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큭, 뭐……!”
이 미친 새끼!
백시후가 든 긴 장검이 왼쪽 발목을 향했다. 녀석은 아무 망설임 없이 장검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보조 스킬은 다리 하나가 없어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멈, 춰……!”
쉬어 터진 목소리로 외쳤으나 백시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짓밟는 힘이 더 강해지기만 했다. 나는 떨어지는 칼날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캉!
그러나 곧 터진 소리는 살을 베어 내는 듯한 게 아니었다. 철과 철이 맞부딪친 듯 불쾌한 소리가 났다.
눈을 뜨자 손목을 결박한 쇠사슬로 백시후의 검을 막고 있는 이든이 보였다.
“이든……!”
대치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이든은 봉인 아이템으로 능력을 쓰지 못한다. 백시후가 검을 휘두르자 맥없이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큭!”
쓰러진 이든을 내려다보며 백시후가 경멸을 드러냈다.
“벌레 같은 게.”
이놈은 다른 사람들을 개미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빌어먹을 빌런 새끼가.
“벌레는 너야. 씹새끼야.”
짓씹듯 말하자 백시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조금 느슨해졌던 발이 곧바로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벌, 레는…… 너……라고, 시, 발…….”
점점 눈앞이 노래졌다. 이윽고 호흡마저 완전히 멈추고 난 후, 시스템 창이 크게 꿈틀거렸다. 동시에 시스템 음성과 함께 노란 빛이 터져 나왔다.
「부화가 완료되었습니다.」
“……!”
「니드호그(전설급, 용종)를 부화시키겠습니까?」
「YES /NO」
‘yes! 무조건 yes!!’
눈앞에 새하얀 빛이 터졌다.
나도 이곳에 그냥 무작정 온 건 아니었다. SS급 던전에서 보상으로 받은 전설급 드래곤, 니드호그를 기자 회견 때부터 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부화가 끝난 것이다.
쌍스급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든 S급 드래곤!
곧 모습을 드러낼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상상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앞에는 상상한 대로의 무시무시한……!
“꺄웅?”
아주 무시무시한…….
“꺄아웅!”
“…….”
무시무시하기는커녕 작고 앙증맞은 크기의 검은색 새끼 용이 나를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었다.
「니드호그(전설급, 용종)가 당신을 부모로 인식합니다.」
「소환수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YES/NO」
“왜 이렇게 작아?”
분명 쌍스급에서는 강유현이 니드호그를 부화하자마자 성체만큼 큰 상태로 등장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내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은 크기였다.
“꺙! 꺄앙!”
“헉, 야, 저리 가. 침 묻잖아.”
네가 흘리는 침이 치명적인 독극물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는 거니? 식겁하며 손을 내젓자 니드호그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날 올려다봤다.
윽, 마음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는 니드호그를 난감하게 내려다보는데, 갑작스럽게 니드호그의 표정이 변했다.
“크르릉…….”
니드호그가 부화하면서 터진 빛에 뒤로 물러났던 백시후가 묘한 얼굴로 나와 니드호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드호그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백시후를 노려보았다. 본능적으로 백시후가 뿌리는 살기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려봐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포메라니안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굉장히 하찮아 보였다.
나는 오히려 백시후의 앞을 막아서며 니드호그를 그의 시야에서 가렸다.
「소환수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YES/NO」
아니, 지금 그럴 상황이야?
낄끼빠빠가 안 되는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눈치도 없이 시스템 창이 계속 사채업자처럼 채근했다.
「소환수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YES/YES」
……저기, 미묘하게 아까랑 달라지지 않았나?
「소환수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순순히 등록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입니다.」
「YES/YES」
와, 이젠 협박까지 하네.
헛웃음을 지으며 대충 손을 휘둘러 YES를 선택했다. 다행히 백시후는 갑자기 등장한 니드호그를 경계하고 있는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등급 확인이 불가한 몬스터라.”
“……!”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서 니드호그의 등급이 S급인 백시후에게도 보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니드호그의 등급은 S급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백시후에게도 열람이 가능해야 했다.
「소환수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공백 포함 15글자 이내)」
아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도 안 주고 닦달하는 시스템 창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니드호그의 이름은 알을 가졌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용식이!”
「…….」
순간 버퍼링이 걸린 듯 시스템 창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사이, 뜻 모를 내 외침에 얼굴을 구긴 백시후가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진 총을 향해 몸을 던졌다.
[‘용식이’ 소환수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왜인지 떨떠름하게 들리는 시스템 음성을 한 귀로 흘리며 총을 주워 백시후에게 겨눴다. 그러나 그때였다.
“크륵, 크르륵…….”
“……용식이?”
용식이의 작은 몸이 꿈틀거렸다. 날개에 박혀 있는 검은 비늘이 부르르 떨리더니 일제히 위로 솟구쳐 올랐다.
“캬아악!”
“크윽!”
벌린 입에 날카로운 독니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용식이가 내뿜은 독 브레스가 그대로 백시후에게 날아갔다. 난 그 광경을 그저 입을 벌리며 멍청하게 쳐다봤다.
“큭, 시발!”
