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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23)화 (23/228)
  • 23화

    각성을 하면 사람 인격도 변하는 걸까. 이런 애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뭐, 직접 만났던 건 고작 한 번뿐이었지만.

    소설에서 강수현은 정말이지 바른 아이였다. 가끔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형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대척점에 서서 구구절절 옳은 말만 늘어놓는 역할이었다. 이렇게 총을 든 빌런의 옆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범죄를 돕는 역할이 아니고 말이다.

    “……그냥, 잠시 비켜 주면 안 될까?”

    더 이상은 내 안에서의 강수현 이미지가 와장창 깨질 것 같아 물어보았는데, 그는 내 말을 듣고도 고개만 갸웃했다.

    “괜찮겠어요? 제가 놓으면 형한테 달려들 것 같은데.”

    “음.”

    확실히 감시자의 눈빛은 반항적이었다. 회유가 통하지 않자 힘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 듯했다. 하긴, S급인 강수현이 없으면 B급인 한이진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아무리 총을 들고 있어도 말이다.

    “뭐, 무슨 능력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하얗게 빛나는 총구를 감시자의 이마에 붙였다. 흔들림 없이 똑바로 겨눠진 차가운 총구를 피부로 느끼며 감시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 모습을 담담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는 피할 수 없겠지.”

    “윽……!”

    죽음의 공포가 직접적으로 눈앞에 다가오자, 감시자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 잠깐! 잠깐만!”

    “걱정 마. 한 방에 끝내 줄게.”

    “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강수현이 아직 보고 있는 앞에서 쏴 버릴 수는 없었기에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지, 진짜 네가 말하는 건 뭐든 다 할게. 제발 살려 줘. 응?”

    “흐음.”

    침까지 튀기며 절박하게 말하는 감시자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능력이 뭐야?”

    “은신이랑 공간 이동. 공간 이동은 나 혼자만 가능하고 단거리이긴 하지만, 은신이랑 사용하면 꽤 유용해.”

    “흠.”

    그래서 그렇게 위치가 중구난방이었구나? 나랑 눈이 마주친 건 강수현과 만난 게 의외라서 찰나에 실수한 모양이고. 능력만 보면 확실히 이든만큼 쓸 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확실하지 않단 말이야. 괜히 믿었다가 뒤통수 맞으면 곤란하거든.

    슬슬 그냥 죽이는 거로 마음이 기울어졌을 무렵, 이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강수현이 슬쩍 끼어들었다.

    “제가 스킬 쓸까요?”

    “네 스킬?”

    “이럴 때 쓸 만한 스킬이 있긴 한데.”

    “뭔데?”

    그러나 묻고 나서 강수현이 가진 스킬들을 뒤늦게 떠올렸다. 확실히 그가 가진 스킬 중에 감시자를 꼼짝도 못 하게 할 스킬이 있긴 했다.

    바로 ‘언약.’

    이름처럼 달콤한 뜻을 가진 스킬은 아니고, 거의 구속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강수현이 이 스킬을 쓰면 말로만 하는 구두 계약이라고 할지라도 강력한 제약이 생겨 상대방을 옭아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에서는 강수현이 이 스킬로 적들에게 정보를 실토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래도 선역답게 범죄나 협박에 쓰이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나는 찝찝한 얼굴로 강수현을 바라보았다.

    “언약이라는 스킬인데, 이걸 쓰면 형의 말을 따라야 할 거예요.”

    “그래……?”

    내 마땅치 않은 표정에 강수현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가 스킬이 쓸 만한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짠데. 등급도 높아요. S급인데…….”

    “음…….”

    강수현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고민이 되긴 한다. 과연 강수현의 도움을 받아도 될 것인가.

    그러나 지금의 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만약 이 감시자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면, 어쩌면 계획한 것보다 더 빨리 로키 길드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길마를 엿 먹이고 말이다.

    “……그럼 얘한테 스킬 좀 써 주라.”

    내 부탁에 강수현은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뭐로 할까요?”

    “조건이라.”

    느릿하게 감시자를 내려다봤다. 놈의 눈에 공포심이 깃드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픽 웃었다.

    언약 스킬은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원래 등급이 낮으면 쌍방이 될 테지만, 강수현은 S급이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만 약속을 지켜야 했다. 스킬에 걸린 대상자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우선 장태산이 저지른 비리들을 최대한 가져와.”

    “무, 뭐?”

    “오늘 안에 해 오면 죽이진 않을게.”

    “지금 뭐라는……!”

    “일단 이걸로 언약 걸어.”

    어이없어하는 감시자를 무시하며 강수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강수현이 내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따라하며 스킬을 썼다. 감시자의 이마에 언약의 표시가 새겨지자 들이밀었던 총구를 치웠다.

    “이제 꺼져.”

    “으, 조, 조건 좀 바꿔 주면 안 돼?”

    “아니, 시발, 네가 뭐든 다 한다며?”

    “그,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장태산의 비리를 캐다 바치는 건 허들이 너무 높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안 할 거면 뒤지시든가.”

