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38화>
* * *
“당신의 어머니를 흉내 낸 건 진짜 죄송한데요. 이게 제 본능이라서요.”
스르륵.
신기루 백작에게서 최민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겨진 건 성별조차 알 수 없는 무개성적인 모래 인형이었다.
정다운이 물었다.
“본능이라고?”
“네. 손님께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셔서 어머니를 보여 줬을 뿐인데, 저를 나무라시면 저보고 어쩌라는 말인가요. 흑흑흑.”
헤실헤실 웃던 신기루 백작이 이번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눈에서 모래알로 이루어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영 기괴했다.
그 과장된 표정과 급변하는 태도가 영 꺼림칙하다며 토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얘 뭐임? 무감정한 인형이 인간의 감정을 어설프게 흉내 내며 연기하는 느낌인데요?]
“오, 정답! 바로 맞추셨어요! 손님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존재! 그게 바로 저 신기루 백작이랍니다! 음하하!”
이번에는 또 활기차게 웃으며 토끼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신기루 백작.
정다운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입은 쉴 새 없이 떠들고 있는 모습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여유가 느껴졌다.
‘설마?’
정다운이 신기루 백작을 제압한 채 주변을 돌아봤다.
웅성웅성.
여전히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 문어 골렘을 구경하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이쪽 상황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지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사람들도 전부 너냐?”
“땡! 절반만 맞추셨습니다!”
“……!”
놀랍게도 정다운의 물음에 대답을 한 사람은 눈앞의 신기루 백작이 아니었다.
갑자기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점잖은 노신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다.
“신기루란 본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
노신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의 몸에서 색깔이 점점 빠져나가며 모래 인간으로 변해 갔다.
2번째 신기루 백작이 된 것이다.
[아닛! 한 놈이 아니었네요?]
“그렇다고 두 놈도 아닙니다만?”
이번엔 비행 문어 골렘을 만져 보며 신기해하고 있던 꼬마 아이가 갑자기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또한 신기루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지요.”
스르륵.
이번에도 색깔이 빠지며 꼬마 모래 인간으로 변한 신기루 백작.
“그것이 바로 저 신기루 백작이랍니다.”
이윽고 3번째, 4번째 신기루 백작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히익? 계속 나옴! 개신기!]
“흙 뭉치…….”
“에헤이! 위험하게 그러지 마세요! 이 중의 절반 이상은 진짜 인간들이라고요!”
그들을 향해 정다운이 지체 없이 손을 뻗자, 어느새 열 명으로 늘어난 신기루 백작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정다운이 손을 멈칫하고 그에게 물었다.
“이 중에 진짜 인간도 있다고?”
“네! 그러니까 괜히 저를 못살게 굴었다간, 괜히 애꿎은 사람들도 피해를 볼 수…….”
“흙 뭉치기!”
“아닛!? 이렇게 가차 없다고?”
슈와악!
인간들이 있든 말든 가차 없이 행동하는 정다운이었다.
어차피 흙이 아닌 존재는 알아서 걸러질 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쿠웅!
“……너무하시네요, 정말.”
잠시 후, 정다운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모래 벽돌 하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정체를 드러낸 10명 외에도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던 나머지 신기루 백작들까지도 진공청소기 앞의 먼지처럼 빨려 들어온 것이다.
“끝이야? 더 없어?”
“물론 더 있지요. 그런데 있어도 안 나올 건데요? 누구 좋으라고요. 흑흑. 이게 대체 뭔 꼴이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는 신기루 벽돌, 아니 신기루 백작이었다.
토끼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소름인 건 이런 상황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는 거임. 대체 저 인간들에게 뭔 세뇌를 걸었기에 저러지?]
“무슨 실례의 말씀! 세뇌라니요? 신기루는 그런 질 나쁜 저주가 아니라고요.”
토끼의 말에 신기루 벽돌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분석 완료했습니다.>
때마침 알파가 정다운에게 말했다.
<이 사막 도시에 걸려 있는 건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일종의 축복이 걸려 있습니다.>
“축복이라고?”
[정화 스킬이 축복에도 적용됨?]
의외의 결과에 정다운과 토끼의 눈이 커졌다.
“거보세요! 저는 죄가 없다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어디서 문자를 보내시는 거죠?”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신기루 벽돌이었다.
<원래 축복과 저주는 기본적으로 같은 원리입니다. 독약과 약의 재료가 같듯이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종이 한 장 차이로 축복이 되고 저주가 되는 겁니다.>
요컨대 신기루 백작의 능력이 정다운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축복이었기에 정화 스킬이 일단 방어하고 본 것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곳의 축복은 그리 강력한 축복도 아니기에 쉽게 막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슨 축복이었는데?”
<좋은 꿈을 꾸게 해 주는 것. 그게 다입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해 준다는 신기루 백작의 말은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종말의 서도 입을 열었다.
[좋은 꿈이라니. 흥미롭구나. 악몽을 실체화 시켜 주는 그림자 마수들과 비슷한 원리인가.ㅇ_ㅇ+]
<제법입니다. 본인들이 갈망하는 소망을 눈앞에서 보여 주게 되면, 아무리 얄팍한 수준의 현혹이라도 믿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저, 저기요? 제가 조금 무서워서 그러는데요. 어디서 자꾸 목소리만 들리는 겁니까요? 이런 손님들은 제가 흉내 내기도 어렵습니다만.”
