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2. 탈덕 각이 선다
순간적으로 불쑥 든 생각을 억눌렀다.
그런데 정말, 사진으로만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온 강수현은 키가 아주 컸다. 한이진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었다.
햇빛에 반사된 갈색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보였고, 곱슬기가 있어서 부스스했다. 보면 볼수록 거대한 골든 레트리버 같았다.
“은호 형?”
“아.”
갈색 눈을 크게 뜨며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강수현의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지금 스킬로 강유현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오딘 길드의 A급 헌터인 윤은호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윤은호는 강수현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적중한 듯 나를 보는 강수현의 얼굴은 의심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한이진의 스킬이 워낙 감쪽같아서 그런지 들킬 염려는 없어 보였다.
“일은 무슨, 너랑 밥 한 끼 먹으려고 왔지.”
능청스러운 내 말에 강수현은 금방 표정을 바꾸며 대꾸했다.
“진짜요? 밥 사주실 거예요?”
“그래, 임마.”
친근하게 강수현의 어깨를 툭 치면서 몰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쪽을 의심스럽게 보는 눈길은 없었다.
강유현은 게이트에서 귀환한 뒤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래서 덩달아 동생인 강수현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학교에서 아싸처럼 지내고 있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지속 시간을 늘리기 위해 오직 강수현의 눈에만 환영과 환청이 보이도록 능력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수현을 아는 누군가가 눈여겨보면 들킬 위험이 커질 텐데, 다행히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낫겠지.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가자, 고기 사 줄게.”
그렇게 호기롭게 몸을 돌린 것까진 좋았는데, 아무도 나를 따라오는 기색이 없었다. 결국 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형, 근데…….”
“……응?”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강수현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훑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향수 뿌렸어요?”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 향수 같은 건 뿌리지도 않았는데.”
장태산 이 미친 새끼는 쓸데없이 준비성이 좋았다. 생판 만나 본 적 없는 윤은호로 위장할 수 있도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서 나에게 넘겼다. 덕분에 나는 밤새도록 윤은호에 대한 걸 달달 외워야만 했다.
자료에 따르면 마음씨 좋은 옆집 형 같은 윤은호는 소탈해서 향수 같은 건 뿌리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귀찮게 그런 짓은 안 한다.
“흐음.”
그러나 의심스럽다는 듯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 강수현을 보며 충격 받았다.
나…… 냄새나나? 대체 무슨 냄새가 나기에 저러는 거야?
얼어붙어 있는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다시 한 번 쭉 훑더니 강수현이 씩 미소 지었다.
“좋아요. 가요, 형.”
“어? 어.”
그리고 손을 뻗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는 다시 흠칫 놀랐다. 환영과 환청은 실제 모습까지 바꿔 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윤은호랑 한이진의 손목 굵기가 확 달라서 알아채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했는데, 강수현은 날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실로 무해한 미소였다.
조금 안심한 나는 강수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납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디 갈래?”
“형이 가고 싶은 데로 가요.”
“……그래.”
강수현이 저가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 핑계 댈 거리를 오조 오억 개 정도 생각하고 있던 나는 좀 놀랐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생각했던 장소로 강수현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학교에 오기 전에 봐 두었던 인적 드문 골목길이었다. 근처엔 오래된 상가와 공장뿐이라 낮에도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 엄한 짓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얘한테 엄한 짓을 할 거란 건 아니었다. 원작의 한이진은 사람들 보는 데서 요란하게 강수현을 납치하고도 모자라 능력도 각성하지 않은 어린애를 못살게 굴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신사적으로 대할 예정이었다. 훗날 내가 편하도록 말이다.
“이런 곳에 맛집이 있어요?”
“…….”
강수현은 순진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런 수상한 곳에 끌려와서도 의심할 줄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얘 진짜 큰일이네. 아무리 내 변장이 스킬로 완벽하다고 해도 너무 순진하잖아.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저기, 수현아. 아니, 강수현.”
“네?”
심각해진 내 목소리에 강수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속였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돌려 내 손목을 쳐다봤다. 낯선 골목이 무서운지 강수현은 아직도 내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다행히 시계가 살짝 보였다. 길마와 약속했던 십 분은 이미 훨씬 지나 있었다. 나는 후, 숨을 돌리고 다시 강수현을 바라보았다.
“사실, 나 윤은호 아니야.”
“…….”
“속여서 미안한데, 그게…….”
죄를 고백하면서도 나는 능력을 풀지 않았다. 강수현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각종 플랜을 만들어 뒀기 때문이었다.
