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88)화 (388/393)

<던전리셋 외전 43화>

*   *   *

“손님이라고?”

허망한 표정으로 두런두런 대화를 하고 있던 신기루 공작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런 곳까지 손님이 찾아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세계수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꽁꽁 숨겨 둔 은신처에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탁 트인 사막 한가운데라서 모든 길목을 차단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누굴까? 설마 다른 세계수들의 하수인은 아니겠지?”

“아니야. 에테르는 평범해.”

“그럼 평범한 인간이라는 말이야?”

“신기하다.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여길 찾아 들어온 거지?”

“설마 우연히 들어왔나? 그게 가능해?”

의문이 가득했지만,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일단 손님은 손님이니까. 현혹시킨 뒤에 어떤 경로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는지 물어보자.”

“그래. 그리고 그 경로까지 은폐시키면 우리의 은신처는 더욱 안전해질 거야.”

“딱이네. 좋은 계획이야.”

씨익.

“그럼 손님을 맞이해 보실까?”

신기루 공작들의 입가에 일제히 영업용 미소가 떠올랐다.

“탐색. 모래의 기억.”

휘오오오!

신비로운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래의 기억 속에서 저 불청객이 가장 바라는 모습을 탐색해 나갔다.

“후후. 나는야 신기루 공작. 고객 맞춤 서비스를 최고로 여기는 호텔 지배인이지.”

오랜만의 손님이라 신기루 공작도 약간 설레었다.

과연 저 손님은 자신에게서 어떤 모습을 보기를 원할까?

강아지상의 풋풋 상큼한 미소년?

중후하고 젠틀한 꽃중년?

뭐든 상관없다. 저 여인이 무엇을 바라든 자신에겐 능히 그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사라락!

“음하하! 나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낯선 이여!”

만반의 준비를 갖춘 신기루 공작이 드디어 은신처에 발을 들인 여인의 앞에 등장했다.

“어머?”

그를 마주한 순간 여인의 표정도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활기차게 손을 흔들면서 신기루 공작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철물점 아저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휴, 마침 잘됐네! 락카 좀 남는 거 있어요?”

“……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신기루 공작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쭈뼛!

“……!?”

신기루 공작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멈춰라, 이 악마야!”

덜컥.

그 순간 여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인의 등 뒤에서 흐릿하고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설마 내가 보이니? 너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유, 유령!?”

[무례하기는. 나더러 유령이라니?]

묘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다. 

신기루 공작에게 코웃음을 치던 아지랑이가 이번엔 자신의 곁에 있는 여인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언니, 아무래도 다가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에이, 그럼 그렇지. 좋다 말았네. 하긴 프랑스에 계실 철물점 아저씨가 갑자기 여기 나타난 게 이상하긴 했어.”

[그러니까요. 역시 언니는 현명하세요. 그래도 저런 싸구려 현혹에 넘어가지 않으신 건 제 가호 덕분인거 아시죠?]

“그래. 고마워, 바토리.”

[으흥, 별말씀을요.]

여인의 말이 황송하다는 듯 아지랑이는 몸을 배배 꼬았다.

신기루 공작은 자신을 버젓이 앞에 두고 이어지는 둘의 태평한 대화에 점점 더 경계심이 커져 갔다.

“큭!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구나!”

“여길 찾아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너희는 대체 누구냐!”

스르륵.

같은 얼굴을 한 신기루 공작들이 계속 증식되며, 여인의 주위를 점점 포위해 나갔다.

그 숫자가 무려 100명이 넘어가자, 여인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와,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철물점 아저씨가 점점 많아지잖아?”

[흐응.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하수인이네요.]

태평하기는 여전했다.

“큭! 하수인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는 건, 역시 너희도 세계수의 하수인들이었구나!”

[무례한 것.]

오싹!

그 말에 갑자기 아지랑이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엄청난 살기가 신기루 공작을 향해 쏟아졌다.

[누구더러 감히 하수인이라는 거야? 나 바토리가 너처럼 미천한 종짓을 할 것 같아?]

“……손님맞이는 끝났군.”

신기루 공작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즉결 처분이다.”

파바밧!

100명의 신기루 공작들이 일제히 아지랑이와 여인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때였다.

“바토리.”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줄 알았던 중년 여인, 최민서의 눈이 번뜩인 건.

[저 부르셨어요?]

“나와. 전투다.”

[네, 언니!]

슈와악!

흐릿했던 아지랑이가 엄청난 피바람으로 변해 최민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큭. 뭐냐, 이 기운은!”

당황하는 신기루 공작들.

“뭔가 이상해!”

“이건 평범한 세계수의 하수인이 아닌 것 같은……!”

[그러게 하수인 따위가 아니라고 했지?]

슈와악!

새빨간 피바람이 하나로 뭉쳐지더니 화려한 레이스를 펄럭였다.

고혹적이고 귀품 있는 드레스.

흑갈색의 머리를 올려 묶은 앳된 소녀가 최민서의 앞에 나타났다.

척.

[나는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 세계수에게서 벗어나 스스로의 주인이 된 허공의 기록이란다.]

“뭐, 뭐라!?”

도도한 미소를 짓는 바토리가 하는 말에 신기루 공작들이 일제히 눈을 휘둥그레 떴다.

*   *   *

엘리자베스 바토리.

피의 백작 부인 바토리의 전설은 한때 유럽 전역을 뒤흔든 너무나도 유명한 기록이었다.

