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78)화 (378/393)

<던전리셋 외전 33화>

[크르릉! 이 겁쟁이들아! 도망치지만 말고 제대로 덤벼 보란 말이다!]

에르테아의 사도 루갈은 요즘 부쩍 신경질이 늘었다.

넓은 던전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과도한 업무량.

쓸 만한 도우미들의 탈주로 인한 일손 부족.

야근의 일상화.

그나마 요즘 도플갱어 일족들이 조금씩 견습 도우미로서의 역량을 갖춰 가고 있었지만, 루갈의 눈에는 여전히 못마땅한 부분이 한가득이었다.

그 결과, 루갈은 현재 던전에서 제일가는 꼰대가 되어 있었다.

[크르렁! 던전 게임이 무슨 애들 놀이터인 줄 아느냐! 이게 다 네놈들을 위해서다! 지금 네놈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지구에서 네놈들과 네놈들 가족들이 흘릴 피 한 방울이다!]

“으아, 또 저 소리……!”

“알았어! 알겠다고! 싸운다고!”

정신 교육을 빙자한 루갈의 잔소리를 들으며 털레털레 괴물들과 싸우는 참가자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루갈은 그조차도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크릉. 하여튼 요즘 것들이란! 이래 봬도 상당히 봐주고 있거늘. 예전엔 더 심했…… 크릉!?]

순간 루갈의 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더니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루가를르라랄라라-!

[이, 이 소리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맑고 고운 소리!

정다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머하니르라니로로-!

자니르니니니-?

[크오!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고!]

살랑, 살랑, 살랑, 살랑!

요 근래 항상 축 처져 있던 루갈의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곤에 찌들었던 루갈의 눈망울이 울망울망 초롱거렸다.

[늑대인간의 수호부]

- 내구력 : 31/100 (퍼센트)

- 특수 옵션 : 하울링

정다운이 지닌 늑대인간의 수호부가 루가루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루갈을 호출하고 있었다!

루갈은 곧장 신전에 있는 에르테아를 향해 귓말을 보냈다.

[에르테아 님! 저 휴가 가겠습니다! 정다운이……!]

“네, 여긴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도우미 업무라면 도플갱어 일족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에르테아는 군말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그때 정다운이 이상한 주문을 해 왔다.

부르귀신으르르 전부르르-!

[뭣이라? 불귀신들을 전부 데려오라고? 그랬다간 하룬이 텅 비어 버릴 텐데?]

정다운의 요청에 당황하는 루갈.

에르테아는 이번에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네, 아저씨가 필요로 하시다면 얼마든지 데려가세요. 하룬의 난이도가 대폭 내려가겠지만, 그 또한 참가자들의 운이겠죠.”

허락이 떨어지자 루갈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크르렁! 그럼 지구에 다녀오겠나이다! 시차 때문에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번쩍!

수호부의 빛이 루갈의 앞에 시공 게이트를 열었다.

[크하하! 나는 이제 자유다!]

“크오옴!”

양 떼를 이끄는 양치기처럼 하룬의 모든 불귀신들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지구로 넘어온 루갈.

그는 바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크릉? 내가 왜 아직도 하룬에 있지?]

화르륵!

불바다를 떠나 왔다 했더니 여긴 또 다른 불지옥이었다.

“어, 왔어?”

[헤이 요!]

불지옥 한가운데서 정다운과 토끼가 루갈에게 손을 흔들었다.

“크오옴!”

루갈을 따라 시공 게이트에서 줄줄이 걸어 나오는 거대한 불의 거인들이 포악하게 울부짖었다.

본디 불귀신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야생짐승과 같아서, 기본적으로 훈련이 불가능한 놈들이었다.

생긴 것도 소처럼 생겨서 지능 또한 소 수준이었다.

[크릉. 무슨 일로 나를 호출했느냐. 바쁘지만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서 특별히 와 주었으니 감사하도록.]

갑자기 도도해진 루갈이었다.

하지만 그의 꼬리는 눈치 없이 자꾸 살랑거렸다.

다만 정다운은 더욱 눈치가 없었다.

“아, 바빴어? 미안. 그럼 돌아가~ 우린 어차피 불귀신만 있으면 되니까.”

[크륵!? 가라고?]