만약 녀석이 끝까지 나에게 거부감을 느끼면 능력을 풀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히 한이진의 모습을 드러내서 미운털 박히면 곤란했으니까.
지금은 각성하기 전이지만, 강수현 역시 곧 각성하여 능력자가 된다. 형이 주인공인 만큼, 그의 편에 설 강수현 역시 형 버프를 받아 뛰어난 능력자가 된다. 무려 S급 능력자로 말이지. 그러니 원작의 한이진처럼 지랄 떨지 말고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했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알고 있었어요.”
“……응?”
“알고 있었다고요. 그쪽이 은호 형 아닌 거.”
“……?”
먼저 선수 치듯 말한 강수현이 빙긋 웃었다.
나는 한동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내 손목을 쥔 강수현의 힘이 좀 더 세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거 무서워서 잡고 있던 게 아니라 도망치는 걸 막으려고 잡고 있던 건가.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때쯤, 강수현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이거 능력이에요? 풀면 안 돼요? 진짜 모습 보고 싶은데.”
“아니, 그게…….”
강수현의 지대한 관심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의 눈이 내 몸을 가리고 있는 스킬 너머를 보려는 듯 집요하게 응시했다.
원작에서 강수현은 이렇지 않았다. 당연했다. 한이진은 아직 각성 전인 강수현을 개 끌고 다니듯이 험하게 다뤘으니까. 만약 한이진이 열폭해서 강유현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전에 능력을 각성한 강수현에게 맞아 뒈졌을 것이다.
“그게, 곤란해.”
“흐음.”
아직 강수현과 어떤 관계가 될지 불투명한데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이 일로 내게 억하심정을 품고 복수하려고 들면 곤란하다. 그래서 거절했더니 강수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 응?”
궁금한 거라니. 친한 지인의 모습으로 접근해서 납치한 범죄자한테 대체 뭐가 궁금한 걸까. 손끝이 조금 굳어 가는 걸 느끼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뭔데?”
강수현의 눈꼬리가 휘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조금 여우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순식간에 인상이 변한 강수현이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자꾸 형한테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핥아도 달콤한 맛이 날까요?”
“……뭐?”
뭔 소리야?
강수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리자, 손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강수현이 내 손목을 잡고 들어 올린 거였다. 뒤늦게 깨달은 내가 잡힌 손목을 빼려 했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잠깐, 잠깐만!”
당황해서 소리치자 강수현은 나를 놀리듯이 붉은 혀를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이 강수현의 혀에 닿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했다. 절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씹, 기다리라고, 야!”
“…….”
그러자 놀랍게도 강수현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마치 ‘기다려!’를 알아들은 개새끼처럼.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거기다 제한 시간까지 온 듯 내 몸을 감싸던 능력이 한순간에 풀려 버렸다.
“……어?”
강수현은 순식간에 모습이 바뀐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낭패였다.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놔라.”
“…….”
“야.”
몇 번이나 말을 걸어도 강수현은 묵묵부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짜증 나서 강수현에게 잡힌 손목을 거칠게 비틀자, 겨우 놈의 입술이 열렸다.
“이름.”
“뭐?”
“이름 알려 주면 놔줄게요.”
짓궂은 미소를 지은 강수현이 다른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덕분에 나는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난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싫어!”
“알려 줘요. 네?”
눈웃음치는 강수현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왜 뿌리치지 못하지? 강수현은 분명 아직 일반인일 터였다. B급이라도 일반인에 비하면 월등히 강한 능력자가 꼼짝도 못 한다니,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수현의 얼굴이 급격하게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야, 그만……!”
허리를 최대한 비틀며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러나 강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이제 그만하지?”
“……!”
이든이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그가 강수현의 어깨를 잡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안심이 되는 동시에 기분도 나빠졌다. 역시 나 모르게 감시하고 있었구나.
아니, 그래도 지금은 꽤 기꺼웠다. 강수현의 돌발 행동이 너무나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손 놔라.”
“싫은데요?”
“…….”
열받았는지 이든의 얼굴이 더 험악해졌다. 저러다 잘못하면 강수현을 때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이든, 잠…….”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의 동생을 때리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서 말리려던 참이었다.
주변의 온도가 확 내려가는 싸늘한 음성이 골목 안에 깔렸다.
“강수현.”
“……!”
나는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키가 큰 남자가 엉겨 붙어 있는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새파란 빛을 뿌리는 남자의 눈을 보며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시발…….’
주인공, 강유현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