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44화>
* * *
최민서는 걸어서 신기루 도시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크고 두꺼운 오프로드 타이어.
각지고 튼튼한 강철 보디.
짐 가방과 연장통이 적재된 오픈형 트렁크.
사막 여행에 최적화된 이 빨간색 지프차는 요즘 최민서가 가장 애장하는 물건이었다.
최민서는 프랑스를 빠져나온 뒤부터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해 왔다.
주로 길에 버려진 주인 없는 차를 주워 타곤 했는데, 기름이 떨어지면 또다시 새로운 차를 찾아서 갈아타곤 했다.
하지만 이 빨간 지프차를 구한 뒤부턴 다른 차를 구하지 않고 있었다.
때마침 운 좋게 주유소를 발견해서 여분의 기름까지 구하자, 차를 바꿀 이유가 사라지기도 했고.
아무튼 신기루 공작은 그 빨간 지프차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그 차의 트렁크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척척. 처척. 철컥.
최민서는 트렁크에서 자꾸 무언가를 꺼내서 바닥에 설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처음엔 그냥 납작한 널빤지인 줄 알았는데, 이리저리 접히고 펼쳐지더니 간이 테이블이 되었다.
그 옆엔 어느새 안락해 보이는 낚시의자가 놓여 있었고.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캠핑용 버너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보글보글.
어디서 구했는지 몹시 엔틱하고 진귀하게 생긴 주전자에서 빨갛고 영롱한 홍차가 끓고 있었다.
쪼로록.
“마셔.”
“…….”
최민서가 따라 준 홍차를 엉겁결에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게 된 신기루 공작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이들과 싸울 의욕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최민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너처럼 겉모습을 속이거나 주변과 동화하는 부류의 하수인들은 주로 호전적이지 않더란 말이지. 말을 섞어 보면 의외로 대화도 통화는 편이고.”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보통 그런 통계까지 낼 정도로 하수인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신기루 공작은 생각했다.
그 전에 죽을 테니까, 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 신기루 공작의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 최민서가 건네준 홍차에 머물러 있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다 결국 그가 용기를 내서 최민서에게 물었다.
“이 홍차 혹시…… 세계수로 우려낸 건가요?”
“맞아. 그걸 알아보네?”
“……와, 진짜였네. 설마설마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세계수의 열매껍질을 말려서 우린 거야.”
“…….”
최민서는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치 사과 껍질을 말려서 차를 끓여 봤어요, 라는 듯한 느낌.
그 순간 신기루 공작은 완벽하게 모든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납득해 버렸다.
“이제야 알겠군. 세계수를 잃은 하수인이 어떻게 해서 스스로의 주인이 된 건지. 네 녀석, 세계수의 열매를 먹은 건가?”
[흐응, 제법 똘똘한 녀석이었잖아?]
옆에서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홍차를 마시던 바토리가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맞아. 이 홍차의 재료는 열매의 껍질이지. 그리고 그 알맹이는 내가 다 먹어 치웠어.]
“……!”
새초롬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바토리를 보며 신기루 공작은 충격에 빠졌다.
세계수의 열매란 그야말로 세계수가 만들어 낸 에테르의 정수였다.
생명 에너지가 고도로 압축된 로열젤리와도 같았다.
물론 세계수의 형태가 매번 나무처럼 생긴 건 아니듯이, 열매 또한 마찬가지로 무조건 열매처럼 생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 따위는 그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
세계수를 나무라고 인식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곧 나무였으며, 거기서 맺힌 힘의 정수 또한 열매로 인식하는 순간 과즙을 머금은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수들은 보통 그 열매를 사용해서 ‘기록’에 생명력을 부여하거나, 신의 권능이나 가호를 흉내 내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을 펼치곤 했다.
열매의 힘은 실로 대단해서, 행여나 그걸 인간이 먹었다간 그 힘에 못 이겨 절명하고 말 것이었다.
혹은…… 초자연적인 잠재력을 강제로 각성하게 된다거나.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계수와 가까운 존재인 하수인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
먹을 수도 있고, 그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열매를 아주 많이 먹게 된다면?
[그러면 세계수 따위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게 되지. 물론 약간의 제약은 있지만. 후훗.]
아까는 고급 정보를 순순히 알려 주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또 넙죽 말해 주는 변덕쟁이 바토리였다.
“아니, 잠깐.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열매를 어떻게 먹어? 하수인이 세계수의 의지에 반역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잖아!”
신기루 공작은 내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건 금기도 뭣도 아니고, 그냥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계수의 하수인 따위가 세계수가 가장 아끼는 열매를 먹다니!
“그런 일이 감히 허락될 리가!”