깜짝 놀란 루갈이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크흐흠! 그러고 싶어도 이 불귀신들은 숲의 지배자인 내 말만 따른다! 물론 워낙 멍청한 놈들이라 이쪽으로 오라 가라 수준의 명령만 알아듣지만, 무엇이든 시켜다오!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다!]

[낄낄. 천하의 루갈이 왜 이렇게 말이 길어진데요?]

토끼가 웃으며 불타는 광산을 가리켰다.

[어차피 오라 가라 수준이면 충분해요. 불귀신들에게 여기 있는 불 좀 다 먹어 치우라 해 주셈.]

[여길 전부? 그거야 어렵지 않지.]

루갈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불귀신들은 시간만 주면 끝도 없이 불을 삼키는 먹보들이지. 이 멍청한 소들아, 식사 시간이다! 원 없이 먹어치워라!]

“크오옴!”

본디 불귀신은 혈관에 피 대신 불이 흐르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다쳐도 불을 삼키면 끝도 없이 재생하는 불사신이기도 했다.

아마 하룬에 화염충들이 없었더라면, 하룬은 진즉에 불귀신들에 의해 불이 꺼져 버렸을 터.

그 먹보들이 초원에 방목된 양 떼처럼 광산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땅에서 올라오는 불을 마음껏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   *

“저게 뭐야!”

사령술사의 처소에서 소스라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건 대체 뭐하는 놈들인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불을 빨아 먹는 거냐고!”

갑자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정 구슬 너머에서 갑자기 출현한 정체불명의 거인 괴물들이 광산의 화염을 라면 국물처럼 호록호록 빨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사령술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본디 언데드를 부리는 사령술사라면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법.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던 1차 방어선이 점점 사라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안 되겠다! 나의 사랑스런 스켈레톤들이여! 일어나라! 일어나서 저 침입자들을 물리쳐라! 놈들을 죽여서 그 시체조차 나의 권속으로 만들 것을 명한다!”

사자소생(死者甦生)!

 

케케켈! 

끼하하하!

사령술사의 명령에 끝도 없는 언데드 군단이 땅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다운과 불귀신들을 삼엄하게 포위했지만.

-정화. 범위형.

번쩍!

“꺄악!?”

갑자기 수정 구슬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자 사령술사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 내 엉덩이…… 앗!”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다시 일어난 사령술사의 눈이 수정 구슬을 보자마자 휘둥그레 커졌다.

“다 어디 갔어!?”

자신의 사랑스러운 스켈레톤들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사령술사는 크게 경악한 얼굴로 수정 구슬을 두 손으로 붙들고 눈을 바짝 가까이 붙이고 비명을 터뜨렸다.

“이런 미친! 이렇게 광범위한 퓨리파이(Purify)라니! 이 땅을 아예 성역(Holy Sanctuary)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잖아! 설마 지구에도 성자가 존재했을 줄이야!”

성자!

지긋지긋하고 빌어먹을 그 이름!

사령술사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일말의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성자는 죽음을 다루는 사령술사에겐 천적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데! 왜 여기까지 와서 성자를 마주쳐야 되는 거야!”

사령술사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저 거대한 불귀신들은 호록호록 광산의 불을 맛있게 흡입하고 있었다.

“대체 나한테 왜들 그러는 거야! 사령술사로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내 근처에서 저절로 시체들이 언데드가 되는 게 내 잘못이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억하심정이 되어 신경질을 부리는 사령술사.

그러다 우뚝, 움직임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아니지? 내가 왜 도망쳐?”

사령술사의 얼굴에 갑자기 여유로운 미소가 돌아왔다.

광범위한 정화 스킬을 보자마자잠시 정신이 나가 버렸지만, 생각해 보니 여기는 몹시 깊은 땅속 아니던가.

광산의 불바다는 고작 1차 방어선에 불과했다.

사령술사를 지키는 진정한 방어선은 사실 이 광산 전체다.

“어차피 저런 광범위 정화 주문은 빛이 닿는 곳까지만 적용되는 법. 터널 벽에 막히면 매번 주문을 걸어 줘야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이 깊고 복잡한 광산 터널은 길 찾기가 영 까다로웠다.

그 길을 일일이 헤쳐 나가며 곳곳에 숨어 있는 자신의 언데드 군단과 힘겨운 모험을 해야,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생고생을 성자씩이나 되는 고귀한 존재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갑자기 느긋해진 사령술사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런 짓거리는 무식이 용감인 용사들이나 하는 거라고. 그런데 어쩌나? 보아하니 동료 중에 용사가 없네? 우후후.”

