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47화>
[정다운이요? 크르륵. 여전하더군요. 잘 먹고 잘 자고. 뭐, 땅도 여전히 잘 파고요.]
지구에서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던전 게임으로 복귀한 루갈은 정다운은 잘 지내냐는 에르테아의 인터뷰(?)에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직접 가서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군요. 지구의 격이 얼마나 하찮은지. 크륵.]
루갈은 이제 정확히 알게 되었다. 아무리 빈 화분이라 해도 이계의 세계수들이 왜 그렇게까지 우르르 몰려와 지구를 침략하고 있는지를.
결국엔 지구가 그냥 만만해서였다.
[애당초 인간들의 격도 낮을뿐더러, 격이 높았던 기록조차 한낱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권능을 잃어버린 나약한 세계. 그곳이 바로 지구의 현 상태였습니다. 결국엔 먼저 주워 먹는 놈이 임자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은 적어도 지구에 더 이상 오빠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없다는 거네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르테아의 잔걱정을 한마디로 축약시켜 버린 루갈은 피식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있으면 또 어떻습니까? 분명 그 녀석이라면 또 어떻게든 해결할 텐데요. 정 안 되면 다 묻어 버리든가 하겠죠, 뭐.]
그러니 정다운의 안부보단 당장 오늘 저녁 메뉴를 뭐 먹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이로운 고민일 것이었다.
루갈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르테아가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해 왔다.
“그럼 다른 귀환자들은요? 류승우 님이라든가, 오빠의 동료들은 어떻게 지내던가요?”
[크륵? 다른? 흐음. 그러고 보니 다른 일행들은 어디 갔는지 통 안 보이더군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받자 루갈은 잠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역시나 전혀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정다운 때문에 존재감이 옅어지긴 했지만, 그의 동료들도 사실은 엄청난 전사가 되어 지구로 귀환하지 않았던가.
경험이 미천한 것도 아니고, 어지간하면 무사할 것이었다.
오랫동안 인간들을 지켜봐 온 루갈은 그들의 다음 행보를 적당히 추측해서 에르테아에게 말해 주었다.
[크흠. 인간들이란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다들 정다운처럼 가족들부터 만나고 있겠지요.]
그리고 그의 추측은 실제로도 정답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절반쯤은.
* * *
류승우에겐 가족이 없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사춘기 시절의 대부분을 태권도장에서 보냈다.
보육원과 인연이 닿아 있던 태권도 관장이 그의 사정을 가엾이 여겨 학원비 전액을 특별히 면제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관장은 행여나 류승우가 자존심이 상할 것을 걱정해 본인에게는 정작 다른 핑계를 댔다.
‘승우야, 너 태권도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별다른 꿈이 없으면 태권도를 본격적으로 해 보는 게 어떠냐.’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
‘어. 그것도 아주 천부적인 재능이 느껴져. 그러니까 별다른 꿈이 없으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너 대학 붙으면 내가 우리 도장에서 사범도 시켜 줄게.’
‘……’
재능.
그딴 모호하고 추상적인 핑계 따위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태권도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시의 류승우에겐 그냥 어딘가에 마음껏 미쳐 버릴 것이 필요했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그의 안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으니까.
그 공허한 빈자리를 무엇이 됐든 꾸역꾸역 채워 넣고 싶었다.
‘……뭐, 사춘기였으니까.’
류승우는 그렇게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불살라 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자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재능이라고?
처음엔 고작 핑계에 불과했던 관장의 말을 그는 기어코 진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류승우에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태권도에 대한 재능은 아니었다.
그는 지독한 외골수였으며, 끝내주는 독종이었다.
류승우는 결국 태권도로 유명한 한국대학교 태권도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의 계획대로 학교를 다니면서 태권도장의 사범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태권도를 배우는 제자들에게 좋은 사범이 되었으며, 동시에 엄격한 스승이기도 했다.
융통성이 없고 너무 외골수라 재미없다는 얘기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존경스러운 사범님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던 류승우는 어느덧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태권도장에서 자신들이 키워 낸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류승우가 지구로 귀환하자마자 가장 먼저 태권도장부터 찾아간 이유였다.
‘창조 태권도’
괴물들에게 물어 뜯겨 금이 간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는 태권도복을 입은 채 건물에 고립되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류승우는 손을 뻗었다.
“뇌전이여.”
콰르릉!
마른하늘에 천둥이 내리쳤다.
다음 순간 태권도장을 위협하고 있던 모든 괴물들이 새까만 재가 되어 쓰러졌다.
“사범님!”
“류승우 사범님!”
놀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제자들을 보며 류승우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안아 주었다.
“다들 무사하니?”
* * *
“나는 여기 남을게.”
류승우는 결국 동료들과 떨어져 태권도장에 잔류하기로 했다.
