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조금 이르지만 발키리들에게 보조 스킬을 걸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송차현을 따라갔다. 그런데 그런 나와 송차현을 가로막으며 성유빈이 외쳤다.
“그럼 제가 제일 먼저……!”
“넌 가장 마지막이야. 대장님.”
“왜……!”
성유빈은 한여름과 차민희에게 각각 팔 하나씩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바둥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조금 당황했다. 발키리 중에서 성유빈이 아니면 누가 먼저 내 스킬을 받는 거지?
전투력을 고려하면 당연히 성유빈이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송차현이 의외의 인물에게 나를 데려갔다.
“해송연 대원과는 배에서 인사를 나눴지요?”
“아, 네…….”
“…….”
해송하의 키 큰 여동생, 해송연이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스킬 하나 거는 데 참 격식 차린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전투계 능력자들로서는 보조 스킬 한두 개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은 광역기를 가진 전투원들에게 스킬을 걸어 주시면 됩니다. 스킬이 걸린 1시간 동안 스킬을 건 대원을 선두로 해서 1구역을 빠르게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광역기 스킬이라. 과연 어떤 스킬일까. 소설에서는 히로인인 성유빈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져 있어서 다른 멤버들의 능력은 대부분 나오지 않았었다.
아니, 거의 등장을 안 하다시피 했었지. 그래서 나는 해송연의 광역기 스킬이 뭔지 잘 모른다.
눈을 살짝 빛내며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멀뚱하게 내 손을 내려다보던 해송연이 곧 스킬을 거는 데 필요한 행위라는 걸 깨닫고 입을 벌려 작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손만 살짝 잡아 주시면 됩니다.”
“네.”
고개를 끄덕인 해송연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재빨리 개박하 스킬을 걸었다. 마주 잡은 해송연의 손이 조금 뜨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됐습니다.”
이쯤 하면 됐겠지 싶어서 손을 놓았다. 그런데 어딘가 멍한 얼굴을 한 해송연은 여전히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해송연 능력자?”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송연이 얼른 손을 놓았다.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한 그녀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흠, 실례했습니다.”
“아뇨, 저야말로.”
이런 이상한 스킬이라 제가 더 죄송합니다.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고 뒤로 물러났다. 해송연이 마주 잡았던 손을 쥐었다 펴며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느낌이 어때?”
“…….”
“힘이 막 갑자기 샘솟고 그런가?”
한여름이 다가와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해송연은 아무런 말 없이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요.”
“흐음, 그래?”
짐짓 김빠졌다는 얼굴을 한 한여름이 어깨를 으쓱했다. 곧바로 송차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아까우니 빨리 진행합시다. 한이진 능력자, 속도가 빨라져도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아마도?”
공략 속도를 얼마나 높이려고 저런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 양옆에는 강유현도 있고 이든도 있으니 괜찮겠지? 특히 이든은 바람 능력이라 속도를 높이는 덴 도가 텄다.
힐끗, 이든을 보니 자기만 믿으라는 듯 느끼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송차현을 바라보았다.
“잘 따라갈 겁니다.”
“좋군요.”
고개를 끄덕인 송차현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지휘에 발키리는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쳤다.
선두에 선 해송연에게 해송하가 가까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아마 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는 듯싶었다.
해송하의 말에 해송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해송하가 손을 들어 해송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참 사이좋은 남매로 보였다. 비록 엄청난 키 차이 때문에 오빠인 해송하가 까치발을 들어 겨우 머리를 쓰다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사이가 좋은 건 잘된 거지.
“출발!”
송차현의 외침이 주변을 울리고, 맨 앞에 선 해송연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해변의 모래를 박차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길게 묶은 말총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전투 부대가 아닌 공대 인원들은 그 스피드를 따라가기에도 벅차 보였다. 그만큼 해송연의 스피드가 엄청 빨랐다. 아마 나 역시 이든의 스킬이 없었으면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멀록 무리가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기다란 낫처럼 보이는 무기를 해송연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낫 같은 무기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손에 쥔 낫이 더 크고 길었고, 왼손에 있는 낫은 작고 짧았다. 두 낫은 굵직한 쇠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곧 그 무기가 무슨 역할인지 깨달았다.
파지지직!
해송연의 주위로 새파란 전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무기 주변으로 전기가 모여들었다.
과연, 해송연은 전기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저 무기가 피뢰침 역할을 해서 광역기를 쓸 수 있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꾸에에에엑!”
“끼에에에엑!”