    “으, 으윽…….”

    총을 빙빙 돌리며 빈정거리자 감시자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어차피 놈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지금 나에게 죽든가, 장태산을 배신하고 죽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보통 인간은 바로 눈앞에 있는 데드 플래그부터 회피하기 마련이었다.

    “……알았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감시자의 몸이 순식간에 투명해졌다. 구속을 풀자 곧바로 기척이 사라졌다. 아마 놈은 최소 이든과 같은 A급이었을 것이다. 강수현이 아니었으면 혼자서 잡기도 힘들었겠지.

    “나 잘했어요?”

    “…….”

    시선을 돌리자 강수현이 마치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또 환영이 보였다. 빌어먹을 귀와 꼬리 같은 거 말이다. 미치겠네, 진짜.

    “어, 잘했어.”

    어색하게 말하며 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장전한 총을 쏘지도 않고 넣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럼 상 주세요.”

    “상? 아, 그 데이트?”

    말하는 것도 껄끄러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자 강수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놈은 내가 총으로 사람 하나 죽이려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나? 소설에선 꽤 소심한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후, 그래, 하자. 데이트.”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미래를 알지 못했다. 데이트라고 해 봤자 고작 고딩이지 않은가. 비록 저번 인생의 기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미디어로 습득한 지식은 남아 있었다. 풋풋한 청춘들의 데이트란 우습고 시시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럼 가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나 자신을 격하게 때려 주고 싶었다. 넌 그냥 냅다 도망쳤어야 했다고! 고딩의 체력을 얕보지 마, 이 아저씨야!

    그렇게 난 장장 2시간 동안 피시방에서 과녁이라도 된 듯이 총알받이가 되고, 1시간 동안 오락실에 끌려가 각종 격투기 게임에서 장풍을 처맞고, 마지막으로 1시간 동안 코인 노래방에서 이름도 모르는 걸 그룹의 노래를 억지로 불러야 했다.

    시발, 죽여. 그냥 죽이라고!

    속으로 그렇게 외칠 때쯤 겨우 밖으로 벗어났다. 하늘이 노랬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

    아니다. 그냥 해가 지는 시간이라서였나 보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다가 시간을 슬쩍 확인했다.

    “나 이제 간다.”

    “네? 벌써요?”

    “벌써라니, 늦었는데.”

    강유현의 기자 회견이 시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장태산이 시킨 건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이진의 동생이 안전할 터였다.

    “어디 가는데요?”

    “어…….”

    동생인 강수현의 앞에서 당당하게 네 형의 기자 회견에 깽판 치러 간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서 조금 뜸을 들이다가 되물었다.

    “넌 강유현 기자 회견에 안 가냐?”

    “네? 제가 왜요?”

    “……형이잖아?”

    둘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사실 두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설정을 그렇게 짠 작가 탓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저 한이진이 그렇게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동생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형 기자 회견에 갈 거예요?”

    “뭐, 일이니까.”

    “…….”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하자 강수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비죽이고 있어 의외였다. 그렇게나 제 형이 싫은 건가? 얘가 이러다 주인공 편에 안 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세상의 존속에 대해 심각한 마음으로 고민 중인데, 강수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갈래요.”

    “……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형 기자 회견에 왜 가냐고 반문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또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다니. 어이없다는 듯이 강수현을 보며 물었다.

    “아까는 안 간다며?”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

    “그냥요.”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니 강수현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같이 가면 꽤 좋을걸요?”

    “뭐가 좋은데?”

    “음, 가족이니까 신분 확인도 잘 안 할 거고, 기자들이 못 들어가는 대기실에도 들어갈 수 있고…….”

    두 가지쯤 말했을 때 이미 메리트가 철철 넘쳤다. 나는 그냥 스킬 걸어서 들어갈 생각이었거든. 되도록 능력 낭비를 안 하는 게 훨씬 낫긴 하지. 들켜서 쫓겨날 염려도 없고.

    “좋아. 같이 가자.”

    “정말이죠?”

    “그래.”

    흔쾌히 말하고 강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설마 동생을 문전 박대하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강유현이 있는 오딘 길드부터 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고!

    “저기, 형.”

    “응?”

    “형, 근데…….”

    간만에 의욕 충만한 채 걷고 있는데, 강수현이 약간 풀린 눈으로 날 응시했다.

    “진짜 향수 안 써요?”

    “…….”

    그리고 묻는다는 게 또 이거다. 순간 처음 만났을 때가 오버랩되었다.

    나, 진짜 냄새가 나나? 덜컥 겁이 난 내가 떨면서 물었다.

    “나한테…… 무슨 냄새라도 나?”

    “아니, 냄새가 아니고…… 향이 좀 나는데.”

    “향?”

    “네, 되게 달달한 향이에요.”

    “……?”

    순간 팔을 들어 올려 킁킁 냄새를 맡았지만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약간 뽀송한 살 내음 정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강수현의 얼굴이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진짜…… 맛있을 것 같아.”

    “…….”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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