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87)화 (387/393)

<던전리셋 외전 42화>

*   *   *

뽀뀨는 어둠에서 태어난 흑요정 모나카에게는 천적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 뽀뀨가 먹어치운 정화된 뼛가루의 양을 생각해 보라.

가뜩이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대부분을 먹는 데만 투자하는 이 토실토실한 은빛 날다람쥐는, 이젠 몸속에 피 대신 정화 스킬이 흐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터질 듯 빵빵한 양쪽 볼때기 속에는 아직 소화도 안 된 싱싱한(?) 정화된 뼛조각이 언제나 신성한 부적처럼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

모나카가 뽀뀨를 처음 보자마자 ‘신수’라고 오해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듯 상극이나 다름없는 뽀뀨의 곁에 모나카가 얌전히 붙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 또한 뽀뀨가 그녀에게 상극이기 때문이었다.

‘신기해. 이 털짐승 곁에 있으면 내 주변에서 스켈레톤들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역시 신수라는 걸까?’

몰랑몰랑.

모나카는 뽀뀨의 뱃살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흑요정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서 언데드가 저절로 소환되는 특별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뽀뀨가 옆에 있거나 정다운의 정화 스킬의 영역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언데드들이 소환되지 않았다.

천적의 존재로 인해 흑요정의 종족 특성이 강제로 차단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요즘 모나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이 평화로움이 낯설기만 했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내가 이렇게 태평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태어난 순간부터 저주받은 사령술사라며 용사들에게 쫓겨 다녔던 내가…….’

“뽀뀨?”

“아, 미안.”

상념에 빠져서 손이 또 멈췄더니 뽀뀨가 결국 잠에서 깨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만져 달라고 재촉하는 대신 볼에서 뼛조각 하나를 빼 들고 전투적으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욤욤욤……!

저 하찮고도 태평한 모습에 모나카에게는 더더욱 깊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할 것도 없는데 밭이나 갈아야겠다.”

모나카는 정다운에게 받은 작은 티스푼과 티포크를 주섬주섬 챙겨 앞마당으로 나갔다.

요즘 모나카의 소일거리는 아기 세계수 화분의 흙을 틈틈이 갈아 주는 일이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모나카는 티스푼을 삽자루처럼 티포크는 쇠갈퀴처럼 사용해, 화분의 흙을 골고루 뒤집어엎고 섞어 주었다.

이렇게 하면 세계수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모나카가 자진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비록 태생은 다르지만 흑요정은 기본적으로 세계수의 성장을 돕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좋은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으챠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한참을 밭 갈기에 열중하던 모나카가 오랜만에 허리를 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정갈하게 줄지어 갈려 있는 땅이 보였다.

가슴 뿌듯한 보람이 느껴졌다.

“휴, 한가롭네.”

모나카는 하루 일과를 마친 농부처럼 개운한 표정으로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먼 산을 바라봤다.

아니, 화분 밖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나만 한가롭나?”

쿠와아앙!

슈와아오오-!

화분 밖은 지옥이었다.

사막의 악몽이 강림해 버린 모래 지옥.

[앗! 저기 신기루 남작 튄다! 잡아랏!]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고, 미쳐 버린 토네이도가 사막의 모든 걸 집어삼킨다.

그 모든 참상 끝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모래 괴수 타이탄이 포효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계속 걸어! 절대 멈추지 말고 걸리적거리는 건 다 먹어 치워!”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한 이상 정다운은 폭주기관차가 되어 있었다.

다만 기관차가 너무 커서 탈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그리고 그다음이 터키였으니.

정다운은 어느새 목적지인 터키의 바로 앞, 시리아 사막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신기루 도시들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럴수록 타이탄의 크기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니, 그만큼 타이탄의 보폭도 빨라져만 가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더 커졌다간 사람들도 다 밟고 지나가게 될까 봐 나름 자제한 것이긴 했다.

“그림벨! 신기루에 갇혀 있던 사람들 찾아서 전부 하늘 공원에 태워서 날려 보내!”

미야옹!

[얏호! 신기루 남작 잡았음! 이번이 벌써 4마리째!]

토끼가 드디어 끝까지 반항하던 신기루 남작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여러 분신들을 거느리던 신기루 백작과는 다르게 신기루 남작은 본체가 하나였다.

“이게 대체…….”

엉겁결에 도망치다 잡힌 신기루 남작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정다운이 흡수한 신기루 백작은 그나마 전후 사정이라도 알고 당했으니 망정이지, 시리아의 신기루 남작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트럭에라도 치인 꼴이었다.

그리고 트럭 보조석쯤에 얻어 타고 있던 토끼가 기세등등하게 그녀를 협박했다.

[꽁꽁 뭉쳐서 바닷속에 빠뜨리기 전에 순순히 내 기록이 되셈!]

“헛!?”

사라락!

갑작스런 재앙에 당황하고 있던 신기루 남작은 재빨리 모습을 변신했다.

본능적으로 상대를 현혹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모습이…….

[으엥? 이놈들 패턴 진짜 단순하네요.]

하필이면 또 정다운의 어머니였다.

저 높은 곳에서 정다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헉. 이게 아닌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신기루 남작이 잽싸게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흠흠. 다운아, 잘 지내니? 나는 잘 지내.”

류승우로…….

[아니, 그런데 왜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는 안 변하는 거임! 나 무시함?]

갑자기 기분 나빠진 토끼가 발끈 화를 냈다.

