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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42)화 (42/228)
  • 42화

    하지만 그 일을 말해 봤자 박윤성이 진지하게 들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겪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알고 있냐고 추궁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뚱맞게 예지 스킬도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강유현과 성유빈 없이 세 번째 구역에서 중간 보스를 상대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이진 능력자?”

    “…….”

    “한이진 능력자, 듣고 있습니까?”

    “헉.”

    내 앞으로 다가온 박윤성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살짝 두드렸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제 말 듣고 있습니까?”

    “물론, 물론이죠.”

    나는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박윤성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고개를 기울인 그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물론 브리핑한 자료는 회의 후 각자에게 지급되지만, 지금은 제 설명을 잘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집중하세요. 한이진 능력자.”

    “네에…….”

    부드럽게 설교를 마친 박윤성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곧 그의 지시에 따라 커다란 스크린에 사진 자료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방도는 천천히 찾아보고, 우선은 브리핑에 집중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였다.

    “이진아, 무서워서 그래?”

    “뭐?”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하…….”

    의기양양한 표정의 이든이 개소리를 지껄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 이 속 편한 새끼야. 한껏 욕을 퍼부어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주인공과 히로인의 행방불명 이벤트를 모조리 털어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맹렬하게 이든을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닥쳐라, 좀.”

    “더 욕해 주라. 간만에 짜릿하네.”

    “어휴, 시발…….”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든 놈은 여기 와서까지 변태 컨셉을 이어 갈 셈인 것 같았다. 소설에서는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

    그러다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강유현과 눈이 마주쳤다. 하여간 시끄러운 건 못 참는 성격인가 보다. 그거 좀 속닥거렸다고 저렇게 노려보다니.

    “첫 번째 구역에서 찍은 영상입니다. 등급 이상 현상이 나타난 이후에도 이곳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로 출몰하는 몬스터는 하급 몬스터인 멀록들로…….”

    프레이야 길드에서 찍은 거로 보이는 짧은 영상이 스크린에 떴다. 던전 안에서는 현대 기기로 영상 촬영이 불가능하지만, 영상석 아이템으로는 촬영이 가능했다. 물론 화질은 아주 나쁘지만 말이다.

    생선 대가리에 팔다리만 툭 튀어나온 괴물이 영상 속에서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만 많고 약한 몬스터들이라 발키리로 보이는 전투원들이 수월하게 처치하고 있었다.

    “두 번째 구역부터는 등급 이상 현상의 영향으로 상위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본래는 이곳도 첫 번째 구역과 비슷한 난이도였었다고 합니다만.”

    다음으로 튼 영상에는 제법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나가 무리들이 헌터들을 공격했다.

    나가들은 전체적으로 뱀처럼 생겼는데, 바다에 살아서 그런지 비늘 색이 푸른색을 띠었다. 상반신은 뱀과 사람이 섞인 것 같은 모습에 꼬리 끝에는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던 멀록들과 달리, 더 강한 몬스터라는 걸 드러내듯 무기들도 더 등급이 높아 보였다.

    그리고 영상 속의 배경도 바뀌어 있었다. 멀록들이 나타났던 첫 번째 구역은 배경이 해변이었는데, 이곳은 동굴 안이었다. 지형이 좁아져서 헌터들이 싸우기 버거워 보였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면 워프 포인트가 나오는데…….”

    “…….”

    아, 이건 내가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 구역 맨 끝에 있는 워프 포인트. 저기서 워프하면 세 번째 구역이나 네 번째 구역으로 랜덤하게 이동한다.

    “이곳에서 워프하면 세 번째 구역이나 네 번째 구역으로 랜덤하게 입장합니다. 물론 파티로 등록된 자들은 모두 한꺼번에 이동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니, 이번에는 안 그런다고!

    답답한 마음에 확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박윤성의 설명을 모두 들었다. 그는 끝으로 세(Sæ) 던전은 평소에도 각 구역의 등급이 들쑥날쑥한 데다가, 등급 이상 현상까지 더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돌발 이벤트로 둘만 쏙 사라지는 주인공과 히로인이 가장 큰 문제라고.

