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 송연아!”
해송하가 반가워하는 얼굴로 외쳤다. 그에게 다가온 190의 여자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한이진 능력자님, 제 동생 송연이에요. 그리고 송연아, 이분은…….”
“나도 알아.”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한 해송연이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프레이야 길드 발키리 1대대 소속 해송연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한이진……이라고 합니다.”
덩달아 나도 길드 소속을 밝힐 뻔했으나, 지금의 나는 무소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딘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서 함부로 말하기가 곤란했다. 나도 모르게 강유현이 있는 쪽을 흘끗 봤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길마님이 오빠 찾고 있어.”
“어? 정말?”
“응, ……그리고 오딘 길드 소속 여러분들도 이쪽으로 오시죠.”
해송연의 말투는 해송하를 대할 때와 우리를 대할 때 미묘한 차이가 났다. 하지만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내 주변의 산만 한 놈들에게 뒤지지 않는 피지컬을 가진 해송연이 요정 같은 해송하를 챙기는 모습이 퍽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남매가 저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마치 유전자 몰빵의 극치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송연은 우리를 갑판 끝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프레이야 길드의 핵심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승선하고 객실로 안내해 주었던 부길마인 선율이가 다가왔다.
“해송하 능력자.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물론이죠!”
선율이의 부드러운 말에 해송하가 씩씩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처럼 친근해 보였다. 아마 그동안 세(Sæ) 던전의 길잡이 역할을 해송하가 맡아서 해 온 것 같았다.
소설에서는 사실 이런 부분이 잘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인 강유현이 워낙 주변에 무심하기도 했고, 주요 인물이 아니면 서술이 극단적으로 생략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 해송하는 그냥 ‘길잡이’라고 몇 번 언급된 게 다인 것 같았다. 그러니 당연히 기억을 못 하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데, 선율이의 시선이 우리 쪽에 닿았다.
“오딘 길드 여러분들,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
“…….”
선율이의 물음에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부길마님.”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선율이가 어딘가를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들은 저희 길드의 주력 부대인 발키리 1대대와 함께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발키리의 리더인 성유빈이 현재……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제가 설명하는 걸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성유빈이?
어쩐지 승선하자마자 상태가 조금 안 좋아 보이던 성유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던전에 들어가는데 긴장했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슬쩍 물었다.
“성유빈 능력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이진 능력자.”
“…….”
왠지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은 기색을 풍겼다. 이 던전 공략,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의심스러워질 찰나, 선율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배는 던전 입구가 열리는 인근 섬에 정박합니다.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보트를 여러 번 나눠 타서 이동해야 하죠.”
세(Sæ) 던전은 지독하게도 바다 한가운데에 던전 입구가 열린다. 그게 가능한가 싶지만 가능하다. 소설에서는 바다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 새파란 던전 입구가 있다고 했던가.
입구 주변에는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해수면이 급격하게 거칠어져서, 아이템으로 강화한 보트와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던전 입구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이 많은 인원을 작은 보트로 옮기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 그동안 이런 까다로운 던전을 자력으로 공략해 온 프레이야 길드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번 입구는 다행히 저희가 매수한 섬에서 가깝다는군요. 별다른 피해 없이 던전에 입장할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보통 지상에서는 던전 입구가 한 번 열린 곳에서 계속 열린다. 클리어하고 나면 잠시 비활성화가 됐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활성화된다. 그렇게 같은 곳에서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반복하니 던전 관리가 제법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세(Sæ) 던전은 특이하게도 던전 입구가 열리는 곳이 매번 달랐다. 그래서 프레이야 길드는 던전 입구가 열리는 부근의 무인도를 죄다 사들였다. 우스갯소리로 세(Sæ) 던전이 열리는 인천 바다는 프레이야 길드의 자치 구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던전 관리가 수월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프레이야 길드가 아니라면 세(Sæ) 던전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오딘 길드 정도일 것이다.
“배는 1시간 후에 정박할 겁니다. 박윤성 마스터께서 던전에 관한 자료는 충분히 알려 주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Sæ) 던전은 생각보다 변수가 많은 곳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1대대 전투원들과 미리 말을 나눠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니, 선율이가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똑같은 전투복을 맞춰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프레이야 길드 발키리 1대대 부대장, 한여름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여름아, 라고 불러 주세요!”
“같은 발키리 1대대 소속 차민희라고 합니다. 저는 그냥 평범하게 불러 주세요.”
“……해송연입니다.”
금세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1대대에 속한 발키리들은 총 13명이었다. 순수한 전투계 능력자들만 13명이었고, 해송하처럼 탐지계이거나, 나처럼 보조 스킬을 가진 능력자들을 합하면 20명이 훌쩍 넘었다.
보통 공대의 핵심 인원들은 십수 명이니 적은 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두 S급이나 A급 능력자들이었다. 게다가 핵심 전투 부대로서 항상 최전선에서 싸워 왔을 테니 다들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일 터였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인사했다.
“저는 오딘 길드에서 파견 온 한이진이라고 합니다. 능력은 다른 능력자의 능력치를 올려 주는 보조 스킬이고요. 그리고…….”
“저, 질문이 있습니다!”
한 손을 번쩍 든 한여름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한여름. 발키리의 대장인 성유빈이 프레이야 길드의 한쪽 날개라면, 그녀는 그 반대쪽 날개를 맡고 있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그야말로 한여름의 청량한 사이다 같은 사람인데…….
문제는 발키리에서도 유명한 전투광으로, 전투에 관련해선 진심인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음, 뭐죠?”
“한이진 능력자의 보조 스킬은 발동 조건이 있나요? 그리고 지속 시간은? 능력치는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뻥튀기 되나요?”
“…….”
그야말로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그리고 곧 던전 공략을 함께 할 동료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강유현이 있는 쪽을 흘끗 보았다.
내 보조 스킬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최대한 막기 위해, 오딘 길드에서는 협조 요청을 한 프레이야 길드에 나와 내 스킬에 대한 정보를 함구하는 것을 계약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니 발키리들은 나에게서 듣거나 본 것들을 함부로 외부에 발설할 수 없을 것이다.
강유현과 눈이 마주쳤다. 비록 SS급인 그와 페어이긴 하지만, 세(Sæ) 던전은 워낙 위험한 곳이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발키리들에게도 보조 스킬을 걸어 줘야 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다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눈을 마주친 강유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안심하며 한여름과 다른 발키리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사실 제 보조 스킬은 특별한 발동 조건이 있습니다. 스킬을 적용하는 대상자와 반드시 맨살로 접촉해야 해요.”
“……맨살로 접촉……이요?”
한여름이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변태로 낙인찍히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여야 했다.
“간단한 악수 정도로도 스킬을 걸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은 1시간, 동일 대상자에게 스킬을 다시 걸려면 24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걸 수 있는 인원은 제한이 없고요.”
“으음.”
“능력치는 최대 20%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직 제가 많은 능력자에게 스킬을 걸어 보진 않아서요.”
접촉이 야시꾸리할수록 능력이 증폭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발키리들에게는 절대, 절대로 하지 않을 방법이니까.
“하루 한 번, 1시간 동안 지속되는 스킬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많은 분들에게 스킬을 거는 것보다는 인원을 나눠서 지속적으로 버프를 드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그러면 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한여름이 차민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성유빈의 이름이 언뜻 들렸는데, 무슨 말을 나누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한여름이 상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순서는 저희 쪽에서 정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아니, 순조롭게 시작되는 것 같은 던전 공략에 가슴이 두근거리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