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강유현을 쳐다봤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달이 난 게 단순히…….
“하, 뭐야…… 너희들끼리 치고받은 거야?”
“꾸우…….”
“…….”
“…….”
“…….”
내 물음에 한 마리의 용과 세 명의 인간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잘하는 짓이다. 아주.
나는 혀를 차며 버럭 화를 냈다.
“장난하냐, 이 미친놈들아!?”
소리를 지르자, 뒤에 있던 강수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처음엔 다들 조용히 있었는데요. 용식이가 자다가 깨어나더니…….”
“…….”
“형이 없는 걸 알고 난동을 부리더라고요. 흥분해서 브레스를 뿜기 시작하고, 제가 놀라서 결계를 치고, 가만히 있던 유현이 형이 마검을 소환하고…….”
아…….
원흉이 너였니?
고개를 내려 용식이를 쳐다보자, 두 눈을 축 늘어뜨린 용식이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런 얼굴로 봐도 소용없다. 이럴 땐 아주 따끔하게 혼을 내야……!
“뀨우…….”
혼을 내야……!
“뀨우우…….”
“…….”
올망졸망한 용식이의 눈을 보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내 죄다. 용식이를 내버려 둔 나의 죄!
“하…… 아빠가 미안하다.”
“뀨우, 뀨우우.”
이 난리 통에 결국, 방금 작별 인사를 했던 박윤성이 달려왔다.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초토화된 숙소를 한번 휙 둘러보았다.
“임시라곤 해도 특수 합금으로 만든 우리를 뚫고 나오다니, S급 용종은 어려도 만만치 않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용식이를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오딘 길드에 몇 번이나 폐를 끼친 건지 모르겠다.
착잡한 마음이 들어 더욱 고개를 숙이자, 박윤성의 선선한 음성이 귓가에 떨어졌다.
“숙소는 복원 스킬을 가진 능력자를 부르면 금방 고쳐지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박윤성의 시선이 내 팔에 안겨 있는 용식이를 향했다. 그 눈길을 느낀 용식이가 작게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성장할 때까지 훈련이 필요할 것 같군요.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하니까요.”
“하, 네…….”
“소환수를 가진 능력자 중에 조련에 뛰어난 자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으시는 게 좋겠군요.”
“그래요……?”
소환수계의 강형욱 같은 사람인가? 어쨌든 박윤성이 추천해 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용식이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고, 숙소 생활을 하거나 밖에 나가서도 여러모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결심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소환수 조련사라.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분처럼 좋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내가 용식이에게 약한 것도 한몫하겠지. 이렇게 오냐오냐 키워서는 안 되는데.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나를 보며 박윤성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그리고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온 김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던전 공략지가 결정되었습니다.”
“……!”
박윤성이 우리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벌써 결정되었구나. 빠르네.
오딘 길드에서 처음 들어가는 던전이었다. 조금 긴장하며 쳐다보니, 박윤성이 나와 강유현을 응시했다.
“이번에 클리어할 던전은 프레이야 길드가 가진 세(Sæ) 던전입니다. 두 분이 오딘 길드의 대표로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엥? 프레이야 길드?”
성유빈이 발키리의 리더로 있는 길드가 아닌가?
게다가 세(Sæ) 던전이면 분명, 바다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읽은 에피소드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거기가 슬슬 던전 이상 현상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날 타이밍이긴 하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강유현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곳은 강유현이 성유빈과…… 소위 ‘썸’을 타는 곳이었다.
첫 시작이 최악이었던 두 사람은 던전 이상 현상에 휩쓸려 단둘이 고립되고, 속으로는 내심 성윤재의 동생인 성유빈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강유현이 복잡한 속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오해를 푼 성유빈이 강유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둘의 사이가 그때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어쨌든 세(Sæ) 던전은 강유현과 성유빈의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런 대형 이벤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
좋아, 이번 기회에 내가 강유현과 성유빈을 팍팍 밀어 줘야겠어. 원작 주인공과 히로인이 꽁냥거리는 걸 특등석에서 관람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헤실거리는 입가를 혼자 꾹 누르고 있자, 호명되지 않은 두 사람이 불만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요?”
“나는?”
마치 소풍에서 제외된 어린아이들처럼 입이 비죽 튀어나온 이든과 강수현이 박윤성을 노려보았다.
아니, 던전 가는 게 뭐가 좋다고 저러는 거야. 숙소에서 쉬는 게 백번 낫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휘휘 내젓자, 박윤성이 난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프레이야 길드에서는 두 분에게만 지원 요청을 하긴 했습니다만…….”