멀록들이 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전기 구이가 되어 버렸다. 성유빈의 불꽃에 타는 것보다 어째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전기니까 물에서 특히 전류가 잘 흐르겠구나. 절로 멀록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헉…….”
“……?”
선두에서 몹들을 지지고 있는 해송연을 필두로, 나머지 발키리 부대와 지원 부대가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몹들이 죽어 버려서, 수거팀이 애를 먹고 있었다.
원래는 몹을 죽이면 자동으로 아이템 분배가 되는데, 발키리들이 워낙 가지고 있는 장비와 아이템들이 많다 보니 인벤토리가 꽉 차 원활한 레이드 진행이 불가했다.
그래서 대부분 대규모 던전 공략 팀은 전투하는 인원들의 인벤토리를 잠그게 하고, 튕겨 나간 아이템들을 챙기는 수거팀을 따로 만든다. 그런데 지금은 해송연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수거팀이 뒤를 따라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해송연 능력자가……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역시 그 스킬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수거팀이 날 흘끗거리며 수군거렸다. 뻘쭘해진 나는 저 멀리서 신나게 몹들을 쓸어 버리는 해송연을 응시했다. 파지지직, 마치 번개가 내리꽂히는 것처럼 이 주변 일대가 해송연이 내뿜는 전류에 휩쓸렸다.
멀록들뿐만 아니라, 성유빈을 덮친 것과 같은 새끼 수룡들이 해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해송연이 A급 능력자라고 했던가? 확실히 혼자서 했다기엔 지나친 성과였다.
그렇게 딱 1시간, 스킬이 풀리는 시간 동안 1구역의 절반 이상을 돌파한 모양이었다. 해송연이 멈추면서 공대 전체가 이동을 멈췄다.
“수거팀 정리가 끝나고 각자 휴식을 취한다.”
수거팀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원팀의 일원인 나도 조금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보다는 해송연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개박하 스킬을 써 본 상대가 강유현과 이든뿐이어서, 나도 데이터가 많이 부족했다. 앞으로도 이 스킬을 써먹으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해송연 능력자!”
“…….”
“괜찮아요?”
멍하니 서 있던 해송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차분해서 방금까지 미친 듯이 전투를 치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이진 능력자.”
“네?”
“당신은…….”
“……?”
뚜벅뚜벅, 해송연이 가까이 다가왔다. 덩치가 큰 그녀가 갑자기 다가오니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움찔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내 앞까지 성큼 다가온 해송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정말 대단했어요!”
“……네?”
“그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송연아!”
아이처럼 잔뜩 흥분한 해송연에게 해송하가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나는 그 틈을 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송연아, 괜찮아?”
“응,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힐러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냐, 나 진짜 다친 데 없어.”
이윽고 남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한이진 능력자님! 정말 대단한 스킬인 거 아니에요? 이런 보조 스킬은 듣도 보도 못했어요!”
“하, 하하…….”
“대체 무슨 스킬이길래 오딘 길드에서 그렇게 떵떵거렸나 싶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음, 역시 해송연은 처음에 나에게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안 그래도 보는 눈빛이 너무 싸늘하더라니.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해송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몸이 좀 피곤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나요? 갑작스럽게 힘이 쭉 빠진다거나.”
“확실히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나니까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은 들었는데, 기분은 아주 상쾌하고 좋습니다. 스카이다이빙 하고 내려온 것 같아요!”
“어음…….”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그랬었구나. 참 액티비티한 삶을 살았네.
어쨌든 보아하니 해송연에게는 그다지 부작용이 나타나진 않은 것 같았다. 강유현은 부작용이 심하게 왔던 것 같은데. 혹시 등급이 높을수록 스킬 반동을 크게 받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공대가 재정비할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은 누구한테 스킬을 걸면 되려나. 대충 해변가에 주저앉아 부르는 걸 기다리는데, 누군가가 손을 크게 흔들며 나에게 뛰어왔다.
“다음은 나! 나, 나, 나!!”
“어…… 한여름 능력자?”
발키리의 부대장인 한여름이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한이진 능력자!”
“아, 네.”
나도 얼른 반 장갑을 벗고 손을 맞잡았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한여름의 얼굴은 잔뜩 들떠 있었다. 스킬을 걸고 아까처럼 손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끼자마자 얼른 손을 빼냈다.
“흐음……?”
“……?”
고개를 기울인 한여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몸을 돌린 한여름이 큰소리로 외쳤다.
“좋았어! 내가 해송연보다 더 멀리 간다!”
“…….”
이거 무슨 대회처럼 된 건가…….
그녀는 곧 자기 몸보다 큰 몽둥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