백시후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을 패시브 스킬들을 모두 뚫고, 독 브레스가 그대로 백시후의 얼굴을 뒤덮었다. 독에 저항하는 검은 기운과 녹색 빛을 띠는 점액질의 독이 뒤엉켜 백시후의 몸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흰 피부의 예쁘장한 얼굴이 독으로 뒤덮여 녹아내리는 모습은 심히 보기 좋지 않았다. 나는 총을 든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빌어먹을, 한이진!”
“아, 시발.”
마치 좀비 영화라도 보는 것 같았다. 비위가 안 좋았으면 벌써 토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시후는 처참한 몰골로도 여전히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침착하게 총을 겨누었다. 앞으로 라우페이 길드 마스터의 심복으로서 방해가 될 백시후를 치워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방은 뭐지? 결계가 쳐져 있는데?”
“……!”
그러나 그때, 협회 측 사람들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길드원이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계가 쳐져 있다. 하지만 협회 사람들이 결계를 없애고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빌어먹을.”
이를 바드득 간 백시후가 살기를 표출하자, 용식이가 다시 날개를 펼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잘한다. 우리 포메 용식이!
“다음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다.”
“하, 나야말로.”
총을 겨누고 있는 나를 끝까지 노려보다가 백시후의 몸이 사라졌다. 여전히 독을 없애지 못한 채 얼굴 피부가 부글거리는데도 신음 하나 내지 않는 게 정말 소름 돋았다.
속으로 혀를 차며 이든에게 다가갔다.
“야, 괜찮냐?”
“하아, 이진아.”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 이든을 살피다가 용식이를 불렀다.
“용식아, 여기 와 봐.”
“꺄우?”
“이거 보이지? 살짝만 물어 볼래?”
“꺄우!”
이든의 팔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가리키며 말하자 용식이가 흔쾌히 독니로 쇠사슬을 깨물었다.
파삭!
니드호그의 S급 독에 당한 봉인 아이템은 간단히 깨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은…… 어?”
이든의 계약서를 없애고 빠르게 튀려고 했는데, 계약서가 들어 있던 금고가 통째로 녹아 있었다. 용식이의 독 브레스가 주변에 있던 금고마저 없애 버린 것이었다.
근데, 언뜻 봐도 저기에 이든 말고도 다른 고등급 능력자들 계약서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온갖 범죄에 연루된 위험한 놈들이 말이지. 계약서가 다 타 버렸으니, 이제 그놈들 고삐가 다 풀려 버린 거 아닌가……?
“결계 해제 완료했습니다.”
“헉!”
작게 숨을 들이켠 나는 이든을 잡아끌었다. 에이, 모르겠다. 나머지는 협회랑 오딘 길드가 알아서 하겠지.
“빨리 가자!”
“어? 어.”
손을 몇 번 말아 쥔 이든은 며칠 동안 능력을 봉인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능력을 썼다. 이든은 나를 안고 깨진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휙 날아갔다. 우리의 뒤를 날개를 펼친 용식이가 뽈뽈거리며 쫓아왔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음, 일단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람 없는 적당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땅으로 내려가자 용식이가 날개를 접고 발치에 매달려 얼굴을 비볐다. 독니 간수는 잘 하는 거겠지? 한 방울만 닿아도 난 치명적이란다. 용식아. 괜히 백시후의 녹아내리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대체 뭐야?”
봉인 아이템 풀었다고 상처로 가득하던 얼굴이 금방 멀쩡해진 이든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용식이는 이든과 눈을 마주치자 또 캬악 하고 울었다.
“워워, 괜찮아. 쟤는 나쁜 놈 아니야. 착하지, 용식아.”
“……이름이 용식이야?”
“응, 귀엽지?”
용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이든이 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름이? 아니면 생김새가?”
“둘 다.”
“…….”
결국 이든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아니, 우리 애가 뭐 어때서. 비록 성체가 되면 날개 위에 시체를 얹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신화 속 용이 되겠지만, 지금은 뭐, 이 정도면 귀엽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자 용식이도 따라서 머리를 기울였다. 그래, 역시 귀엽다니까. 내 새끼.
턱 밑을 긁어 주자 고양이처럼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그러다 뒤 돌아 이든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넌 이제 어떡할 거냐?”
“……나?”
“응. 참고로 네 계약서는 태웠다.”
이든은 이제 자유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불공정한 내용으로 가득한 계약서는 이제 이든의 신체나 스킬을 제약하지 못한다. 경찰 수사만 잘 피해 다닌다면 조만간 괜찮아질 거다. 아, 심단테에게 말해서 신분 세탁이나 도와줄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이든이 가까이 다가왔다.
“너는?”
“나? 아, 나는 사실…….”
볼을 긁적거리며 오딘 길드와의 일을 얘기해 줬다. 이든은 갇혀 있는 동안 기자 회견을 보지 못했을 테니, 오딘 길드 마스터와 만나 계약하게 된 일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뭐, 난 그렇게 됐다. 넌 이제 어떡할래?”
이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언뜻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다. 의아한 눈으로 얼굴을 살피는데, 가까이 다가온 이든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진아…….”
“응?”
비슷한 눈높이에서 마주친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분명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왜인지 웃고 있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든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개새끼를 주웠으면 책임을 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