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큭……!」
송차현이 이를 악물며 무기를 휘둘렀다. 그녀의 키만 한 대검이 정예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일찍 움직이기 시작한 보스 몬스터 때문인지 정예 몬스터들의 기세가 너무나 사나웠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정예 몬스터들 때문에 발키리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열이 흐트러진 한가운데서, 송차현이 고개를 들었다. 기운에 예민한 그녀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불길한 기운이었다.
「……!」
순간, 어떤 기억이 송차현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비틀거리자, 근처에 있던 선율이가 놀라며 다가왔다.
「언니!」
「윽…….」
「괜찮아요?」
「응, 별거 아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송차현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다. 설마 등급 이상 현상이 생기면서 정예 몬스터들에게 독 같은 상태 이상 스킬이라도 생긴 건가. 선율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길마님! 부길마님!」
「……구슬 능력자?」
「허억, 헉…….」
전투가 한창인 곳으로 달려온 구슬을 보며 송차현과 선율이가 입을 벌렸다. 게다가 구슬의 뒤로 지원팀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저희가 있던 곳에 몬스터들이 나타났어요!」
「뭐라고요?」
「그래서 지금 한이진 능력자님이…….」
구슬이 가리키는 쪽으로 송차현과 선율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
「……!」
그곳에는 공중에서 새카만 몬스터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한이진이 있었다.
***
「야, 오른쪽! 아니, 더 밑에, 좀만 더 내려가!」
「이진아, 소리가 안 들려서 일일이 보기 힘들거든?」
「아, 일단 가!」
몰려 있는 몹들에게 기관총을 쏘고는 다시 이동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이든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몹들 사이를 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이든은 정말 신이 내린 몹 몰이꾼이었다.
어째서 세(Sæ) 던전 한복판에 알브헤임 던전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 칙칙한 색의 드라우그들은 니플헤임의 몬스터니까, 엄밀히 말하면 니플헤임의 몬스터들이 세(Sæ) 던전에 난입한 걸로 봐야 했다.
그러면 혹시 세(Sæ) 던전의 채널도 니플헤임으로 바뀐 건가? 그런 알림이 뜨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곧 그런 잡생각을 할 시간도 없어졌다. 바닥을 향해 내려가던 이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드라우그들을 피해 위로 휙 날아가듯 헤엄쳤다.
「젠장, 쫓아온다!」
「위로 올라가!」
드라우그들은 바닷속인데도 불구하고 금방 적응했다. 마치 처음부터 바다가 익숙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북유럽 사람들은 바닷속에도 망자가 살고 있다고 믿지 않았었나? 거친 파도가 치거나 해일이 일어나는 걸 바다에서 살고 있는 망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
오싹한 생각에 안색을 굳혔을 때였다.
「윽……!」
「이진아!」
기관총의 탄창을 교체하는 순간을 틈타 몬스터가 공격했다. 몬스터의 손에 스친 팔에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고통이 확, 하고 밀려들었다.
[드라우그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지속 시간: 5분.]
「아, 씨발.」
「이진아, 괜찮아?」
하필 탄창을 든 손이 저주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확 수류탄을 던져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인상을 썼을 때였다.
【멈춰.】
익숙한 음성과 함께 우리에게 달려들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강수현!」
「어서 쏴요!」
스킬을 발동하며 강수현이 외쳤다. 그가 감당하기에는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제길…….」
하지만 드라우그의 저주를 받은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내 주변에서 몬스터들을 없애던 용식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용식아?」
「꺄우!」
「윽……!」
용식이가 저주에 걸린 내 팔을 깨물었다. 물론, 세게 깨문 것은 아니지만 순간 놀라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용식이가 팔을 깨물자, 시커멓게 달라붙어 있던 연기가 용식이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설마 먹는 건가? 이 새카만 연기는 아마 드라우그가 건 저주일 텐데, 그걸 먹는 거야? 나는 놀라며 외쳤다.
「용식아, 먹지 마! 지지야, 지지!」
「꺽.」
「…….」
입을 뗀 용식이는 만족한 듯이 트림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맛있니……?
그렇게 물으려던 나는 강수현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킬 곧 풀려요!」
「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로 탄창을 갈고 이든의 어깨를 두드렸다.
「좀 더 위로 올라가!」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이든이 순식간에 까마득한 곳까지 올라갔다. 보조 스킬을 받아서 이든의 능력치도 많이 향상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든에게는 정예몹들을 몰살할 만한 광역 스킬이 없기 때문에 마무리 역할은 내가 맡게 되었다.
묵직한 기관총을 잡고 몹들을 향해 조준했다. 강수현의 스킬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몹들은 멀리 있는 과녁보다 훨씬 맞추기 쉬웠다.
이윽고 총에서 불을 뿜었다.
