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31화>
* * *
지도상 길이 약 2,700km.
중간에 갈라져 나와 중첩된 부분까지 합치면 약 6,000km.
‘인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리는 초거대 유적지가 바로 만리장성이었다.
즉, 어마어마하게 큰 ‘벽돌담’이라는 말이었다.
“저렇게 긴데 우리가 조금만 뜯어 써도 되지 않겠어?”
[오, 그럴싸?]
토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요!”
둘의 대화를 들은 샤오진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바로 조금 전에 작은 바위에서 미후왕을 소환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으니, 지금 정다운이 무슨 만행을 저지르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장성만은 안 됩니다! 저 성벽은 지금까지 저희들을 지켜 준 최후의 방어진입니다! 장성에 문제가 생겼다간 바로 언데드들이 성안으로 밀려들 거예요!”
“응, 걱정 마. 대신 내가 흙으로 적당히 메워 줄게. 서비스로 모양까지 비슷하게 만들어 줄게.”
“아니, 잠…….”
틀렸다.
이미 정다운은 마음을 먹었고, 샤오진의 간절한 목소리 따위는 저만치 멀어지고 말았다.
치열한 수성전이 진행되고 있는 만리장성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다운.
때마침 성벽을 아작아작 물어 뜯고 있던 폭군 티라노와 정다운의 눈이 딱 마주쳤다.
“뭘 쳐다봐?”
정다운이 놈의 안면에 정화 구체들을 냅다 난사했다.
파바바밧!
“크러럭!?”
깜짝 놀라 고개를 틀어 뒤로 물러서는 폭군.
하지만 그새 강제로 정화당한 뾰족한 이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와, 진짜 천적이 따로 없네. 어쩌다 이 오류종자가 이렇게까지 커 버렸지? 역시 전부 내 덕분이겠지? 엣헴.]
깨알같이 생색을 내는 토끼였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오류의 시작은 토끼의 작은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다.
그런데 막상 만리장성을 보니까 옆으로 길기만 하지, 생각보다 성벽의 높이는 낮았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10미터 정도로, 방금 후퇴한 폭군 티라노가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이러다 또 땅딸보 미후왕 나오는 거 아님?]
토끼의 우려에 정다운이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대강의 스케치를 그려 보더니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토끼야.”
[넹?]
“바위에 위아래가 어디 있어?”
[네?]
“미후왕더러 나올 때 옆으로 누워서 나오라 해.”
[……!]
그의 기발한 해결책에 토끼가 눈을 크게 뜨고 황급히 만리장성을 쳐다봤다.
그러자 토끼의 눈에도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구부렁한 능선을 따라 굴곡진 만리장성의 실루엣 그대로 삐딱하게 옆으로 누워 있는 미후왕의 잔상이!
토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오오! 보인다! 이거라면 분명 가능해! 나와라, 나의 하수인 미후왕아!]
쩌적!
명령이 떨어지자, 그 순간 길게 이어진 만리장성의 중간부에 길게 금이 갔다.
그리고.
쩌저저적!
그 금이 수박 쪼개지듯 빠른 속도로 갈라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콰르르!
“으아악!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 근처에서 정신없이 언데드들의 접근을 막아 내고 있던 사람들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이것은 호시탐탐 성벽을 넘어오려던 언데드들에겐 큰 기회였다.
끼히히히!
키케케케켈!!
사악한 웃음소리가 온 땅에 가득 찼다.
해골병사들이 일제히 눈을 빛내며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벽은 결국 무너지지 않았다.
토끼의 눈에만 보였던, 성벽 속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실루엣.
그 진면목을 덮고 있던 표면의 먼지들만 털어져 나왔을 뿐이다.
콰르릉!
[누구인가! 본좌의 단잠을 또 깨운 존재가!]
……!
먼지가 자욱한 성벽 안에서 다짜고짜 광오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히힉?
케켈!?
호기롭게 달려오던 언데드들의 발걸음이 본능적인 위기감에 의해 그 자리에서 덜컥 멈추고 말았다.
