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3.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나는 쌍스급 세계관의 던전이 어떤 곳인지 큰 고민도 하지 않고 이든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대충 ‘자주 하던 게임이랑 비슷한 느낌이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실제로 가서 보니 느낌이 장난 아니었다.
우선, 생각보다 던전 관리가 무척 잘 되어 있었다.
이든이 던전 관리인에게 몰래 뒷돈을 주는 걸 보긴 했지만, 꽤 많은 사람이 체계적으로 던전을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뒷돈을 찔러주고 불법으로 던전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은 로키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도 아니기 때문에 길마에게 들킬 염려는 없다고 이든이 호언장담했다.
“근데 정말 우리 둘이서 던전 클리어가 가능해?”
아무리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지만 설마 이든과 단둘이 던전 공략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내 물음에 이든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당연히 가능하지. 오빠 못 믿니?”
“……시발.”
또 저놈의 오빠 드립. 이든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저놈은 맞으면 더 좋아하고도 남을게 분명하니까.
어쨌든 A급 능력자라면 D급 던전 따위 혼자서 클리어하고도 남는 모양이었다. 한이진은 전투 스킬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든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근데 난 무기 안 주냐?”
던전 입구 앞에 서서 장비를 점검하던 이든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놈은 혼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장비를 처바르고 있으면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너한테 과연 무기가 필요할까?”
“…….”
시발. 명백히 무시하는 눈길로 이든이 내 몸을 쭉 훑어 내렸다. 나는 지금 몸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비만 몸에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무기도 없이 던전 들어가라고?”
“그치만 네가 싸울 일은 없잖아.”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내 말에 이든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인벤토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든의 태도를 보아하니 한이진이 지금까지 어떻게 던전에서 레벨 업을 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음, 칼은 못 쓸 테고…… 몽둥이? 몽둥이는 어때?”
“…….”
이든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건 야구 배트같이 생긴 보잘것없는 몽둥이였다. 저걸로 개 패듯이 확 패 줄까, 진짜.
“이걸로 때려 줄까?”
“아, 진짜? 그럼 고맙지.”
“씨발.”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든 놈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중지를 들어 올렸다.
“꺼져.”
“농담이야. 농담.”
전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지껄인 이든이 몽둥이를 다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길쭉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이거 한 번 써 봐.”
“총?”
얼떨결에 권총을 받아 든 내가 깜짝 놀라며 이든과 총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거 진짜 총이야?”
“그럼 가짜겠어?”
“…….”
원래 내가 살던 현실과 소설 속 현실의 괴리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소설 속 세상, 쌍스급의 세계는 헌터들에게 온갖 무기 소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일반인에게 사용하지만 않으면 이렇게 총을 가져도 되는 것이다.
거기다 이건 일반적인 총이 아닐 것이다. 베레타사의 권총과 똑같은 모양을 가진 장비는 새하얀 총신에서 희미한 빛이 나고 있었다.
“뭐, C급 스킬 가진 제작자가 만든 건데 꽤 쓸 만할 거야.”
“흠.”
손에 착 달라붙는 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C급 제작 스킬이면 높은 등급의 무기는 아닐 터였다.
“근데 너 총 쏠 줄은 알지?”
“…….”
이게 군필자를 뭐로 보고. 아마 이 세계는 게이트 사태 이후로 헌터들은 입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든을 흘겨보며 총을 장전했다.
철컥.
“쏠 줄 안다. 시발놈아.”
“헉.”
능숙하게 총을 다루자 이든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더 놀려 주려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제 나름 익숙해진 무뚝뚝한 시스템 음성이었다.
[캐릭터 특성 ‘금손’의 영향으로 아이템 등급이 변경됩니다.]
“……뭐?”
금손? 아이템 등급 변경?
나는 놀란 눈으로 장전한 총을 내려다봤다. 왜인지 하얀 총신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총을 보며 멈칫한 나를 본 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내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겠지.
“아무것도 아니야.”
시치미를 떼고 앞으로 걸어갔다. 눈앞에 새파란 빛이 일렁이는 게이트가 보였다.
“어서 가자고.”
“……그래.”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던 이든이 앞장서서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 한 나도 뒤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고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윽.”
“괜찮아?”
곧바로 나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설마하니 게이트를 지날 때 멀미를 느낄 줄이야.
머리를 휘휘 내저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 괜찮아.”
“여전히 멀미가 심하네.”
쯧, 혀를 찬 이든이 능숙하게 내 등을 어루만졌다.
한이진의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켜서 게이트 멀미를 느끼는 건가?