“괴물들에게 부모님을 잃은 제자들이 너무 많아. 그리고 살아남은 제자들이 더 있는지 찾아서 구해줘야겠어.”
고아로 자라 왔던 류승우였기에 부모를 잃은 제자들의 모습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동료들도 굳이 말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구호열과 윤진수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의 가족들을 찾아서 흩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여기 괴물들의 수준이 너무 약해서 우리가 같이 뭉쳐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맞아요. 이쯤에서 서로 흩어져서 집에 다녀오는 걸로 해요. 무슨 일 생기면 귓말로 연락하고요.”
“그러자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가족들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홀어머니와 둘이 산다던 구호열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구호열 : 가까스로 어머니를 찾아냈어. 사람들과 함께 대피소에 모여 계시더라고. 어머니가 조금 다치시긴 했는데 이만하면 감사한 일이지.>
그리고 윤진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윤진수 : 나도 가족들과 만났어요! 아버지가 각성자가 되셨더라고요. 나랑 다른 타이밍에 던전에 불려 가셨었나 봐요.>
오동민과 지서연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오동민 : 저는 저희 누나가 각성자가 됐던데요? 누나가 저 보자마자 왜 이렇게 뚱뚱해졌냐고 놀리다가, 다이어트 스킬 보여 주니까 너무 부러워하네요. 으히히.>
<지서연 : 저는…… 던전에서 죽었던 남자 친구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던전에서의 기억을 잃은 게 조금 아쉽지만요.>
다행히 지서연의 가족들도 무사한 것 같았다.
애써 귀환했더니 가족들이 이미 죽어 있더라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죽지 않았을 뿐이지 다친 이들은 많았다.
집과 재산을 다 잃고 괴물들에게 쫓기던 가족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루라도 더 늦게 귀환했어도 얼굴을 못 볼 뻔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류승우와 동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을 열심히 구해 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도 함께 구해 주었더니, 그들의 활약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인류의 구세주.
최강의 귀환자들.
어느덧 그들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별명이 생겨나 있었다.
종말의 시대에서 그들의 존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었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들의 귓가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시작은 류승우였다.
“뇌전이여!”
콰르릉!
콰쾅! 쾅!
푸른 섬광에 휩싸여 괴물들을 압살하던 전장의 화신 류승우는 갑자기 전투 중에 이상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기록 <천둥의 신>이 뇌전의 기사 류승우를 후원합니다.]
“……누구라고? 후원이라니?”
처음엔 류승우도 던전 게임에서 익숙하게 들어 왔던 세계수의 시스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류승우가 전투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속삭여 왔다.
[기록 <천둥의 신>이 류승우의 푸른 뇌전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니까?”
[기록 <천둥의 신>이 자신은 허공에서 태어난 신의 기록이라고 으스댑니다.]
“신의 기록? 그건 또 뭐지?”
류승우는 갑자기 나타나 속삭이는 천둥의 신을 경계했다.
게다가 놈의 대화 방식이 대부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형태여서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기에 더욱더 신뢰가 가지 않았다.
[기록 <천둥의 신>이 앞으로 류승우의 활약을 기대한다고 응원합니다.]
“네가 내 활약을 왜 기대하는데? 혹시 동료들에게도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기록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나빴다.
류승우가 습관적으로 용의 사도들의 단톡방에 귓말을 보내려 하자, 갑자기 천둥의 신이 불쾌한 티를 냈다.
[기록 <천둥의 신>이 본인 외의 다른 이들에게 귓말을 듣는 것을 불쾌해합니다.]
“……뭐?”
그 순간 갑자기 류승우의 귓말이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마치 허공에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 황금빛 문자들을 도중에 흩어 버린 느낌이었다.
“뭐야? 왜 갑자기 귓말이 안 되는 거야?”
류승우는 크게 당황했다.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유일한 수단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래서는 정다운이 지구에 돌아오더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류승우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기록 ‘전쟁의 여신’이 지서연의 화려한 전투를 보며 즐거워합니다.]
“전쟁의 여신이라고? 당신은 누구세요?”
지서연에게도 또 다른 이름의 신의 기록이 찾아왔다.
전쟁의 여신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가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지서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일방적인 통보가 들려왔다.
[기록 ‘전쟁의 여신’이 제국창술의 달인 지서연을 후원합니다.]
“……!”
파아앗!
그리고 그 순간 지서연이 들고 있던 창에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기운이 깃들었다.
* * *
“후원이라는 게 대체 뭔데? 바라는 것 없이 베풀기만 한다고? 너무 수상하잖아.”
류승우가 천둥의 신을 경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제대로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네가 후원하는 힘을 나는 거절하겠다.”
류승우는 어차피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 없었다.
어차피 던전 게임에 비하면 지구의 난이도는 턱없이 낮았으니까.
설마 류승우가 자신의 힘을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천둥의 신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기록 ‘천둥의 신’이 류승우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라고 해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