    대략적인 브리핑이 끝나고도 근심 걱정에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한이진 능력자, 잠깐 따로 볼 수 있습니까?”

    “저요?”

    박윤성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까 딴생각하던 것 때문에 잔소리를 더 할 생각인가?

    흠칫하며 눈치를 보자, 박윤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도결 군에 관한 일입니다.”

    “도결이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결이 일이라니, 뭐지? 혹시 그사이 상태가 안 좋아지기라도 했나?

    불안해하며 박윤성을 따라갔다. 그는 회의실 옆의 작은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네다섯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안은 스터디 룸처럼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슨 일이죠?”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낮에 만났던 도결이는 멀쩡했지만, 혹시 밥 먹고 회의하는 사이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어 박윤성을 쳐다보니, 박윤성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는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곧 던전에 들어가셔야 하니 미리 상의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

    “도결이 일로요?”

    “예.”

    고개를 끄덕인 박윤성이 서류철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그걸 받고 맨 위에 있는 서류를 훑어보았다.

    한국 대학교 출신,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소아 청소년 전문의, 특수 능력자 상담 전문…….

    그런 말들을 쭉 훑어본 내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도결이가…… 심리 상담 같은 게 필요한가요?”

    박윤성이 준 서류철에는 의료진들의 프로필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게다가 정신과 분야에서도 소아 청소년 능력자들을 위주로 상대하는 특수 의사들이었다. 하나같이 이력들이 대단했다.

    그러나 왜 이런 의료진들이 도결이에게 필요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봤을 땐, 그 아이가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상담받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이 박윤성이 되물었다.

    “한이진 능력자가 보기엔 도결 군이 멀쩡해 보이셨습니까?”

    “네…… 뭐, 정신계 능력자라는 걸 감안하면 그 정도는…….”

    정신계 능력을 컨트롤하기 위해 훈련 정도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도결이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내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자 박윤성은 또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선 그 영상을 봐 주시겠습니까.”

    “……?”

    어리둥절한 얼굴로 박윤성이 든 태블릿 피시를 켰다. 그러자 어떤 동영상이 화면에 떠올랐다. 박윤성을 한 번 보고,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도결이가 있었다. 오늘 봤었던 병실 안에, 그 자세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점은 그 아이 곁에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상냥한 얼굴의 여자가 도결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도결 군.]

    […….]

    [저는 도결 군의 담당의 유소영이에요. 반가워요.]

    […….]

    [검사 전에 몇 가지 질문할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나요?]

    […….]

    담당의는 계속해서 도결이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도결이의 입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결국 애매한 미소를 지은 담당의가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이 와서 뭐라고 말해도 도결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상의 마지막까지 말이다.

    멈춘 화면을 바라보던 내가 난감한 눈으로 박윤성을 바라보았다.

    “애가 왜…… 말을 안 하죠?”

    “의사는 선택적 함구증으로 진단을 내렸습니다.”

    “선택적…… 함구증이요?”

    “본래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인데, 도결 군처럼 특수한 상황 때문에 발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도결이가 지금 몇몇 사람들이랑만 말을 한다는 건가요?”

    “몇몇 사람들이라……. 도결 군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건 저도 오늘 처음 봤습니다.”

    “…….”

    “한이진 능력자에게만 입을 여는 것 같더군요.”

    왜?

    나는 평범하게 대화하던 도결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게이트 사태가 일어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도결이는 고작 10살이었다. 그 후에 각성한 한이진과 떨어져 지냈고,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자 외롭게 지냈다.

    그 때문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걸까? 하지만 내 앞에서 한 행동을 보면,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조금만 치료하면 곧 괜찮아지겠지?

    나는 희망을 가지고 박윤성을 응시했다.

    “치료하면 금방 나아지겠죠?”

    “아무래도 도결 군이 타인과 대화하지 않는 건 능력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능력 훈련과 병행하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겠죠.”

    정신계 능력이라고 했던가. 소설에서 잘 나오지 않은 능력이라 상상하기 힘들었다. 미디어로 접했던 다른 초능력자들이 떠올랐다. 물건을 공중에 띄우고, 독심술을 하거나 텔레파시를 보내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박윤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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