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역시 가드가 심하군요.”
송차현은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히려 강유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어안이 벙벙한 건 나뿐이었다.
“야, 너, 지금 무슨…….”
“뒤로 물러나.”
무뚝뚝하게 말한 강유현이 나를 밀어 냈다. 그리고 뒤를 따라오던 이든과 강수현이 나에게 더 밀착했다. 나는 샌드위치처럼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눈만 깜박였다.
“허튼짓하지 마시죠. 송차현 마스터.”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주변을 압박하고 있었다. SS급과 S급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뭐, 저도 시작부터 부딪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두 손을 펼친 송차현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마치 맹수를 안심시키려 하는 조련사의 몸짓 같았다.
“기회는 또 있겠죠.”
“……!”
송차현은 강유현의 뒤에 있는 나에게 시선을 주며 싱긋 웃었다. 왜인지 그 눈빛이 강렬해서 순간 몸이 흠칫 떨렸다. 나도 모르게 용식이를 꽉 껴안자, 용식이의 목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르르…….”
“그럼 배 안을 안내해 드리도록 할까요. 오딘 길드에서 오신 분들.”
경계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송차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소설에서 묘사됐던 모습들이 꽤 철면피였던 걸 기억해 냈다. 성격이 유들유들해서 겉으로는 다른 길드의 마스터들과 마찰 없이 잘 지내는 편이었지.
그런데 나에게 보내는 눈빛은 어딘가 꺼림칙했다. 생각해 보니 강유현이 옆에 있는데도 굳이 나한테 먼저 인사한 것도 이상했다. 저런 사람이 아닌데 묘하게 친절하게 구는 것도 수상하고 말이다.
내가 흠칫하며 쳐다보자, 송차현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 누군가를 불렀다.
“율이야.”
“네, 언니.”
송차현이 부르자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프레이야 길드의 부마스터, 선율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
선율이는 마주 인사할 새도 없이 몸을 휙 돌렸다. 송차현과는 무척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설명된 프레이야 길드의 부마스터인 선율이는 꽤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거기다 외부 길드원들과 협력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성유빈과 썸 타는 강유현을 특히 차갑게 대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선율이의 뒤를 따라갔다. 배 안의 통로는 좁았고, 사람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지나갔다. 확실히 강유현이 유명인이라 그런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자꾸만 이쪽을 힐끗거렸다.
“우선 배가 출항하기 전까진 객실 안에 있어 주십시오. 출항 후에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니 방송이 나오면 갑판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저쪽으로 전화를 걸어 주시면 됩니다.”
선율이가 가리킨 벽에는 수화기가 하나 걸려 있었다. 던전 입구에 다다를수록 전파 방해가 심해져서 보통의 전화는 쓸 수 없을 테니, 이 수화기는 아마 장거리 연락이 가능한 아이템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고작 몇 시간 이동하는 배 안에 두는 거라 그런지 아이템이 좀 조잡해 보였다. 군대에서 쓰던 무전기같이 투박해 보이는 전화기를 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선율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후, 하고 한숨을 돌린 나는 객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배를 타고 간다기에 한강 유람선처럼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서 가는 줄 알았더니, 이런 호화로운 개인 객실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는 장거리 여행용 선박인지, 객실 안에는 1인용 침대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혼자 쓰기엔 꽤 넓다고 생각하며 다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문을 떡하니 막고 있는 3명을 보며 물었다.
“너희들 왜 안 나가냐?”
강유현과 강수현, 그리고 이든은 객실 안에서 나가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1인용 객실에 건장하기 짝이 없는 남자들이 우글거리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이든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널 혼자 두고 어떻게 나가, 이진아.”
“여기 1인용 객실이거든?”
“괜찮아. 너랑 나는 한 몸이니까.”
“자꾸 개소리할래?”
“……크릉.”
나를 대신하듯 콧방귀를 뀐 용식이가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말고 누웠다. 용식이는 이제 주변 서열 정리를 어느 정도 끝낸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A급인 이든은 용식이에게 있어서 위협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용식이는 은근히 이든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저 못생긴 파충류 새끼가…….”
“너 방금 뭐라 그랬냐?”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이진아.”
생글생글 웃는 이든의 면상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다른 놈들도 계속 내 객실에 꾸역꾸역 있을 셈인가?
저 형제에게도 한마디 하려는데, 그 순간 배가 출항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빅토리호에 승선해 주신 승객 여러분께 안내해 드립니다. 빅토리호는 곧 왕산항을 떠나 세(Sæ) 던전의 입구 부근까지 운항한 후 회항할 예정입니다. 탑승하신 승객 여러분께서는 부디…….]
