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니, 강유현이 뻔뻔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왜 그렇게 보냐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기까지 한다.
“그럼 다른 새끼들한테도 그 짓을 하겠다고?”
“아니, 그때 그건……!”
던전 안에서 강유현에게 본의 아니게 입술 박치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설마 SS급 보스 몬스터가 그렇게 딱 등장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스킨십 단계를 높게 설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처리 불가능한 상대였다.
그런데 강유현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니, 그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 스킬의 발동 조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이든은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었고.
……아무래도 강유현은 자신에게 한 짓을 발동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네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이 빌어먹을 오해를 도대체 어떻게 정정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내가 한 짓은 발동 조건 중 하나일 뿐 유일한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감히 주인공님의 귀한 입술을 훔쳤다고 온 세상이 날 죽이려고 하겠지.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점점 나락으로 빠져드는 사고를 멈추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굳이 그때처럼 키…… 하…… 그걸 할 필요는 없거든?”
“……그게 무슨 뜻이지?”
강유현의 검은 두 눈이 심연처럼 더 깊고 어두컴컴해졌다. 그게 마치 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뜻하는 걸로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아니, 근데 그게 효과가 좋긴 해. 사실 손만 잡아도 되긴 하는데…….”
“똑바로 말해. 한이진.”
아, 시발, 수치사…….
진정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금붕어처럼 입술을 벙긋대던 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야, 너는 기분도 안 나쁘냐? 나랑 또 그 짓을 하고 싶어!?”
“…….”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유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래, 역시 너도 기분 나쁘지? 그때를 떠올리니 스킬의 유용성보다는 화딱지가 나서 다 때려치우고 싶지? 이해한다. 난 다 이해해.
그렇게 대인배 모드가 되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강유현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분이 나빴다고?”
“응?”
“기분이 나빴어?”
거듭 물어 오는 말에는 이를 가는 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이번에야말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정말 좆 된다는 것을.
“아니? 난 기분 안 나빴는데?”
“…….”
“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그런 거지. 하, 하하.”
이건 살기 위한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나쁜 거짓말이 아니야. 응, 그래. 일단은 나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니.
하늘 같은 주인공님은 자기가 기분 나빠도 상대는 기분 나쁘지 말아야 하겠지.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으며 최대한 멍청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물 나는 비즈니스적 미소였다.
“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없겠군.”
“뭐, 뭐?”
네? 뭐라고요? 주인공님, 방금 뭐라고? 파든?
하하, 내가 벌써 귀가 먹었나. 주인공이 참 아까부터 개소리도 잘 지껄이시고. 한이진 귀 안 되겠네. 반품 안 되냐?
“저…….”
“헉.”
잠자코 듣고 있던 박윤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나는 뒤늦게 그를 보며 마치 부모에게 못 볼 꼴을 들킨 사춘기 소년처럼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한이진 능력자의 S급 보조 스킬 발동 조건은…….”
“……네, 신체 접촉입니다.”
“아…….”
놀란 박윤성이 이번엔 나와 강유현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강유현 능력자와는 이미 키…… 흠, 을 했고요.”
“네…….”
해탈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황했던 박윤성이 넋이 반쯤 나간 나를 보고 급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 흠, 확실히 난감한 조건이군요. 특히 여성 길드원에게는 조심스러울 것 같고요.”
“네, 그렇죠…….”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모르는 남자랑 덥석 스킨십을 하라니. 나도 싫고, 상대방도 당연히 싫을 거다.
근데 강유현은 뭐지? 스킬 효과 때문에 남자랑 키스하는 것 정도는 사소한 일로 치는 건가? 그냥 이물질 낀 것처럼 좀 더러워지고 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무표정한 얼굴의 강유현을 슬쩍 쳐다봤다. 왠지 그 생각이 맞는 것 같다.
“강유현 능력자가 허락하기도 했고, 두 분이 페어를 맺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네? 뭐라고요?”
페어를 맺으면 나는 껌딱지처럼 강유현의 뒤를 따라다녀야 한다. 던전 공략 때는 무조건 동행해야 하고. 하지만 난 한이진의 데드 플래그 때문에 강유현과는 최대한 멀어져야 하는데…….
난감한 내 얼굴을 보며 박윤성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당분간 던전 등급 이상 현상 때문에 변동의 폭이 큰 던전은 대부분 강유현 능력자가 투입될 겁니다. 그러니 S급 보조 스킬은 강유현 능력자에게 집중해야 저희로서도 이득이 클 겁니다.”
“…….”
아, 그래. 빌어먹을. 앞으로 주인공 강유현은 등급 이상 현상을 해결하며 승승장구하셔야지. 그러다 국내만이 아닌 세계로도 뻗어 나가 주시고.