신기루 공작 본인도 이 말을 듣기 전까진 감히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제발 알려 달라는 표정이네? 언니, 어떡할까요?]
바토리가 최민서에게 결정권을 넘기자, 신기루 공작의 뜨거운 시선도 자연히 최민서에게 향했다.
최민서는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나 슬슬 배고픈데, 혹시 여기에 신기루 환상 말고 진짜 식량은 없어?”
“드,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찾아올게요!”
“사막을 뒤져 보면 뭐라도 있을 겁니다!”
대답과 동시에 온 사방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는 수백 명의 신기루 공작들이었다.
최민서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착한 아이들이었잖아? 전부는 됐고, 차에 실을 만큼만 찾아와 봐. 상한 건 가져오면 안 된다?”
“넵!”
신기루 공작들은 말 잘 듣는 아들들처럼 사막 곳곳으로 심부름을 떠났다.
* * *
최민서의 트렁크를 식량으로 가득 채워 주고 나서야 신기루 공작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순서가 중요해.]
알고 보니 원리는 간단했다.
하수인이 먼저 세계수를 공격하거나 세계수의 열매를 훔쳐 먹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귀환자들과 각성자들이 먼저 세계수를 공격하게 해야지. 우리는 구경만 하다가 열매만 챙기고.]
세계수라고 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개체에 따라 힘의 우위도 다르고 능력의 종류도 천차만별이었다.
게다가 제약도 있었다.
여기가 자신들의 세계였다면 모를까, 적어도 지구에서는 본신의 힘을 대부분 쓰지 못하는 게 보통이었다.
행여나 본신의 힘을 지구로 끌어왔다간 도리어 자신이 떠받치고 있는 본래 세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이계의 세계수들은 지구의 기록을 베껴 쓰거나 지구의 생명체들에게서 얻어 낸 생명 에너지만으로 지구에 영향력을 끼치곤 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이라면, 인간들만으로도 세계수에게 타격을 입히는 게 가능하긴 했다.
어부지리 효과도 있었다.
[마침 유럽은 지금 세계수들이 너무 많아서 자기들끼리도 경쟁하느라 정신없거든. 그 과정에서 힘이 약해진 세계수를 인간들이 공격하면? 생각보다 쉽게 세계수가 소멸하기도 한다고.]
가뜩이나 유럽은 좁은 땅덩어리에 비해 쓸 만한 기록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기록은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
거기 나오는 기록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신’에 대한 전설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럽의 세계수들은 영역 싸움을 위해 ‘신’에 대한 기록들을 마구잡이로 베껴 쓰기 시작했어. 그 결과는 물론 파국이었지.]
“설마…… 터키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게 그 때문이었나.”
[맞아. 지금 유럽의 세계수들은 시시각각 공멸하는 중이야. 그 싸움이 서로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시작된 전쟁을 중간에 멈출 방법이 없나 봐.]
그리고 그 전쟁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세계수들의 잔당이 요즘 다른 대륙으로 대피하려다 보니 터키를 지나가는 중이라는 말이었다.
[애꿎은 터키만 불쌍하게 됐지 뭐. 그래도 유럽보단 여기가 평화로운 편이란다? 지금 유럽은 진짜 지옥이야. 인간들에게도 세계수들에게도.]
“……그래서 네 주인이었던 세계수는 지금 소멸한 건가?”
[아니. 소멸까진 아니고, 엄청난 피해를 입고 원래 세계로 간신히 도망쳤어. 지구에 뿌리를 내렸던 자신의 뿌리들을 다 잘라 내고 튄 거지.]
“너는 거기서 세계수의 열매를 얻었고?”
[열매를 얻은 건 내가 아니야. 애초에 나는 만지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열매를 찾아낸 사람은 민서 언니야.]
키이잉-!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바토리와 신기루 공작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돌아갔다.
한창 최민서는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많은 식량이 생겼으니 보관함이 추가로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키이이잉! 크드득!
드르륵! 쾅쾅 쾅!
최민서는 신기루 공작이 구해 온 목재를 한쪽 발로 질끈 밟고, 체인톱으로 슥슥 썰어 널빤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충 붙여서 못을 몇 번 박았더니.
“짠, 완성!”
뚜껑이 열리는 나무 보관함이 뚝딱 완성되었다.
“크으. 봤어? 눈대중으로 대충 만들었는 데도 이렇게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거? 이런 게 실력이지!”
[꺄하항, 언니 너무 멋있어요!]
혼자 우쭐하며 으스대는 최민서의 모습을 바토리가 진심으로 황홀한 표정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어는 자신이 느끼는 이 벅찬 감동을 신기루 공작에게도 전파해 주기까지 했다.
