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끼익.
탁.
등 뒤에서 문이 작은 소음을 내며 닫혔다.
눈만 도르르 굴리며 방 안을 살펴봤다. 드라마에서 보던 재벌 집 방 안이 이런 풍경일까. 척 보기에도 값비싼 물건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생소한 공간이지만 동기화가 끝나서 그런지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어, 진이 왔어?”
고개를 돌리자 가죽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장태산. 로키 길드의 마스터.
확실히 소설만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든도, 백시후도 그랬지만 이 사람은 정말이지…….
‘흔히 보는 옆집 아저씨 같네.’
빌런 연합 길드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로키 길드. 그런 길드의 마스터이니 당연히 조폭처럼 무서운 인상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풍채 좋고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소설에서도 장태산이 의외로 인상이 좋은 편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악역인 그는 하찮은 겉모습과 달리 온갖 범죄를 섭렵한 베테랑 악인이었다. 좋은 인상만 보고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긴장해서 그런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상태로 흘끗 장태산을 쳐다보자, 그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기서 뭐 해? 여기 앉아.”
“…….”
움찔,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몸이 반응했다. 내가 아니라, 마치 한이진의 몸이 움직인 것 같았다.
동기화가 끝났기 때문인가? 나는 제법 멀쩡하게 걸어가 장태산의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거만한 포즈가 만들어졌다. 긴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든 채로 장태산을 쳐다봤다. 보지 않았지만 왜인지 내 얼굴이 상당히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하하, 잘 쉬었어?”
“……잘 쉬었냐고요?”
“하하…….”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이든과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찡그리자, 나와 달리 장태산의 굵은 눈썹은 아래로 축 처졌다.
마치 내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에 속으로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겉으로는 계속 뻔뻔한 모습을 유지했다. 본능적으로 이래야 한다는 걸 동기화한 내 몸이 느끼는 것 같았다.
거기다 아침부터 보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쳤다. 로키 길드를 벗어나려고 문을 열자마자 마주쳤던 이든. 그리고 소란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찾아왔던 백시후.
한이진은 어떤 일로 방에 감금당하다시피 살고 있었고, 심지어 감시까지 당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철두철미하게. 그런 상황에서 이 성질머리에 좋은 언행을 보일 리가 없었다. 상대가 설사 길마라고 해도 말이다.
“야, 아직도 화났냐? 그치만 그건…….”
“그건 뭐요.”
정말로 몰라서 물은 거였지만, 길마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간만 있었어도 동기화한 한이진의 기억을 좀 엿봤을 텐데. 아무런 준비 없이 길마를 만나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뭐, 죽이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개지랄…… 아니, 난리를 치면…… 내 입장이 뭐가 되니? 응?”
“…….”
진짜 뭔 소리지.
죽여? 개지랄?
범죄자답게 하는 말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말투만큼은 내가 빙의한 한이진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살살 달래고 있었다.
이 미묘한 간극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대체 길마와 한이진은 어떤 관계였을까. 소설에서 봤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휴…… 알았다. 알았어.”
“……?”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길마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게 마치 ‘어쩔 수 없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라고 말하는 천방지축 딸을 둔 아버지 의 모습 같아 묘하게 어울렸다.
“그럼 이번 일만 하면 만나게 해 주마. 어때?”
“…….”
뭐래. 누굴 만나게 해 줘?
하나도 알아먹지 못했으나, 나는 제법 흥미가 동한 얼굴을 했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인데요?”
그리고 능청스럽게 묻기까지 했다. 그러자 내 눈치를 보던 길마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자료가 든 서류철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자, 일단 이거 읽어 보고, 응?”
“…….”
일단 서류철을 받아 펼쳐 보았다. 그러자 누군가의 사진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진을 잡아 들여다보았다.
곱슬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남자였다. 교복을 입은 얼굴이 좀 앳된 걸로 봐선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얼굴은 작은 편이지만 쌍꺼풀진 눈이 크고 입술은 도톰했다. 거기다 각이 진 얼굴이 제법 남자다워 보였다.
순간 길마가 생뚱맞게 연예인 지망생 사진을 준 건가 싶었는데, 사진 속 남자애의 명찰이 눈에 박혔다.
강수현.
이 소설, 쌍스급의 주인공인 강유현의 친동생이었다.
‘씨발…….’
길마가 강수현의 사진과 프로필을 주자마자 소설의 초입 부분이 생각났다.