“저도 가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음…….”
“그 던전이 길 찾는 것도 복잡하다던데.”
강수현의 말에 박윤성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가만히 있던 이든도 나섰다.
“한이진 가는 덴 나도 가.”
“뭐? 야, 넌 좀 가만있어.”
이게 진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데 덥석 가겠다고 그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도 아니고, 던전을 가다니.
기겁하며 이든을 타박했으나, 그다지 내 말을 듣는 기색은 아니었다. 답답해진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는데, 박윤성이 더 빨랐다.
“프레이야 길드에 한 번 말해 보죠.”
“아니, 잠깐, 이든은……!”
“계약을 하고 난 후, 던전 공략 인원을 꾸릴 때는 각자의 쓰임새와 길드원 스스로의 의사가 우선입니다.”
“…….”
단호하게 말한 박윤성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든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가 가겠다는데 내가 말릴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이진아, 나 두고 가려고 했어?”
“후, 맘대로 해라, 그래.”
조금 짜증을 내며 고개를 휙 돌리자, 이든이 팔을 뻗어 내 어깨에 매달렸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지랄하지 마라.”
“에이이.”
강아지처럼 어깨에 얼굴을 묻어 비비적대는 이든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무언가가 날아와 땅에 푹 박혔다.
“헉……!”
정확히 이든의 발치에 내리꽂힌 건, 검은빛이 나는 불길한 마검이었다.
“떨어져.”
흉흉한 목소리로 말한 강유현이 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강유현을 본 용식이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르르, 크릉!”
“하아…….”
이러다간 또 순식간에 난장판이 될 것 같다.
한숨을 내쉰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좀 싸워, 이것들아!”
소환수 조련사에게 훈련받는 건, 이 짐승 새끼들도 같이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고 있으니, 숙소 건물을 복구할 능력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
넓은 방에는 클래식한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고딕풍의 가구와 고풍스러운 느낌의 장식, 중세 명화들이 걸린 방 안은 잘 꾸며진 미술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곳곳에는 투명하고 새하얀 크리스털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에서 묘하게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방 안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늘한 기운 속에서, 한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흠흠, 흠, 흠~”
허스키한 음성이 클래식 음악에 맞춰 낮은 허밍을 계속했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는 특이하게 새하얀 욕조가 있었고, 남자는 그곳에서 거품 목욕을 하며 허밍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파란빛의 투명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욕제를 넣어 만든 풍성하고 새하얀 거품이 그의 손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싸늘하게 식은 물 안에서 남자는 즐거운 듯 콧노래를 이어 갔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남자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의 미간을 따라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젖어 있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새파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곧 남자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뚜벅뚜벅,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마스터.”
“…….”
남자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방 안에 들어온 이가 욕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언뜻 보였다.
“고개 들어 봐.”
“…….”
남자의 나직한 말에 방으로 들어온 이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과 검은 유리알 같은 새카만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려한 얼굴선은 언뜻 보면 유약한 인상이지만, 무표정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에선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릴 만큼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
로키 길드의 S급 능력자, 백시후. 그의 시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꼼꼼하게 훑어보던 파란 눈의 남자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게 나았네.”
“……감사합니다.”
백시후는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채로 그를 찾아왔다. 백시후를 치료하기 위해 A급 힐러 세 명과 독 제거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여럿 투입되었다. 웬만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투입할 수 없는 숫자였다.
남자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조심해야지.”
“…….”
“넌 특히 얼굴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미소를 머금은 남자의 얼굴에선 묘한 색기가 흘렀다. 중성적인 외모는 웬만한 여성들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라이수. 무수히 많은 소문과 추측이 난무한 라우페이 길드의 마스터. 그가 거품이 묻은 손가락을 뻗어 백시후의 뺨을 더듬었다.
“아, 다른 데는 다쳐도 돼. 너는 죽으면 얼굴만 남겨서 박제시킬 거니까.”
“…….”
백시후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라이수를 응시했다. 그의 진지한 시선에 라이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이야. 쫄기는.”
“……예.”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말투였지만, 라이수가 이렇게 짓궂은 말을 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백시후는 얌전히 그에게 얼굴을 내어 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글거리는 거품이 그의 얼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널 그렇게 만든 게, 갓 부화한 용종이었다고?”
라이수의 목소리에서 즐거운 기색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