지금은 비록 초반이지만, 이 극초반에 SS급 보스 몬스터가 나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궁극적으로 살려면 내가 강유현을 도와줘야 하는 게 맞다. 강유현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 세상은 끝이니까.
그래도 그와 한이진의 관계가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데드 플래그. 그거만 확실히 회피할 수 있다면 나도 마음이 편할 텐데.
“앞으로 페어로 들어갈 던전에서 아이템 우선 입찰권을 드리겠습니다. 보수 지급은 통상 적정 금액의 3배로 하고요. 조건은 당연히 헌터 등급이 아닌 보조 스킬 등급입니다.”
“……!”
시발, 거절하기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눈앞에 꽃송이가 아닌 돈다발이 날아다녔다. 감정이 격해진 나는 박윤성의 고운 손을 덥석 잡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 아, 네.”
그래, 까짓것 데드 플래그. 한번 부숴 보지, 뭐. 내가 바로 토르다! 다 때려 부숴 주겠어!
“손 놔.”
“형, 손 놔요.”
“……?”
고개를 돌리니 형제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박윤성의 손을 놓았다. 갑자기 왜들 이래?
“길마님이 놀라셨잖아요.”
“아, 응.”
뭔가 했더니, 박윤성을 걱정한 거였군.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박윤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좀 흥분해서.”
“아닙니다. 흠, 괜찮습니다.”
묘하게 목소리가 삑사리 난 박윤성이 작게 헛기침하고 손사래를 쳤다.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 조금 분홍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시 천사님이라 섬세하신가 보네. 나도 참 무례한 짓을 했어.
빠르게 자기반성을 한 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뭡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듯한 박윤성이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 이건 말할까 말까 고민한 건데, 슬쩍 본 핸드폰에서 알림이 반짝이는 걸 보고 마음을 굳혔다.
“곧 있을 기자 회견에서 절 언급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이번 등급 이상 던전에서 제가 같이 공략했다고 말만 해 주시면 됩니다. 추가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고요.”
드라우그 킹을 쓰러트릴 때 강유현과 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히 좋은 보상을 받았다. 그러니 뻔뻔하게 더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대체 왜…… 당분간 한이진 능력자의 존재는 숨기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박윤성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내 존재가 다른 각성자들에게 노출되면 위험할 터였다. 내 스킬이 탐나서 납치하는 빌런들도 있을 수 있고. 곧 무너질 로키 길드는 몰라도 라우페이 길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가 곧 로키 길드의 비리를 터트릴 예정이라서요.”
오늘 아침에 심단테가 보낸 능력자로부터 핸드폰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는 임무를 마친 감시자가 보낸 자료가 들어 있었다.
“이걸 협회와 기자들에게 뿌리면 장태산은 끝날 겁니다. 그놈은 별로 무섭지 않지만, 그 뒤에 있는 라우페이 길드는 말이 다르죠.”
“…….”
라우페이 길드를 언급하자 박윤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가족들이 죽은 사고. 그걸 지시한 게 바로 라우페이 길드의 마스터였기 때문이었다.
라우페이 길드의 마스터는 소설 후반부쯤에 등장할 최종 흑막이지만, 이미 스토리가 많이 앞당겨졌기 때문에 그놈도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먼저 선수 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꼭 숨어 봤자 어차피 그자는 다 알아낼 테니까요. 제 동생이 구출되고, 장태산이 잡혀가면 다 알게 될걸요? 제가 로키 길드를 배신했다는 걸.”
“……그렇겠죠.”
“그러니 차라리 모든 사람이 제 존재를 알 수 있게 알려 주세요. 오히려 그게 저를 지켜 주는 힘이 되어 줄 겁니다.”
유명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강유현과 엮여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아무리 라우페이 길마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나를 건드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오딘 길드라면 절 지켜 줄 수 있겠죠?”
약간은 도발하듯이 말하고 응시하자, 박윤성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음, 벌써부터 든든하다. 역시 오딘 길드를 선택하길 잘했어.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착착 진행되는 일들에 배부른 고양이처럼 절로 느른한 미소가 나왔다.
“기자 회견 끝나면 바로 이쪽 숙소로 들어와.”
“음…….”
강유현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딘 길드는 국내 최고 길드답게 설비도 최첨단이었다. 당연히 강유현과 강수현도 오딘 길드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거기다 강유현이 사는 곳은 독채인데다 길마의 집 못지않게 넓고 좋다고 하지.
뭐, 내가 배정받는 곳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준 S급 대우 받으면서 살 수 있으려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물건만 챙기고 바로 갈게. 그래도 되죠?”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듬직한 대답에 만족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는 완수했으니 내일까지는 좀 쉬어야지.
“그럼 전 갑니다.”
“네? 가신다니요?”
“네?”
박윤성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박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리를 마련할 테니 기자 회견에 얼굴 비추고 가시죠.”
“…….”
네? 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