밤을 꼴딱 새울 정도로 소설을 몰아서 읽었기 때문에 첫 편부터 제법 기억이 잘 나는 편이었다.
소설 속 세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현대 무력으로는 수많은 몬스터를 처치할 수가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몇백 명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곳과는 전혀 딴 세상에서 그들은 각성하여 능력자가 되었다.
강유현은 능력이 발현된 1세대 각성자였다. 그는 게이트 안에서 SS급으로 발현했다. 다른 각성자들과 힘을 합쳐 게이트 안의 미궁을 공략하려 했지만 여러 일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귀환한 건 그 혼자뿐이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땐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동생 강수현은 헤어지기 전에는 어린아이였는데, 돌아와 보니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귀환해서 다시 만난 형제는 어딘가 어색했다. 강유현은 강유현대로 죽다 살아왔기 때문에 성격이 예전 같지 않았고, 강수현도 예전의 다정했던 형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온 그를 어색해했다.
게이트에서 귀환한 강유현은 당시 한국 최고 길드인 오딘에 러브콜을 받았고, 그는 오딘 길드 마스터의 선한 마음에 이끌려 그를 도와주게 된다. 그리고 공략 불가였던 던전들을 차례로 클리어하고 승승장구한다.
“딱, 그냥 30분! 30분 정도만 어떻게 잡아 놓으면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응? 그 정도는 괜찮지?”
“…….”
장태산이 요구하는 건 강유현의 동생, 강수현을 납치하는 거였다.
지금은 강유현이 아직 오딘 길드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그를 빌런 연합이 동생을 납치하고 협박해서 방해하려는 속셈인데…….
주인공한테 그딴 짓이 통하겠냐고. 나는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설이 워낙 주인공의 사이다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빌런들의 악행은 다소 유치한 감이 있었다.
“그럼 15분…… 어때?”
“…….”
“10분! 더는 안 돼!”
저 새끼는 애 납치하는 게 뭐 자랑이라고 흥정을 하고 있어.
장태산은 내가 한숨 쉬는 걸 하기 싫어서인지 알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물론 하기 싫다. 진짜 하기 싫다.
이 일로 한이진은 주인공한테 단단히 찍히게 되거든. 엄청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죽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이때도 강유현한테 처맞아서 몇 달간 병원 신세 지고 그랬을걸?
쓱쓱 읽고 넘겼던 에피소드라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그랬을 거다.
나는 내키지 않은 눈으로 강수현의 사진을 훑었다. 사진 속의 강수현은 내 고민도 모르는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 해맑은 청소년을 내가 납치해야 한단 말이지. 마치 한이진의 몸도 거부감을 느끼는 듯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대로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원작도 원작이고, 지금은 사람 좋은 척 눈치 보는 길마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좋아요. 대신 장소랑 시간, 방식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해요.”
“으응?”
“이 조건 아니면 안 받아요.”
일부러 더 딱딱한 말투로 말하자 장태산의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아마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끝도 없이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그래. 알았다.”
“그럼 저 돌아가요.”
말을 마치자마자 서류철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역시 빌런 길드의 마스터랑은 오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다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는 장태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좆같은 감시질도 그만하죠?”
아직도 A급인 이든이 왜 한이진을 감시하고 있는 건지 이유는 모르지만 기분은 정말 좆같았다.
거기다 강수현을 납치하고 나서 내 살길도 찾아야 하기에 이든에게 계속 감시당하면 곤란했다.
“뭐라고?”
이번엔 워딩이 좀 세서 그런지 장태산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러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 능력 섬세한 거 몰라요? 방해받으면 일에 지장 있을 수 있어요.”
이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한이진은 귀한 정신계 능력자였다. 다수에게 환영과 환청을 둘 다 걸 수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좆같은 능력치이긴 하지만 스탯에서 정신력이 가장 높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감시받는 게 신경 쓰여서 임무 수행을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필했다.
“어? 어어, 그건 곤란하지.”
언제 표정을 구겼냐는 듯이 장태산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절대로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는 걸 직감했다.
개새끼, 이제 티가 나지 않게 감시하겠구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 갑니다.”
“그래, 그래.”
길마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문을 열었다. 머릿속은 온갖 걱정으로 복잡했지만, 여전히 패치된 한이진의 정신이 표정과 몸짓을 꽉 잡고 있었다.
그래서 방을 나오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
그리고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
“…….”
나를 바라보는 서늘한 검은 눈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