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그건 언뜻 보면 사람이 타는 놀이 기구처럼 생겼다. 하지만 어린아이용이라고 해도 사람이 타는 것치고는 좀 작았다. 아무래도 반려동물용으로 만든 것 같았다.
아이템 감정을 살짝 해 보니 모두 측정 불가가 떴다. 최소 A급 이상의 아이템들이라는 뜻이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용식이를 안고 다가갔다. 용식이는 놀이 기구에 금방 흥미를 보였다.
“꺄우! 꺄!”
“그래, 그래. 알았어.”
잔뜩 흥분한 용식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용식이가 형형색색의 기구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버릇처럼 냄새를 킁킁 맡았다.
강아지용 장애물 기구와 고양이용 캣 타워가 합쳐진 것처럼 생긴 놀이 기구였다. 심지어 맨 위에는 새가 앉을 수 있는 횃대도 달려 있었다. 이걸로 설마 비행 훈련도 할 수 있는 건가. 상당히 복합적인 놀이 기구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우선은 소환수가 매일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용식이는 아직 어려서 훈련을 놀이의 하나로 인식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놀이 기구 형식으로 준비해 봤어요.”
“호오.”
장애물들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용식이가 신나 하며 기구 안으로 들어갔다. 꽤 커 보이는 기구를 정복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상의 횃대에 올라앉은 용식이가 뿌듯한 얼굴로 날개를 쫙 펼쳤다.
“꺄아아!”
“아이고, 잘한다. 우리 용식이.”
기분 좋게 울부짖는 용식이를 향해 손뼉을 짝짝 쳐 주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던 해송하가 입을 열었다.
“한이진 능력자님, 곧 던전에 들어가시죠?”
“어? 네, 어떻게 알고 계세요?”
내가 세(Sæ) 던전에 들어간다는 건 아직까지 극비에 가까웠다. 관계자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라 해송하가 알고 있는 게 놀라웠다. 그러자 해송하가 코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아, 사실은 저도 이번에 헤르모드 길드에서 파견되었거든요. 라티와 함께 탐지계 능력자로 가게 되었어요.”
“아하.”
해송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세(Sæ) 던전이 워낙 넓어서 탐지계 능력자가 여럿 필요할 것이다. 헤르모드 길드는 탐지계 능력자가 특히 많은 곳이라고 했지. 소설에서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해송하에게 물었다.
“그럼 던전 안에서도 훈련해 주실 수 있겠네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쁠 것 같아요.”
수줍게 웃으며 해송하가 몸을 배배 꼬았다. 용식이가 던전 안에서 다른 능력자들을 보면 난리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해송하가 같이 간다면 안심될 것 같았다.
“당연히 도움 되죠! 선생님도 같이 가신다니 다행이네요.”
“서, 선생이라니, 저는 그런…….”
쑥스러운 얼굴로 해송하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던전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저야말로…….”
그렇게 기쁜 마음에 해송하의 손을 잡고 흔들었을 때였다.
쾅!
“……!”
“헉……!”
별안간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강유현 앞에 땅이 갈라져 있었고, 놈의 손에는 마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너 미쳤어?”
그러자 강유현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손 놔.”
“뭐? 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잡고 있는 해송하의 손을 내려다봤다. 설마 지금 내가 해송하의 손을 잡고 있다고 저 지랄을 떨고 있는 건가?
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저 또라이 자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에 순순히 손을 놓았다. 그러자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살기가 조금 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 하여간 주인공의 생각은 정말 모르겠다. 고개를 휘휘 젓고, 겁에 질린 해송하를 다시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아, 아뇨. 아니, 예. 아뇨?”
“…….”
저 봐라. SS급의 살기 한 번에 맛이 간 불쌍한 능력자를. 해송하는 마치 오작동을 일으키는 고장 난 기계처럼 제정신이 아닌 반응을 보였다.
결국 해송하가 멀미에 구토 증상까지 보여서 훈련은 중단되었다. 왜인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놈들은 잘됐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놈들.
***
인천 왕산항 앞에 차가 멈췄다. 아무 생각 없이 차를 타고 있었던 나는 그제야 좀 긴장이 되었다.
