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시스템 SS-275.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엘리바가르의 가호(SS)가 무력화됩니다.」
「시스템 SS-276.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소멸하는 어둠(SS)의 효과가 약해집니다.」
「시스템 SS-277.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황혼의 인도자(SS)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
SS급 보스 몬스터. 망자의 왕 앞에서 소멸하거나 약화하는 스킬을 알리는 시스템 창을 보면서도 강유현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그가 드라우그 킹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SS급으로 각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니플헤임에서 유일하게 처치하지 못한 보스 몬스터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드라우그 킹이었다.
강유현은 잠시 드라우그 킹을 공략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게이트에 갇힌 1세대 각성자들이 곁에 있었다. 그들은 비록 강유현만큼 뛰어난 등급을 가지진 못했지만, 무수히 많은 전투를 거친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강유현은 그 전투의 마지막에 혼자 남았다. SS급인 드라우그 킹은 자신보다 낮은 스킬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각성자들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SS급인 강유현 역시 드라우그 킹보다 낮은 스킬 숙련도로 인해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당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동료들이 죽는 걸 바라보는 것과 비겁하게 혼자 살아남아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유현아…….
마지막으로 그의 곁에 남아 있었던 같은 1세대 각성자, 성윤재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유현아, 도망쳐.
그는 흙으로 만든 모든 걸 강철보다 단단하게 만드는 스킬을 가진 능력자였다. 드라우그 킹은 망자이지만 물리 공격력이 높은 몬스터였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 그나마 통할 수 있었다.
-어서…… 내가 손을 떼면 능력이 약해질 거야. 그러니 빨리…….
그러나 그것도 금방 한계에 다다랐다. 성윤재가 만든 견고한 방어막도 곧 깨어질 것만 같았다. 최후의 보루에 남은 두 명은 냉정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 줘.
-…….
간절한 성윤재의 말에 무슨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울음기를 머금은 처절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키이이이----!!!!!!!!!!!”
마치 드라우그 킹 역시 유현을 알아본 듯 길게 울부짖었다. 남아 있던 망자들이 드라우그 킹의 외침에 이끌려 나방처럼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유현은 담담하게 마검을 들어 올렸다.
[니플헤임-SS31의 채널이 일시적으로 열립니다.]
[‘망자의 지배자’가 당신을 보며 비웃음을 흘립니다.]
“…….”
표정이 굳은 강유현의 앞에 새카만 글씨가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도와줄까?」
결국 강유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꺼져.”
[‘망자의 지배자’가 역시 성깔이 있어 마음에 든다고 유쾌하게 웃습니다.]
지긋지긋한 새끼.
유일하게 강유현이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방은 심보가 고약했다. 그가 선심 쓰듯이 내미는 손길에 동료들의 끝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놈은 오로지 본인의 흥미 위주로 사람들을 농락하는 악마 새끼였다.
인상을 쓴 강유현이 시스템 음성과 문자를 무시하고 드라우그 킹에게 달려들려 했을 때였다.
“으아아아악!”
“……!”
하늘 위에서 사람이 뚝 하고 떨어졌다. 얼떨결에 그의 몸을 받아 든 강유현의 눈이 커졌다.
“으으윽.”
“……한이진?”
강유현의 품 안에 떨어진 건 한이진이었다. 그는 새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린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신음했다.
보스전이 바로 코앞인 상황에서, 강유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
“으으윽.”
이든 자식, 던지라고 했다고 진짜 그렇게 짐짝처럼 휙 던져 버리다니. 가뜩이나 멀미할 것 같았는데 최악이다.
신음하며 겨우 눈을 떴다. 그러다 새파란 빛이 흘러나오는 눈과 딱 마주쳤다.
“……한이진?”
“…….”
시발, 깜짝이야. 강유현의 굳어 있는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친 나는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나는 지금 강유현에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 있는 중이었다.
“왜 네가…….”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강유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안은 채로 뒤로 휙 물러났다.
퍽!
동시에 우리가 서 있었던 땅이 움푹 파였다. 손을 한번 내리친 것만으로도 땅이 뒤흔들리고 주변이 독성으로 인해 녹아내렸다. 나는 강유현의 품 안에서 그 장면을 멍하니 쳐다봤다.
‘시발, 혼자였으면 죽었겠다.’
질린 얼굴로 드라우그 킹을 올려다봤다. 동시에 경고하는 시스템 음성이 귀를 때렸고, 한이진의 쓸모없는 패시브 스킬들이 모두 막혔다는 안내가 떴다.
「시스템 ??-197.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고양이의 움직임(C)이 무력화됩니다.」
「시스템 ??-198.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매끄러운 혀(C)의 효과가 약해집니다.」
「시스템 ??-199.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복주머니(B)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
어차피 패시브 스킬도 공격형이 하나도 없으니 아무 소용없는 거 아닌가? 다행인 듯 아닌 듯 기분이 나쁜 듯 나쁘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알림이었다.