생각보다 출항이 꽤 빨랐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런데 배가 워낙 커서 그런지 크게 흔들리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창밖을 흘끗 보니 항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오오.”
“꺄우!”
나와 용식이는 흥분해서 창가에 달라붙었다. 어느새 객실을 침범한 불청객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크루즈 여행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곧 던전에 들어갈 텐데 참 무사태평한 생각이었다.
“근데 여기 밥은 안 주나?”
“꺄!”
내 말에 호응하듯 용식이가 소리를 높였다. 배는 육지와 점점 멀어져 창밖에는 끝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다. 낯선 환경에 용식이가 겁먹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신나서 잔뜩 흥분해 있었다.
“슬슬 배고픈데…….”
“이진아, 너 오기 전에 타코 3개나 먹었잖아.”
“아…….”
이든의 말에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에 먹었던 아침 식사가 떠올랐다. 마침 타코가 있길래 매운 칠리소스를 듬뿍 넣어서 먹었는데, 그걸 3개나 먹었었나?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랬나? 3개까진 아니었던 거 같은데.”
“…….”
고개를 갸웃하자, 이든의 시선이 묘해졌다. 그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객실 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들 중, 헌터인 승객 여러분께 안내 방송해 드립니다. 헌터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즉시 갑판 위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해 드립니다…….]
그때, 선율이가 말했던 안내 방송이 객실 안을 울렸다. 나는 뭐라 말을 하려던 이든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고개를 내젓는 이든을 의아하게 보는데, 강수현이 다가와 나를 확 잡아끌었다.
“형! 어서 가요.”
“어? 어, 그래.”
“꺄우, 꺄!”
“밀지 마, 이것들아.”
어딘지 표정이 어두웠던 이든이 좀 걸렸지만, 지금은 갑판에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이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는 이따가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갑판으로 올라가자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게 다 던전을 공략하러 가는 헌터들인가? 놀란 눈으로 둘러보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
당연한 얘기겠지만 여기는 프레이야 길드의 던전 공략 인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프레이야 길드는 여자만 길드원으로 받는다. 그래서 주변은 온통 여자들뿐이고, 남자는 우리뿐이었다.
마치 망망대해 위에 홀로 떠 있는, 지금 이 선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꺄우우, 꺄우…….”
거기다 많은 사람들을 본 용식이가 금방 불안함을 호소했다. 바다를 보며 고개를 쭉 빼던 용식이가 목을 움츠리며 연신 눈을 굴렸다. 경계해야 할 사람이 많아지니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용식아, 쉬…… 아빠한테 집중해.”
“꺄우, 꾸…….”
나는 해송하에게 배운 대로 용식이와 눈을 맞췄다. 소환수에게 있어서 주인은 절대적이다. 특히 용식이는 막 태어나서 처음 본 게 나였다. 그래서 용식이는 종족이 다른 날 부모로 인식하고 있었다.
용종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파괴적인 성향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 누가 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이런 습성을 가진 용식이가 나와 함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용식아, 쉬…… 쉬이. 아빠가 옆에 있잖아, 응?”
“뀨우우…….”
차분하게 반복하자 용식이가 눈을 반쯤 뜨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아이구, 장하다. 우리 용식이. 여기서는 조용히 있어야 해. 알았지?”
“꺄우, 꺄우우.”
“착해요. 착해.”
계속 칭찬하자 용식이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이진 능력자님!”
“어라?”
고개를 돌리니 상기된 얼굴의 해송하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놈들을 보고 흠칫하더니 발을 멈추고 눈치를 보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앗, 아, 안녕하세요.”
“용식아, 너도 인사해야지.”
“뀨우우.”
그래도 해송하는 저번에 봤다고 용식이가 아는 체를 했다. 목을 길게 내빼고 날개를 퍼덕이는 게, 해송하를 꽤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하하, 생각보다 용식이가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저도 걱정 많이 했는데…….”
“그러게요. 역시 선생님의 가르침이 훌륭해서 그런가 봅니다.”
“저, 그 선생님이라는 말은 좀…….”
얼굴을 붉힌 해송하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를 더 놀릴까 하다가, 그러면 심약한 해송하가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알았어요. 해송하 능력자.”
“하아…….”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해송하가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였다.
“오빠!”
“……오빠?”
새침한 목소리가 들리고, 어떤 여자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여자인데도 키가 상당히 컸다. 아마 나보다 큰 걸 보니 190은 족히 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160을 겨우 넘을까 싶은 해송하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송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