***
「크아아아!」
거대한 해룡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이제 마지막 공격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화력을 거의 다 쏟아부은 성유빈과 한여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들의 눈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
그러나 왜인지 강유현은 해룡을 보며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마검에서 거친 기운이 퍼져 나왔다.
「…….」
강유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무언가가 그의 몸을 옭아매었다.
「강유현, 뭐 하는 거야?」
「…….」
지친 얼굴로 한여름이 외쳤다. 그녀의 몸은 격한 전투로 엉망이었다.
이제 마지막 공격만 하면 해룡을 끝낼 수 있다. 그건 곧, 이 지긋지긋한 세(Sæ)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빨리 돌아가서 맥주나 한잔하고 싶다. 그런 간절한 바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강유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저 미친 새끼가…….」
「일단 기다려 봐.」
「그럴 상황이야, 지금?」
「…….」
성유빈의 차분한 표정에 한여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도 성유빈은 가만히 서 있는 강유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강유현의 시선이 해룡 라슈디르로 향했다.
노란색으로 빛나던 몸체는 피투성이가 되어 형태를 잘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저 호박색 눈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라슈디르의 눈과 강유현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강유현의 머릿속으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일수록 달콤한 법이지.】
「……!」
【부디 마음껏 즐겨 보라고.】
조롱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눈살을 찌푸린 강유현이 마검을 들어 올렸다.
마검 티르빙의 주위로 새카만 기운이 몰아쳤다. 그 흉흉한 기세에 불만을 표하던 한여름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역시 SS급은 SS급이다. 성유빈 역시 긴장하며 해룡의 거대한 몸체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세(Sæ)-S76의 보스 몬스터 ‘해룡 라슈디르’를 처치하였습니다.]
[세(Sæ)-S76를 최초로 공략한 플레이어에게 ‘해양 세계를 제패한 자(L)’의 칭호가 내려집니다.]
[세(Sæ)-S76의 접속이 곧 종료됩니다.]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던 시스템 음성이 공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이진아!」
「흐어…….」
시스템 음성을 들은 나는 몸을 축 늘어트렸다.
드디어…… 끝났다!
이 지긋지긋한 세(Sæ) 던전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못 움직이겠어? 나한테 기대.」
「고맙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몸에 힘이 탁 풀린 나는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리며 이든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히죽 웃은 이든이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너무 지쳐서 그런지 밀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졸리다. 우습게도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긴장하는 바람에 잠을 자기 힘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시스템 음성이 귓가에 작게 들렸다.
[아이템이 귀속됩니다.]
‘……아이템?’
멍하니 눈을 깜박인 나는 무심결에 인벤토리를 뒤졌다. 분명 이번에도 아이템은 프레이야 길드의 수거팀이 다 챙겨 갈 텐데, 왜 이런 음성이 들리는 거지? 오류인가? 의아한 얼굴로 새로 들어온 아이템을 확인한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
「이그드라실의 정수(L)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기운이 담긴 결정체.
영구 귀속 아이템.」
이게 무슨…….
이그드라실의 정수가 이렇게 빨리 나온다고? 아니, 그보다 왜 나한테? 심지어 받자마자 영구 귀속?
머릿속에서 온갖 의문들이 소용돌이쳤다. 그런 나를 보며 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의아해하는 이든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고개를 돌렸다. 눈으로 송차현과 선율이의 위치를 좇았다.
「한이진 능력자!」
「아…….」
그런데 내가 찾을 필요 없이 그쪽에서 먼저 다가왔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송차현을 바라보았다.
「길마님, 사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네, 다친 곳은 없는데요. 근데 사실은 제가…….」
「팔이 잘 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등 쪽에도 상처가 있군요.」
「아니, 이건…….」
「구슬 능력자!」
「네!」
「…….」
송차현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수선을 떨었다. 결국 아이템에 대해 입도 열지 못하고 구슬에게 치료를 받았다. 멀쩡해진 나를 보고 안심한 얼굴로 송차현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한이진 능력자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군요.」
「빚이요?」
「던전을 나가면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나에게 빚졌다는 사람이 많아? 내가 무슨 사채업자야?
당황한 나를 놔두고 송차현은 공대를 정비한다며 훌쩍 떠났다.
뭐, 포털이 열리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바쁠 만은 하다. 나는 던전에서 나간 다음 송차현과 다시 말해 보기로 했다.
「대열을 흩트리지 말고, 차례대로 포털을 타기 바랍니다!」
나는 다가오는 파란색 포털을 보다가 흘끗 시계를 쳐다봤다. 던전에 들어오면서부터 재고 있었던 시간을 터치해서 멈추었다.
삐빅.
70시간 46분 02초.
이번 세(Sæ) 던전을 공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