납득한 내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짧은 잔디가 너른 평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중간중간 불쑥 솟은 키가 큰 나무는 이글거리는 태양을 가려 주고 있었고, 한쪽에는 투명한 물이 흐르는 시냇가도 있었다.
마치 오래된 명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이었다.
‘이런 곳이 던전이라니.’
낮은 등급의 던전은 배경이 몹시 저렙 존처럼 보인다던데 맞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몬스터는 좀 지나야 나올 거야.”
“그래.”
슬라임도 나오지 않을 듯한 들판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이윽고 나무가 우거진 숲이 나왔다. 이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쌍스급의 작가는 북유럽 신화를 좋아하는지, 소설 곳곳에 북유럽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 명칭을 써 놓곤 했다.
가령 지금 우리가 있는 던전 안의 공간은 알브헤임이라고 불렀다. 흔히 알고 있는 엘프들의 선조인 알브, 그들의 고향이라는 뜻이었다.
낮은 등급의 던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엘프들이 살 것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했다. 나는 소설의 설정을 떠올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이든이 무언가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몬스터다.”
“……몬스터라고?”
이든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작은 소동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바로 이든을 비웃었다.
“야, 토끼가 무슨 몬스터야.”
“아니야. 쟤 엄청 무서운 몬스터야.”
“허, 참.”
코웃음을 치자 이든이 억울하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게 신호라도 된다는 듯이 토끼가 움찔거렸다.
“그래, 퍽이나 무서운…….”
“끼이!”
“무서운……?”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소음에 놀라서 앞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토끼는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귀여운 머리 아래 드러난 몸은 의외로 근육질이었다.
……만렙 토끼?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데, 토끼가 그대로 우리에게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몸이 굳은 나와 달리 이든은 익숙한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콰앙!
이든이 만든 바람 장벽이 만렙 토끼의 돌진을 막았다. 놈은 분하다는 듯이 허공을 쿵쿵 치며 울부짖었다.
“끼이이, 끼이!”
“내 말 맞지?”
“…….”
흉흉한 토끼를 등지며 이든이 그것 보라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놀랍긴 한데 그걸 왜 자랑하는 것처럼 뿌듯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았으니까 빨리 처리해.”
얼굴은 귀엽고 소중한 토끼인데, 그를 배신하는 몸과 행동이 동심을 파괴하고 있었다. 심적 타격을 입은 내가 괴로운 얼굴로 말하자, 이든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이진이는 오빠만 믿어.”
“시발.”
“크큭.”
곧장 튀어나오는 욕설에 이든이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둘렀다. 건틀릿을 낀 그의 손에서 반투명한 빛이 흘러나왔다.
쿠웅!
“끼이익!”
세찬 바람에 온몸이 뚫린 토끼가 비명을 내질렀다. 흉흉한 모습이긴 하나 그래봤자 D급 던전의 몬스터라 그런지 확실히 약해 보였다.
“이제 슬슬 몰이할 수 있겠다.”
이든이 말하자마자 똑같이 생긴 만렙 토끼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우리를 감쌌다. 이든이 왜 그렇게 여유롭게 토끼를 처리하나 했더니, 비명을 들은 동료들을 꾀어내어 몰이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끽, 끼이!”
“끼이이, 끼익!”
그 후는 그저 학살의 시간이었다. 이든이 손을 휘두르는 족족 토끼들이 썰려 나갔다. 온몸에서 피를 내뿜으며 목이 잘려 죽는 토끼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한이진의 정신력 스탯이 높아서 그런가? 어딘가 현실성 없는 풍경이었다. 피가 낭자한데도 그다지 잔인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머리 한구석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평화로운 숲에 어울리지 않는 비명이 계속 이어지고, 나는 숲 한쪽을 유심히 살폈다.
“…….”
유독 숲에서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풀이 수상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계속 신경이 쓰인다. 이든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는 지금 만렙 토끼들을 학살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음.”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음영이 진 부분으로 다가갔다. 설마 D급 던전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런 생각도 반쯤 했던 것 같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들썩이던 풀이 잠잠해졌다. 역시 별거 아닌 건가?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았다.
“으악!”
“……한이진?”
전에 보았던 흉흉한 파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주인공이 왜 거기서 나와?
강유현이 기겁한 나를 내려다보며 틀어쥔 손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의 간섭에 의해 등급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별로 반갑지 않은 시스템 음성이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등급 조정?
[알브헤임-D29의 등급이 SS급으로 조정됩니다.]
이런 미친.
안색을 굳힌 내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