그리고 고혹적인 눈빛으로 수정 구슬을 쳐다봤는데.

“응?”

성자가 갑자기 양손에 빨간 목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좋아. 불 얼추 꺼졌네. 그럼 슬슬 뭉쳐 볼까?

“……뭉쳐? 뭘?”

-흙 뭉치기!

슈와악!

“……?”

순간 사령술사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고귀하고 고귀한 성자라는 작자가.

맨손으로 흙을, 아니! 이 거대한 광산을 통째로 뜯어내기 시작 한 것이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무, 무, 무, 무슨! 잠깐! 지금 뭐하는 거야!”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수정 구슬을 향해 버럭 소리치는 사령술사.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자, 이쯤이면 광산 표면의 흙은 대충 벗겨 냈고, 석탄은 돌이니까 깨면 되겠지?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깨지 마! 아니, 잠깐만! 깨지 말라고!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해? 니들도 도와.

-냐옹.

“돕지 마! 저것들은 또 뭐야아-!”

급기야 성자의 그림자가 여러 개로 분열되더니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이 거대한 광산이 조각조각 퍼즐처럼 쪼개지기 시작했다!

“성자가 왜 그림자 마수를 다뤄! 이단이냐!? 사이비냐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사령술사는 진땀까지 흘리며 비명을 꽥꽥 질렀다.

곡괭이질이 쓸데없이 너무 호쾌했다.

“잠깐! 진짜 니들 뭐하는 거야! 성자면 성자답게 정정당당하게 터널로 걸어 들어오란 말이야!”

-정정당당은 무슨? 쉽게 갑시다요.

“……!”

오싹!

갑자기 들려오는 대답에 사령술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정 구슬 너머에서 턱시도를 입은 토끼가 자신을 똑똑히 쳐다보며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님 기분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반항해 봐야 소용없어요. 그만 포기하셈.

“……!”

사령술사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 너 뭐야! 어떻게 내 수정 구슬을 역탐지한 거지?”

-그러게요? 나도 요즘 내 성장이 무서움. 아까 님의 기록을 좀 흡수해서 그런가? 

씨익.

토끼는 새로운 장난감 선물을 뜯어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흥미진진하게 사령술사의 모습을 구경했다.

-호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엄청 이쁜 언니네요? 인형처럼 생기신 분이네. 섹시하고 도발적인 데다 우아함까지 겸비? 도망가지 말고 딱 거기 있어요. 금방 잡으러 가겠음.

“누가 잡혀 준대!”

쨍그랑!

사령술사는 자신의 수정 구슬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사색이 된 얼굴로 서둘러 도망치기 시작했다.

짐이고 뭐고 당장 이계의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됐어! 지구가 이런 곳이었다니! 당장 원래 세계로 돌아갈래!’

그런데 그때였다.

쩌적!

사령술사의 머리 위에서 어두운 천장에 긴 금이 생겼다.

그리고 그 금을 타고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더니, 급기야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쩌저적!

“찾았다.”

“꺄악!”

천장의 뚜껑이 열리고 정다운의 거대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거대한 토끼의 얼굴도 불쑥 나타나 사령술사를 내려다봤다.

[히히. 요잉네?]

“당장 꺼져! 이 악마들아!”

사령술사는 바닥에서 이쑤시개 크기의 지푸라기를 창처럼 집어 들고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그 모습에 토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임? 인형처럼 생긴 게 아니라 진짜 인형 사이즈였음?]

이 모든 재난의 원흉이었던 사령술사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였다.

그때 정다운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린 뽀뀨가 쿵, 하고 사령술사의 앞에 내려섰다.

“뽀뀨?”

“꺄아악! 꺼져, 이 털괴물아!”

“……뀨잇?”

뽀뀨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사령술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혼란에 빠진 그녀를 달래 주기 위해 입속에서 뼛조각 하나를 수줍게 건네주었지만.

“꺄악! 나를 잡아먹게 놔둘 것 같으냐! 저주! 저주! 이 망할 놈의 퓨리파이! 왜 저주가 안 통하는 거야!”

더 혼란에 빠져 버린 사령술사였다.

뽀뀨는 모든 저주에 면역이었다.

입에 한가득 정화된 뼛조각을 물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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