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런 것 같군요.”
주변을 둘러보던 송차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중간 보스몹이 있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는데, 퍽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럼 대체 탐지가 되지 않았던 이유가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다음 구역으로 가는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 워프 포인트를 지나면 3구역이나 4구역에 랜덤으로 이동하는데, 워프하는 지점이 매번 달라져서 준비하는 시간이 꽤 걸리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3구역으로 이동했는데 워프한 지점이 3구역 초입일 수도 있고, 중반일 수도 있고, 아니면 후반부의 중간 보스몹 코앞일 수도 있었다.
중간 보스몹 바로 앞에 떨어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지만, 그래도 랜덤으로 그럴 확률은 있었다. 그래서 전투에 앞장서는 발키리들은 갑작스럽게 물에 빠질 수도 있기에 벌써부터 잠수복과 아이템들을 챙기고 있었다.
후방에서 따라갈 지원팀은 아직 그 정도로 준비하진 않기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곧 둘이서만 4구역에 빠질 주인공과 히로인을 살펴보았다.
이제 저 워프 포털만 지나면 강유현과 성유빈만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성유빈은 아직 스킬 대기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나는 강유현에게 은근슬쩍 스킬을 걸어 줄 속셈이었다.
다행인 건 페어인 강유현이 계속 내 곁에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하면 너무 티가 나니까 포털 지나기 직전에 우연인 척 손을 잡아서 스킬을 써 줘야지. 좋아, 완벽해.
남몰래 완벽한 플랜을 생각하며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는데,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강유현이 물었다.
“왜 그러지?”
“응? 뭐가?”
“긴장했나?”
“……?”
긴장해? 내가? 웃음을 참는 얼굴이 그렇게 보였나?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긴장 안 했는데?”
“…….”
그러자 강유현은 여전히 심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널 지켜 줄 테니.”
“……!”
놀란 얼굴로 강유현을 쳐다봤다.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으면서 툭 내뱉는 설레는 말. 소설에서 강유현이 히로인들에게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이기도 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는 왜 히로인들에게나 하는 말을 나한테 하고 지랄이야?
어이없는 눈으로 강유현을 쳐다보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무게감이 확 느껴졌다.
“으악!”
“이진아, 나도! 나도 지켜 줄게!”
“무거워, 새끼야!”
이든이 뒤에서 나를 덮치듯이 껴안았다. 바둥거리면서 벗어나자, 이든이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부끄러워하긴.”
“씨발.”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짜증 내는 얼굴이 부끄러워하는 거로 보일 수가 있지? 얼굴을 팍 찡그리는데, 왜인지 이든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재수 없다, 진짜.
정강이라도 확 차서 날려 줄까 고민하는데, 그때 송차현의 음성이 공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아, 다들 들리십니까.]
음성 확대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송차현의 음성이 훨씬 크게 들렸다. 넓은 동굴 안에 계속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곧 중간 보스 몬스터가 있는 구역으로 포털을 타고 이동할 예정입니다. 각 부대는 순서를 지켜 차례대로 포털을 지나시기 바랍니다.]
“…….”
워프하자마자 돌입할 수 있는 전투 상황에 대비해서 맨 앞에는 발키리 부대원들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지원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강유현, 이든 역시 지원팀 사람들과 함께 포털을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 와서 놀이 기구 기다릴 때의 느낌이 들었다.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긴장감이 별로 안 들어서 그런가. 어차피 나는 3구역에서도 뒤에서 설렁설렁 구경이나 할 테니 말이다.
아마 둘이서만 4구역에 떨어지는 강유현과 성유빈은 원작처럼 엄청나게 개고생 할 것이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강유현을 흘끗 쳐다봤다.
“왜?”
“음, 아무것도 아니다.”
주인공이니까 어쩔 수 없지. 히로인과 화해하는 에피소드니까 무척 중요하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강유현과 성유빈을 힘껏 응원했다. 그리고 포털을 기다리면서 강유현과 터치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포털을 타기 직전에 잡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SS급인 강유현은 뭔가가 자기 몸에 닿는 걸 기가 막히게 잘 알아챌 텐데. 차라리 거의 포털에 들어갈 때…… 아니, 그건 너무 늦는다. 그러면 포털 타기 직전에 넘어지는 척이라도 할까?
미연시 게임의 여주인공 같은 생각을 하며 포털에 들어가는 줄을 따라 이동하는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의 손이 허리를 잡아챘다.
“이진아, 위험하니까 나한테 붙어 있어.”
“아니……!”
