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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2)화 (2/228)
  • 2화

    내 말에 이든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성격하고는.”

    다행히 한이진과 제법 비슷했는지 이든은 별로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순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성격이 지랄맞은 한이진은 본래 내 성격과도 재질이 비슷했다. 기분 나쁘게도.

    “뭐야, 너 아직도 저딴 거 끼고 사는 거야?”

    “……어?”

    이든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로 꽂혔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니, 깨끗한 방 안에 흉흉한 기계가 여전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저게 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든은 저걸 잘 안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침부터 정신이 없는 거구나? 관둬라, 관둬. 네가 그런다고 A급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

    “저거 부작용 장난 아니라던데 괜찮냐? 너 그러다가 골로 간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묵묵히 이든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맹렬히 놈의 말을 분석했다.

    한이진은 B급이고 낮은 등급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A급이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소설에서 드러나기도 했지.

    아무래도 저 기분 나쁜 시커먼 기계가 능력자들의 등급을 올려 주는 불법 아이템인 것 같았다.

    부작용 운운하는 거 보면 상당히 위험한 기계인 것 같고, 그러면 아마 진짜 한이진은…….

    설마 저 기계 때문에 죽은 건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당장 저딴 거 치우든가 해야지.

    이든의 시선을 따라 기계를 흘끗 노려보았다.

    “신경 꺼.”

    “흥, 걱정해 줘도 지랄이야.”

    “필요 없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뭐가 즐거운지 이든 놈은 또 파하하,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 욕먹는 게 좋은 건가? 하여간 미친놈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앞을 막아선 이든의 어깨를 밀어 냈다.

    “비켜.”

    “어디 가냐니까?”

    어깨를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단단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혀를 차며 밀어 내는 건 멈추고 얼굴을 휙 들어 올렸다. 그리고 끈질기게 물어 오는 이든을 노려보며 외쳤다.

    “화장실 간다. 왜!”

    그러자 이든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렌즈를 낀 건지 눈도 약간 분홍빛이 돈다. 남자가 저렇게 분홍색이 잘 어울릴 일인가. 그런데도 유약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남자답게 멋있으니 통탄할 일이었다.

    역시 신은 불공평한 게 틀림없다.

    “우리 이진아.”

    “……?”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절로 얼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자, 이든 놈이 고개를 숙였다. 훅 다가온 얼굴에 놀라 주춤거리자, 붉은 입술을 길게 올리며 놈이 씨익 웃었다.

    “화장실 방 안에 있잖아.”

    “……!”

    “왜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걸까? 응?”

    방을 대충 둘러보느라 화장실이 안에 딸려 있는지도 몰랐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순식간에 맹수의 눈빛이 된 이든의 눈이 나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여기서 당황하면 모든 게 끝장나니까.

    평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휙 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뻔뻔한 연기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리고 이번엔 가까이 다가온 이든을 두 손으로 확 밀었다.

    “저리 꺼져, 이 새끼야!”

    소설 속의 한이진은 성격이 아주 나빴다. 고작 B급인 주제에 그나마 쓸 만한 능력으로 길드 마스터의 특혜를 받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그러니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이든에게도 이러는 게 자연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정답이었나 보다.

    내 시건방진 행동에 놀라거나 화내기는커녕 이든 놈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마치 기분 좋다는 듯이.

    “난 네가 욕할 때마다 그렇게 좋더라.”

    “미친 새끼.”

    이번엔 좀 진심을 담아 욕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보란 듯이 놈의 코앞에서 문을 쾅, 닫자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문에서 물러났다. 이든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올 생각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아…….”

    어떡하지, 시발.

    설마하니 A급 능력자가 방 앞에서 대기하며 감시하고 있을 줄이야.

    방 안에 혼자 남겨지니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저놈이 자진해서 저러고 있진 않을 테고, 그럼 길마가 시켰다는 건데. 왜 굳이?

    왜 이든을 시켜서 한이진을 감시하고 있는 거지? 대체 왜?

    거기다 어디 가냐고 끈질기게 묻는 걸로 봐선 그대로 밀치고 갔으면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한이진은 그다지 비중 있는 빌런이 아니었다. 능력이 좀 쓸 만하긴 하지만 그래 봤자 B급이고. 저런 고급 인력을 낭비할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초조하게 서 있던 나는 이렇게 된 거 방을 좀 더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 전에 기분 나쁜 기계를 방 한구석으로 쓱 치우고,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잠금장치는 그냥 지문 인식으로 풀렸다. 다행이었다.

    “……에이씨.”