거대한 신기루 벽돌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종말의 서는 그 태도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신 사나운 말투로 논점을 흩트리지 말거라. 물론 뒤에서 이런 잔머리 굴리는 일은 나도 참 좋아하긴 한다만…….]
종말의 서는 진심으로 재밌어하고 있었다.
눈치챈 것이다.
신기루 백작이니 뭐니 이상한 놀이는 집어치우고, 이번 세계수가 지구에 와서 벌이는 짓거리가 무엇인지를.
[크흐흐. 설마하니 이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모래 따위를 퍼먹고 살 리도 없고. 그래서 이곳은 결국 좋은 꿈을 꾸며 천천히 굶어 죽어 가는 개미지옥이라는 말 아닌가.]
“…….”
우뚝.
신기루 백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사라락.
신기루 백작은 대답 대신, 사막 도시의 사람들에게 걸어 두었던 신기루의 환상을 전부 걷어 내었다.
그러자 그들의 진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히익.]
토끼는 소름이 돋았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들.
완전히 깡마른 팔과 다리.
극한까지 굶주려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은 행복이 가득했다.
좋은 꿈을 꾸고 있었기에.
몸의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듯 하하호호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마치 마약에 취한 광신도들처럼.
“야.”
오싹.
정다운의 입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끼조차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볼 정도였다.
“…….”
하지만 여전히 신기루 백작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 들킨 마당에 연기는 이제 끝이었다.
따라서 대답할 가치조차 없었다.
휘오오!
갑자기 사방에서 모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모래바람에서 수많은 모래 인간들이 나타나 정다운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가 끝도 없이 늘어났다.
“신기루 백작 진심 모드 발동.”
씨익.
모래 인간들이 동시에 같은 표정,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들이 모래 폭풍을 따라서 합창처럼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한가운데 선 정다운이 눈썹을 씰룩였다.
“끝까지 장난질이네. 그런데 어쩌지. 나도 지금 진심인데.”
오싹!
그 말을 듣는 순간 토끼는 잽싸게 비행 문어 골렘 안으로 튀었다.
‘이건 진짜 위험해! 위험하다고!’
토끼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다운이 싫어하는 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굶는 거!’
저 신기루 백작은 하필이면 정다운의 역린을 건드렸다.
드드드드……!
[히익! 빨리! 빨리요! 여기서 튀어야 함!]
토끼는 바하무트를 재촉해 비행 문어 골렘을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피신시키려 했다.
온 땅과 하늘이 찢겨 나갈 듯이 거칠게 진동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영업을 방해하는 손님을 강제 퇴거시키겠습니다!”
“강제 퇴거!”
“퇴거!”
드드드드!
신기루 백작들이 일제히 정다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들의 걸음 소리가 마치 산사태처럼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고,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그러자 그 먼지마저도 새로운 신기루 백작으로 변해 정다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야말로 사막의 모래알처럼 끝도 없이 늘어나는 물량 공세였다.
하지만 정다운은 그 앞에서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신기루 백작들이 그를 비웃었다.
“하하! 여유 부리기는!”
“왜요? 아까처럼 또 뭉치시게요?”
“하하하! 그런데 이걸 어쩌죠? 여긴 사막인데?”
“우린 끝도 없는데?”
“어디 한번 우리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 뭉쳐 보시던가요!”
“평생! 죽을 때까지! 모래만 뭉치다가 굶어 죽으시지요!”
그가 뭐라 비웃어도 정다운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 손을 들어 머리 위를 가리킬 뿐이었다.
“……응?”
그의 행동에 신기루 백작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그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그보다 더 위로 향했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설마 허세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위를 쳐다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거칠게 울부짖는 모래 폭풍과 사막의 모래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헉!?”
마침내 신기루 백작은 발견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미친! 저게 뭐야!?”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하나가 전체, 전체가 하나.
이 일대를 휘감고 있던 사나운 모래 폭풍이, 통째로 거대한 정다운의 얼굴의 형상이 되어 신기루 백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한참 밑에서 여전히 한 손을 들고 있는 정다운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여긴 사막이라고. 네가 백작이라면 나는 왕이야.”
“……!”
슈와아악!
그 순간 거대한 모래 폭풍이 정다운을 집어삼켰다.
정다운의 작은 몸이 거대한 모래 얼굴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야말로 끝도 없는 숫자로 분열되어 있던 신기루 백작들이 일제히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모래 거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크기가 너무 커서 모래 폭풍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얼굴만 있던 모래 거인은 급기야 사막 도시를 빨아들여 목 아래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를 이루고 있던 모든 건물과 땅, 궁전까지도 전부.
“이제 다 내 거야.”
그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끝끝내 모래 거인을 완성시킨 정다운이 거인의 배꼽에서 얼굴을 빼꼼 드러냈다.
그리고 담담한 시선으로 까마득히 작게 보이는 신기루 백작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통보했다.
“이 사막 도시도. 이 사막도. 다 내 거야.”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도 폭력적인 그의 통보 앞에서.
신기루 백작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사막의 왕…….”
아니, 사막의 신 앞에서 신기루 따위는 너무도 무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