또 이든이 참견질을 하며 날 끌어당겼다. 강유현의 손을 잡을 기회만 보고 있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확 멀어진 강유현을 흘끗 보다가 이든을 밀어 냈다.
“아, 좀. 내가 앤 줄 알아?”
“애 취급 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
이든과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강유현과 조금 멀어졌다. 초조해진 내가 포털에 들어가기 직전인 그를 불러 세웠다.
“야, 강유현!”
어쩐지 그는 포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와 이든을 노려보듯이 쳐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강유현이 손을 뻗었다. 이게 웬 떡이냐. 마침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유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라?”
그리고 스킬만 잽싸게 쓰고 놓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스킬 발동이 되지 않았다. 강유현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갸웃하는데,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던 강유현이 어딘지 누그러진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빨리 와.”
“어, 그래…….”
개박하! 망할 개박하 스킬! 빨리 발동하라고! 이제 포털 지난단 말이야!
“젠장.”
그리고 다가온 파란빛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
“다 모였나?”
“인원 확인 중입니다.”
송차현의 물음에 선율이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그녀의 눈이 옆에 다가온 성유빈을 향했다.
“발키리 부대 인원, 이상 없나?”
“네, 전원 모여 있습니다.”
“지원팀은?”
“지원팀은…….”
성유빈이 고개를 돌려 지원팀의 팀장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가 인원 확인을 끝내고 달려오던 참이었다.
“저……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숨을 몰아쉬던 지원팀 팀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강유현 능력자와 한이진 능력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지원팀 팀장의 보고에 송차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잘 확인해 봤나?”
“네, 혹 포털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어서 계속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 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쩔쩔매며 대답한 지원팀 팀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송차현이 굳은 얼굴로 해송하를 응시했다.
“탐지 끝났습니까?”
“네.”
고개를 끄덕인 해송하의 어깨에서 다람쥐 형태의 소환수, 라티가 불쑥 튀어나와 코를 벌렁거렸다.
“여기는 3구역인 머메이드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위치는 3구역의 중간 정도인 것 같아요. 이대로 가면 중간 보스 몬스터가 있는 해저로 진입할 것 같습니다.”
“하, 위치는 좋군요.”
그러나 문제는 행방불명된 두 능력자였다. 하필 핵심 인력이 사라졌으니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볼까요?”
“…….”
송차현의 눈이 불 꺼진 워프 포털을 향했다. 그것을 보던 송차현이 다시 해송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강유현 능력자와 한이진 능력자를 탐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 강수현 능력자와 찾아볼게요.”
아무래도 낮은 등급 때문에 광범위한 탐지가 불가능한 해송하가 몸을 돌려 강수현에게로 갔다. 심각한 얼굴로 탐지 중이던 강수현이 해송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S급이 된 강수현은 스킬 등급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해송하의 공감 스킬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해송하의 스킬 등급만큼 능력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곧 해송하가 어두운 얼굴로 송차현에게 돌아왔다.
“두 분 다 3구역에는 안 계신 것 같아요. 전혀 탐지가 안 돼요.”
“하…….”
가끔 던전 안의 워프 포털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하던데. 하필 이번 던전 공략 때 문제가 일어나다니. 송차현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흘렀다.
“강유현 능력자와 한이진 능력자 없이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율이가 애써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송차현의 굳은 얼굴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물론 공대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만약 그 둘이 4구역이나 5구역으로 잘못 흘러 들어갔다면…….”
“…….”
송차현의 중얼거림에 선율이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중간 보스 몬스터가 있는 4구역, 그리고 세(Sæ)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있는 5구역.
아무리 강유현이 SS급의 능력자고, 한이진이 S급 보조 스킬을 가졌다고 해도 단둘이서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강유현이라면 혼자서 중간 보스 몬스터나 보스 몬스터도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강유현이 보스 몬스터를 무찌를 동안 혼자가 될 한이진은 완벽하게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없는 B급 능력자는 굳이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도 다른 몬스터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겨 버릴지도 몰랐다.
“어서 우리가 중간 보스 몬스터를 없애고 두 사람을 찾아봐야겠어.”
“예, 진행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선율이가 선발대의 발키리들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디선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크르르릉…….”
“……뭐지?”
중립 지역으로 워프한 줄 알았는데, 몬스터가 등장했나? 동굴을 뒤흔드는 울음소리에 능력자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건……?”
동굴 안을 꽉 채운 거대한 존재에 송차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와 마주친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캬아아아!”
몸집을 키운 사나운 독룡이 크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