    그러나 핸드폰 안에는 건질 만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몇몇 연락처와 기본적인 앱만 깔린 핸드폰은 평소에 연락 수단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지 휑하기만 했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돌렸다.

    지갑과 핸드폰을 찾았던 책상에 눈길이 닿았다. 깔끔한 책상 위에는 여러 물건이 있었지만, 그중에 작은 수첩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서 수첩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무방비한 곳에 중요한 정보를 적은 수첩을 둘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몰랐다.

    “음……?”

    첫 페이지만 읽어 봤을 뿐인데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한서대학교병원, 세비린스병원, 가하종합병원…….」

    계속 넘겨도 온갖 종합 병원의 이름이 거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쫙쫙 그어 어떤 병원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들도 있었다.

    계속 나열된 병원 이름들은 몇 페이지 넘기니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뭐야.”

    한이진, 어디 아픈가? 병원 이름은 왜 이렇게 많이 적어 놓은 거야?

    고개를 갸웃했으나 딱히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작은 수첩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후에 방을 이 잡듯이 뒤졌다. 옷장에는 입을 만한 옷들이 꽤 걸려 있었고, 주머니까지 싹 다 뒤졌으나 역시 건질 만한 정보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책장이었다. 심심한 제목의 책들을 감흥 없이 펼치다가 선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한쪽 구석에 손바닥보다 큰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손을 뻗어 가져오니 유명한 브랜드의 태블릿 피시였다.

    그런데 상자도 까지 않은 새 태블릿 피시들이 몇 개나 쌓여 있었다. 같은 브랜드지만 버전은 달랐다. 아마도 새 버전이 나오는 족족 사 모았던 모양이었다.

    “태블릿 피시 성애자야, 뭐야?”

    태블릿 피시 상자들을 툭툭 치며 허공에 물었다. 이렇게 좋아서 사 모아 놓고서는 쓰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왠지 찝찝한 기분에 머리를 벅벅 긁고는 태블릿 피시들을 다시 선반에 돌려 놓았다. 하여간 돈지랄이다. 쓰지도 않을 거 이렇게 새 버전 나올 때마다 사서 전시해 놓다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B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이진의 목숨을 보장해 줄, 각성자의 능력.

    이 몸에 빙의한 나 역시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상태 창을 불러 봐야 하겠지.

    “…….”

    어떻게 하면 나오려나.

    속으로 한 번 외쳐 볼까?

    상태 창!

    상태 창?

    상태 창 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리를 내 불러 보기로 했다. 밖에 이든 놈이 있을 테니 흠흠, 헛기침하고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상태 창.”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 창?”

    허공을 휘휘 저으며 물었으나 역시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뭐야, 부르면 자동으로 나오는 거 아니었어?

    설마 내가 한이진이 아니라서 능력을 쓰지 못하는 건가?

    덜컥 겁이 나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상태 창? 상태 창 님?”

    시발, 왜 안 나와!

    “아씨, 나와! 나오라고! 상태 창!”

    이 새끼야!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결국 납작 엎드리며 빌기까지 했다.

    “잘못했어요. 제발 나와 주세요. 상태 창 님.”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이발…….”

    대체 뭐가 문제일까.

    역시 영혼이 달라서 능력을 쓰지 못하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B급의 능력이라도 없으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난다 긴다하는 능력자들 사이에서 내 목숨을 부지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똑똑.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방 안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니,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진아, 괜찮아? 문 좀 열어 봐.”

    “…….”

    저 개같은 감시자 새끼.

    순간 화가 난 나는 문을 열고 이든 놈의 정강이를 발로 차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가슴이 쿵쿵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묘한 감정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나는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휙 열었다.

    “어? 이진아.”

    “…….”

    무표정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이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A급 능력자답게 희미한 살기에도 몸이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날렸다. 정확히 이든의 정강이를 향해서.

    빡!

    “악!”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이든이 정강이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걸 내려다보는 내 귀로 웃음기 하나 없는, 마치 뉴스 아나운서 같은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버 접속 완료. 동기화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뭐?”

    이렇게 갑자기?

    당황한 내 귀에 딱딱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동기화를 진행하시겠습니까?]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세계의 능력자 서버에 접속하게 된 모양이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바라던 일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진행해!”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동기화율 1%……]

    [동기화율 5%……]

    “으으윽.”

    귓가에 들리는 소리를 담담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있었지. 갑자기 때렸는데 이번에야말로 화내려나?

    경계하며 바라보는데, 이든 놈이 휙 고개를 들었다.

    “하아, 최고야……. 더 때려 줘.”

    “…….”

    뭐래, 이 또라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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