그리고 차강태는 그 시선에 오히려 껄껄 웃었다.
“다른 의견이 없다면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도록 하죠.”
“그래, 다음에 볼 때까지 다들 살아 있으라고.”
“기분 나쁜 말 좀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차강태가 질색하는 서진한의 어깨를 팡팡 치며 밖으로 나갔다. 얼굴을 구긴 진상현 역시 그 뒤를 따라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 안에는 박윤성과 송차현만이 남았다.
“윤성아.”
“……네, 누님.”
자리에서 일어난 송차현이 박윤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눈이 박윤성을 내려다봤다.
“지원 덕분에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할 수 있었어.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둘은 대학 선후배 사이였다. 그것도 박윤성에게 있어서 송차현은 꽤 까마득한 선배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둘에게는 그때의 관계성이 남아 있었다.
물론 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윤성의 속내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송차현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한이진 능력자의 임시 계약, 기간이 꽤 짧은 것 같던데.”
“…….”
“과연 다음 계약도 오딘 길드와 할지 궁금하네.”
한이진의 계약서 내용은 오딘 길드 내에서도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아마 정보가 샌 게 아니라, 떠보려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박윤성은 언제나처럼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임시 계약이니까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붙잡아야죠.”
“그래. 최선을 다해 봐.”
“…….”
“…….”
보이지 않는 날 선 시선이 서로 오갔다.
당분간은 공공의 적을 위해 힘을 합쳐야겠지만, 송차현 역시 S급 보조 스킬이 탐났다. 그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지금은 한이진 자체가 탐이 날 정도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오딘 길드와도 경쟁할 날이 올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송차현이 손을 한 번 흔들고는 유유히 회의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