“키아아아아!”
드라우그 킹은 제 공격을 피한 우리를 보며 길게 울부짖었다. 아니, 우리가 아니고 강유현이겠지. 저 보스 몬스터는 나 같은 조무래기에게는 관심도 없을 테니까.
그게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없는 것처럼 무시해 주면 좋은 일이었다.
쾅, 쾅, 쾅, 쾅!
문제는 내가 지금 강유현과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흥분한 드라우그 킹이 무작정 공격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강유현은 나를 안은 채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야, 앞에! 앞!”
“……!”
졸지에 사령탑이 된 나는 드라우그 킹의 팔이 보일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며 외쳤다. 강유현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모두 피하며 날렵하게 움직였다.
“윽…….”
하지만 공격은 피했어도 공기 중에 퍼지는 독은 막을 길이 없었다. 드라우그 킹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독을 뿜어 댔는데, 팔을 휘두르며 공격하자 더욱 심해졌다. SS급인 강유현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 않지만, 한이진의 몸에는 치명적이었다.
“바람 능력자에게 돌아가.”
“…….”
무뚝뚝한 말투로 말한 강유현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게 딱히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내가 그를 방해하고 있는 꼴이었으니까. 스킬을 걸어 주고 싶어도 이렇게 계속 움직여서는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나는 강유현의 어깨 너머 안절부절못하며 날아다니는 이든을 흘끗 쳐다봤다. 강유현의 말대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올까?
아니, 그러다 한눈파는 사이에 강유현이 죽어 버린다면?
그럼 다 끝이다. 여기서 저 빌어먹을 보스몹을 못 잡으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떻게 해서든 혼란한 와중에 정신을 집중해서 개박하 스킬을 써야 한다. 그러면 능력치가 뻥튀기된 강유현은 저 보스몹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퍽!
“윽!”
“한이진!”
그러나 애써 결심한 마음이 무색하게, 곧바로 드라우그 킹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은 나와 강유현의 몸이 붕 떴다. 멀리서 놀란 이든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튕겨 나간 나와 강유현의 몸이 땅을 뒹굴었다. 나는 사실 별다른 타격을 느끼지 못했다. 강유현이 공격을 받기 직전에 스킬을 쓴 건지 몸이 꽤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읏, 야, 강유현……!”
“…….”
드라우그 킹이 재차 공격하려는 낌새를 느낀 내가 강유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얼굴을 살펴봤다.
“강유현! 정신 차려!”
“…….”
강유현은 정신을 잃은 건지 눈을 감고 꼼짝하지도 않았다. 낭패였다.
“한이진!!”
“키키키킥!”
내 이름을 부르는 이든의 목소리와 드라우그 킹의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동시에 귓가를 울렸다. 과연 이든이 나에게 오는 게 빠를까, 아니면 저 새끼가 마지막 공격을 퍼붓는 게 더 빠를까.
속으로 그딴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드라우그 킹의 시커먼 팔이 오래된 필름 영화처럼 느리게 보였다.
놈은 웃고 있었다. 그렇겠지. 니플헤임에서 강유현을 놓친 후로 계속 집착해 왔을 테니.
저도 모르게 강유현의 몸을 꽉 끌어안은 내가 드라우그 킹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희열이 섞인 번들거리는 눈에서 즐거운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 무감정한 시스템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니플헤임-SS31의 서버에 ‘변덕스러운 자’가 임시 입장하였습니다.]
[‘변덕스러운 자’가 당신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
시스템 음성이 들리는 동시에 드라우그 킹의 팔이 공중에 멈췄다. 나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데서 죽으면 곤란한데.】
“……!”
【조금만 도와주마. 아기 고양아.】
남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었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시야가 확 뒤집히며 반전했다.
“으악!”
그 와중에도 강유현의 몸을 놓지 않은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콰광!
드라우그 킹의 팔이 방금까지 나와 강유현이 있었던 자리를 힘껏 내리쳤다. 나는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윽…….”
정신을 차리려는 듯 강유현이 눈을 찌푸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능력을 썼다.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졌다.
나보다 등급이 높은 능력자에게 이 스킬을 쓰려면 특수한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접촉’, 즉 스킨십이었다. 거기다 스킬 설명에 따르면 스킨십 단계가 높을수록 효과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시발, 시발.
기분은 나쁘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요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통하지 않을 터였다.
“한…… 이진?”
“씨발.”
어느새 스킬의 영향으로 두 눈이 풀어진 강유현이 날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욕설을 내뱉은 내가 강유현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거세게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