거기다 선팅된 창문 너머를 슬쩍 보니 던전 입구로 들어가는 곳 앞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었고, 헌터들을 쫓아다니는 팬들도 제법 있었다.
“배를 타는 곳까지 길드원들이 통제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옆에 있던 연승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윤성은 일이 있어 여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비서인 연승원이 같이 왔다. 박윤성과 달리 친절한 느낌이 들진 않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연승원을 흘끗 보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탄 다른 사람들도 흘끗 쳐다봤다. 이렇게 보니 던전 공략을 하러 온 헌터들이 아니라 곧 무대에 오르는 아이돌 멤버들 같았다.
다들 카메라에 찍힐 걸 의식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 세팅을 했다. 물론 나와 용식이도 포함해서 말이다.
용식이는 지금 목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줄을 차고 있었다. 중앙에 작은 방울도 달려서 얼마나 앙증맞은지. 나는 흐뭇한 얼굴로 용식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끼익, 하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무수히 많은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헐…….”
이걸 뚫고 배를 타러 가야 한단 말이야?
세(Sæ) 던전은 바다 한가운데에 열리기 때문에 던전 입구까지 배를 타고 가야 했다. 그래서 취재진이 배를 타는 항구에 쫙 깔린 것이었다.
주춤거리며 나가기를 망설이는데, 누군가가 먼저 움직였다.
“…….”
강유현이었다. 그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긴 다리를 척 밖으로 뻗더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척척 걸어갔다. 그 모습이 레드 카펫을 걷는 연예인처럼 꽤 멋져 보였다.
“…….”
“……?”
그러다가 갑자기 중간에 우뚝 멈춰 섰다.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 대던 기자들도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봤다.
강유현이 뒤를 돌아 내가 타고 있는 차를 똑바로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왜 안 와?’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함께 가시죠. 한이진 능력자.”
“어, 어? 저도요?”
“두 분이 페어이시지 않습니까.”
연승원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낮고 감정이 없어서,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나도 차에서 내렸다.
“이진아, 나도 같이 가!”
“저도요, 형!”
내 뒤를 따라 이든과 강수현도 우르르 내렸다. 졸지에 나는 옆에 SS급인 강유현, 뒤에 S급인 강수현과 A급인 이든을 매달고 배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찰칵, 찰칵!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강유현 능력자! 한이진 능력자!”
“저 분홍색 머리는 누구지?”
취재진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철두철미하게 막고 있는 길드원들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용식이는 갑자기 터지는 새하얀 플래시와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깜짝 놀랐다. 그런 용식이를 겨우 달래며 배 안으로 들어갔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던전 공략 인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빙의 전 가족들과 딱 한 번 타 봤던 유람선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한이진 능력자!”
“어?”
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유빈 능력자?”
지난번 기자 회견에서 우연히 만났던 성유빈이었다. 그때 워낙 잠깐 만난 터라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내 앞에 오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한이진 능력자.”
“네? 네…….”
성유빈이 저렇게 잘 웃는 성격이었나? 소설에서는 강유현 못지않게 감정 표현이 부족해서 마리오네트 커플이라고 팬들이 말했을 정도였는데.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성유빈은 그런 나를 묘한 눈으로 훑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잘생기고 매력적인 얼굴이네요. 한이진 능력자는 이슬만 먹고 사시나요? 혹시 요정은 아니죠?”
“……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도저히 성유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서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자,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저거 말려!”
“유빈 언니! 스탑!”
“……?”
뒤에서 누군가가 성유빈을 확 끌어안아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성유빈이 있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한이진 능력자. 저는 프레이야 길드의 마스터 송차현이라고 합니다.”
“헉, 바, 반갑습니다. 송차현 마스터님.”
맙소사. 소설에서 읽었던 송차현 마스터였다. 프레이야 길드의 수장, 발키리들의 여왕!
마치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살짝 웃은 송차현 마스터가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 던전 공략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저야말로…….”
얼른 손을 맞잡으려고 나 역시 비루한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강유현이 팔을 움직였다.
탁.
“……!”
송차현의 손을 뿌리친 강유현이 내 앞을 막듯이 섰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의 등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