그것이 심지어 실화에 기반한 기록이기에 더욱더 유명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모함인지 그것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세간에 알려진 내용은 일단 이러했다.

‘612명의 처녀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피로 목욕을 한 희대의 연쇄 살인마!’

그리고 더 소름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잔혹한 살인의 목적이었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1560년. 루마니아의 북서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타고난 금수저였다.

사촌오빠가 헝가리의 왕.

외삼촌은 폴란드의 왕.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부와 명예를 떠안고 자란 바토리는 15살에 헝가리의 귀족과 결혼했고,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뒤 헝가리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갖게 되었다.

허영과 사치.

그것은 바토리에겐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으며, 바토리는 언제나 그 이상을 갈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수를 한 하녀를 징벌하다가, 하녀의 피가 바토리의 몸에 튀었고.

바토리는 그 피에 닿은 피부에 일시적으로 주름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바토리가 순결한 처녀들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하며,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결국 그녀의 잔혹한 살인은 고작 6년 만에 무려 612명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어냈고, 결국엔 체포되어 종신구금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 죄목은 ‘마녀’.

바로 사람의 피로 흑마법을 일삼았다는 내용이었다.

영원한 젊음을 꿈꾸던 바토리가 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뱀파이어였다.

그렇다. 

루마니아의 왕족으로 태어나 뱀파이어가 되기를 소망했던 엘리자베스 바토리에 대한 기록.

그 기록은 그녀가 살았던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악랄한 전설이었으며, 헝가리에 나타난 이계의 세계수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세계수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헝가리를 지나가던 최민서를 만나게 되었다.

[그럼 언니, 저 잠깐만 다녀올 게요? 언니는 뒤에서 쉬고 계세요.]

화려한 피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 바토리는 지금 최민서를 향해 수줍은 표정으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익숙한지 최민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넹.]

발랄한 대답과 함께 바토리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빙글 돌린 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롭게 덧씌워진 표정은 바로 경멸이었다.

[숫자만 가득한 것이 꼭 벌레들 같구나. 벌레는 박멸해야지. 징벌의 채찍.]

“……!”

촤아악!

바토리의 우아한 손짓에 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 소용돌이는 허공에서 수많은 채찍으로 변해 덤벼드는 신기루 공작들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콰앙!

징벌의 채찍에 맞은 신기루 공작들은 피에 젖은 모래가 되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바토리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낸 신기루 공작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바토리에게 들은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말도 안 돼! 기록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수인이 세계수에게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할리가!”

바토리가 계속 피의 채찍을 휘두르며 코웃음을 쳤다.

[흐응?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내 주인이었던 세계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걸?]

“……!”

그렇구나!

신기루 공작은 마침내 바토리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설마 너는 세계수들의 영역 싸움에서 패퇴한 세계수의 하수인이었던가!”

[그래도 대가리는 돌아가네? 모래 머리 주제에.]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주인을 잃은 기록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리 없는데!?”

빠른 속도로 숫자가 줄어들어 가면서도 계속 질문을 해 오는 신기루 공작들.

그 모습에 바토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가 봐? 당하는 척 연기하면서 정보를 캐려는 걸 보면?]

우뚝.

그 순간 내내 당혹해하던 신기루 공작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이 일제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들켰네.”

“내 연기력이 좀 어설펐나?”

“누구야? 누가 표정 연기 실패했어?”

“아무튼 대답이나 해 주지?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한 거야? 주인을 잃은 기록 주제에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한 거야?”

[어머나, 당돌한 아이네. 그런 고급 정보를 내가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아?]

화려한 부채로 입을 가리며 살풋 웃는 바토리의 모습은 앳된 외모인데도 불구하고 귀품이 넘쳤다.

그 여유로움이 아니꼬운 신기루 공작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꼬맹이 주제에 누구더러 아이라는 거지? 그럼 실력 행사로 불게 해야겠구나.”

슈파파팟!

그 순간 그의 분신들이 아까보다 두 배로 늘어났다.

그 숫자는 무려 200명.

[아직 부족해.]

이제 300명.

[고작?]

계속해서 증식하는 그의 모습에도 바토리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612명까지 채우면 말하렴. 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거든.]

사방에서 몰려드는 신기루 공작들을 향해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가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길고 치열한 전투 끝에 신기루 공작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만! 이제 그만하자고!”

[어머나, 벌써 끝난 거야? 나는 더 할 수 있는데?]

“그래, 내가 졌다, 젠장! 여기서 더 싸웠다간 다른 세계수들에게 이곳이 들킬 것 같아! 그만할래!”

[흐응. 무기력한 아이네. 어떻게 할까요, 언니?]

바토리가 최민서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그녀를 쳐다봤다.

바토리의 결계에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던 최민서는 이미 그곳에 살림을 차린 뒤였다.

호로록.

“그래? 다 싸웠으면 와서 홍차나 마셔. 먼지 좀 그만 날리고.”

[네엥!]

바토리는 돗자리를 펼치고 그 위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는 최민서를 향해 발랄하게 달려갔다.

“뭐해? 너도 와야지?”

“나, 나도?”

신기루 공작은 갑자기 최민서가 자기까지 부르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자 바토리가 피식 웃으며 그를 재촉했다.

[뭐해? 우리 언니가 오라잖아? 대신 한 놈만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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