[야, 방금 봤어? 언니가 톱질하실 때 손등에 돋아난 핏줄! 하응, 진짜 너무 좋아! 내 인생은 민서 언니를 만난 전과 후로 갈린다고!]
“그래 봤자 저분은 그냥 평범한 인간…….”
조용히 대꾸하던 신기루 공작은 자신을 표독하게 노려보는 바토리의 눈빛에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바토리가 속사포처럼 신기루 공작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 그래, 맞아. 언니는 분명 평범한 인간이지! 세계수의 열매껍질로 만든 홍차를 마셔서 체력이 빨리 회복되는 게 고작이라고. 심지어 내 주인이었던 세계수를 해치운 것도 언니가 아니라, 언니의 일행이었던 각성자들이었고. 하지만! 하아…….]
갑자기 말을 멈춘 바토리가 갑자기 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쯤 되면 좀 무섭…….”
신기루 공작이 뭐라 하건, 바토리는 이미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때마침 최민서가 식량 보관함의 경첩의 각도를 다듬기 위해서 꺼내 든 ‘펜치’를 발견하는 순간 바토리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래, 바로 저 펜치였어.]
바토리는 떠올렸다.
자신이 최민서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그날의 벅찬 감동을!
최민서의 일행이었던 각성자들과의 전투 끝에 사로잡히게 된 바토리.
그녀는 마침 각성자들에게 피해를 입어 신체 능력이 일시적으로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사실 거기서 한 대만 더 맞았으면 바토리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터였다.
여느 흡혈귀들처럼 한 줌의 재가 되어 흩날릴 운명이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헤이, 가이즈. 친구들아, 잠깐만? 걔 죽이기 전에 내가 뭐 하나만 확인해 보면 안 될까?’
바토리의 정체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평범한 인간 최민서가 갑자기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장통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녀가 그 안에서 꺼낸 건 바로 저 펜치와 바이스…….
‘애기야, 입 좀 벌려 볼래?’
‘으아?’
쩌억.
어머니처럼 자상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바토리의 입이 강제로 벌려졌고.
그 사이에 ㄷ자로 생긴 바이스가 물려졌다.
졸지에 치과에 온 손님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 바토리.
그러자 그녀의 입속에 있던 흡혈귀의 힘의 원천인 사납고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걸 보며 최민서는…….
‘히야! 라인 진짜 잘빠졌네?’
더없이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들아, 이거 뽑으면 무기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잘 깎아서 액세서리라도?’
‘헤이, 최민서! 그냥 솔직히 말해. 당신 그냥 갖고 싶은 것뿐이지?’
‘오해야! 잘 생각해 봐! 이런 맵시면 최소한 낚싯바늘로라도 쓸 수 있다고!’
‘아니, 누가 세상이 종말한 마당에 낚시할 생각을 하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바토리였다.
[그래, 바로 저 펜치였어. 언니는 그날 내 송곳니를 전부 뽑아버렸어. 하응, 그때 내가 느꼈던 전율과 공포는 정말이지……. 언니는 정말 최고야!]
“그거 그냥 스톡홀롬 증후군…….”
신기루 공작은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바토리는 격하게 부정하며 말했다.
[그딴 식으로 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매도하지 마. 내가 어떻게 열매를 먹었는지 물어봤었지? 언니가 나에게 먹여 준 거야. 저번에 멋대로 송곳니를 뽑아서 미안했다고. 뭐라더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던가?]
“그건 그냥 병 주고 약 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각성하고 말았지. 격이 오른 거야.]
“……!”
옆에서 내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신기루 공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각성.
세계수의 ‘하수인1’에 불과했던 피의 백작 부인 바토리는 세계수의 열매를 흡수하고 격이 올라 버렸다.
주인을 잃은 기록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실체 없는 기록 따위가 이 세상에 현현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영원히 귀신처럼 허공을 떠돌지 않으려면, 허공과 현실을 이어 줄 매개체가 필요했지. 말하자면, 일종의 영매야.]
그래서 바토리는 선택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살아생전 자신에게 가장 큰 임팩트를 안겨 주었던 평범한 인간에게 자신의 기록을 의탁하겠다고.
[후후. 다시 소개할게. 나는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 그리고 동시에…….]
바토리의 모습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점점 흐릿해지며 실체를 잃어 갔다.
그리고 반투명한 영체가 되어 마침 작업을 끝마친 최민서의 등 뒤로 다가가 자리 잡았다.
마치…… 수호령처럼.
[평범한 인간 최민서를 후원하는 자유 기록 <피의 백작 부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