사실상 정다운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만 있었고, 신기루 남작의 바로 앞에 있는 건 토끼였다.

하지만 신기루 남작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 토끼는 뭐야? 왜 속을 전혀 읽을 수 없지? 아니,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건가? 바라는 것도 없고?”

[……그런 무례한 생각은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이 똥멍청이얏!]

슈와악!

토끼가 부들부들 떨면서 가차 없이 신기루 남작을 기록으로 흡수했다.

[아잣! 이렇게 신기루의 기록 5마리째 획득!]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종말의 서에게 물었다.

[이제 됐음?]

[아니, 아직 한참 부족하다. 기록을 베끼려면 더 많은 기록의 조각을 모아야 한다. 아무래도 최소한 백작 수준은 되어야 제대로 베껴 올 수 있을 것 같구나. ㅇ_ㅇ]

[아놧! 아직도 멀었다고요? 남작의 기록 진짜 하찮네.]

속상해하는 토끼를 신기루 백작이 위로해 주었다.

“토끼 님, 걱정 마십시오. 터키에는 신기루 공작이 살고 있으니까요. 신기루 공작은 저보다도 훨씬 강력한 기록이랍니다.”

[오오! 터키, 터키! 역시 터키 뿐인가! 어쩐지 이름부터 친숙하다 했음! 님, 뭐해요? 빨리 갑시닷!]

토끼가 터키를 외치며 정다운을 재촉했다. 

정다운도 이제 드디어 목전까지 온 터키를 향해 타이탄을 조종했다.

그러다 문득 쑥대밭이 되어 버린 시리아의 사막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신기루들이 자꾸 승우 형의 환상을 보여 주니까 형들이 보고 싶어지네. 알파, 아직도 내 동료들한테서는 답장이 없어?”

<네. 용의 사도들에게서는 아무 귓말도 오지 않았습니다.>

“대체 뭐가 그렇게들 바쁘길래 아무 소식도 없는 거야?”

용의 사도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단톡방은 정다운이 지구로 돌아온 후부터 너무 조용해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다운 혼자 몇 번이고 귓말을 보내 봤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처음엔 바빠서 답장하기 힘든 거라 생각했다.

그다음엔 귓말을 보낼 생명 에너지가 없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괴물 한 마리만 잡아도 에테르가 되어 흩날리는 세상인데, 고작 대답 한 마디 하는 게 힘들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님 혹시 왕따 아님? 혹시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맛있는 거 먹고 있을지도 몰라요.]

이때다 싶어 약 올리는 토끼.

[지구 와서 용의 사도로 영입한 님네 아빠랑은 연락이 잘되잖아요? 님은 분명 왕따 당하고 있는 거임.]

계속되는 놀림에도 정다운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에이, 걱정해서 뭐해요? 상대는 류승우 님이라고요.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번개 치는 곳을 찾아보면 금방 만날 거임.]

“하긴 그렇겠지. 아무튼 이런 세상이니 다 같이 뭉쳐서 이동 중일 테니까.”

토끼의 말에 정다운도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착했다.”

어느새 타이탄의 거대한 발이 터키의 국경선을 넘고 있었다.

*   *   *

터키 공화국은 지형적으로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나라였다.

동쪽으로는 이란, 아르메니아, 조지아.

남쪽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북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불가리아.

북쪽에 있는 흑해를 건너가면 루미니아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등 정말이지 수많은 국가들과 맞닿아 있는 국가가 바로 터키였다.

이렇듯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지정학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해 주는 교차로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였다.

종말의 시작.

그와 동시에 터키를 둘러싼 수많은 나라에서 이계의 세계수들이 출현하였고.

놈들이 점점 성장해서 일정 수준 이상까지 자리가 잡히자, 점차 영역을 넓히기 위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필 그 중심에 끼어 있던 터키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이 온 사방에서 서로 다른 세계수들의 침략을 한꺼번에 감내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세계수들의 전쟁터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딱 그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던 신기루 공작은 완전히 동네북이 되었다.

기껏 사막 위에 세운 신기루 도시는 그 위세를 떨쳐 보기도 전에 모습을 숨겨야만 했다.

다른 사막에서는 인간들을 꾀어내기 위해 사용되었던 신기루의 환상이, 이곳 터키에서는 다른 세계수들의 눈에 뜨이지 않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큭! 공작인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사막 은밀한 곳에 도시를 세운 신기루 공작은 분통을 터뜨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서로 다른 편인 것도 문제였다.

삼파전, 사파전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이쪽도 참전했다간 남 좋은 꼴만 시켜 주는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더욱 깊숙한 곳에 숨어야 한다.” 

“그 의견에 찬성이다. 성장과 발전은 살아남은 다음에나 할 일이야.”

신기루 공작은 분신들과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정다운이 흡수한 신기루 백작은 분신들이 전부 같은 인격인데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신기루 공작의 능력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분신들마다 서로 다른 인격을 부여한 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게 뭔 차이냐고 묻는다면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너희들, 아니 우리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아 좋군.”

“그러게 말이야. 혼자였으면 대화 상대가 없어서 지루해 미쳤을 거야.”

그렇다. 신기루 공작은 혼자 놀기의 프로.

혼자여도 전혀 외롭지 않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눈물이……?”

또르륵.

공작의 눈에서 한 줄기 모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터벅.

“휘유. 여기 좋은 곳이 있었잖아? 좀 쉬었다 갈까?”

갑자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루 공작의 은신처에 낯선 손님이 발을 들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