그들의 앞에…… 거대한 바위거인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옆으로 삐딱하게 누운 자세로.
[미후왕. 이곳에. 강림.]
그 뒤에서 의기양양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토끼.
[네놈들이냐!]
화악!
미후왕이 소파에 드러누워 TV라도 보는 듯한 자세 그대로 버럭 호통을 치자, 무시무시한 기세가 해골 병사들을 덮쳤다.
“켈룩.”
딸꾹질 비슷한 소리가 해골들의 입에서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크고 든든한 아군들이 버티고 있었다.
“크롸아!”
“크루룽!”
언데드 공룡들이 미후왕에게 본능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하지만 놈들이 아무리 포악하다 해도 결국 본능적인 야성에 따라 움직이는 짐승(전직)일 뿐이었다.
[가소롭구나! 감히 본좌에게 이를 드러내?]
미후왕이 누운 자세 그대로 다리만 들어서 놈들을 걷어찼다.
콰쾅!
“크롹!?”
“쿠르릉!”
단단한 성벽으로 이루어진 미후왕의 발차기에 공룡들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토끼가 의기양양하게 놈들에게 선포했다.
[냐하하! 보았느냐! 이건 그냥 발차기가 아니다! 이 발차기는! 오랫동안 적들의 공격을 수동적으로만 감내해야 했던 만리장성이 태어나 처음으로 내지른 분노의 발차기! 는 개뿔! 얼른 일어나서 싸워! 이 게으른 하수인아!]
[크흐흠. 알겠나이다.]
쿠르릉.
미후왕은 헛기침을 하며 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크기는 자그마치 30미터!
[오옷! 짱 커! 무지 크다! 냐하하! 봤냐! 이게 바로 내 하수인이시다!]
그렇게 좋을까. 미후왕의 어깨 위에서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행복에 겨워 보였다.
[이 버러지들! 내 앞을 막아서면 다 짓밟아 주겠노라!]
자리에서 일어난 미후왕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 해골 병사들을 마구 짓밟았다.
그리고 손으로는 황급히 뒤로 빠지려는 폭군 티라노의 목줄기를 기어코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쾅!
“크롸……!”
폭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럼 빈자리를 좀 막아 보실까? 전망대 설치!”
처처처처척!
정다운은 이빨 빠진 것처럼 빈틈이 생긴 만리장성에 빠른 속도로 전망대를 건설했다.
“전망대를 옆으로 넓게 만들면 비슷하겠지!”
처처처처척!
만리장성의 틈새가 빠른 속도로 메워지는 모습이 마치 이가 빠진 자리에 새로운 치아가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아니, 뭐 저런…….”
“저게 무슨…….”
그 경천동지할 광경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섬서성의 사람들은 전투조차 중단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는데, 스케일이 가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다.
아까는 거대한 손으로 공룡을 후려치고 땅 전체를 정화하더니.
이제는 공룡들보다 2배는 큰 거인을 만들어 내고 순식간에 만리장성을 축조해 버린 것이다.
저 모습을 손수 만리장성을 지으셨던 옛날 조상님들이 보신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 좋은 분위기에 알파가 초를 쳤다.
<그나저나 미후왕의 효율이 영 좋지 않군요. 화과산이 미후왕의 기록을 절충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미후왕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종말의 서에 보관 중인 생명 에너지가 쭉쭉 소모되고 있습니다.>
“헉. 진짜? 연료가 많이 드나 보네? 내 골렘들은 연료가 따로 안 드는데 쟤는 왜 그래?”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겁니다. 그 대신 우리의 골렘들은 저렇게 크게 만들면 출력 부족으로 움직이지도 못할 겁니다.>
“그럼 앞으로 미후왕은 상황에 따라 크기를 조절해서 소환해야겠네. 그래도 아직은 연료 충분하지?”
<네. 이번에 화과산을 먹은 덕분에 여유는 많습니다. 그래도 있을 때 더 아껴 써야 부자가 되겠지요.>
알파의 조언을 들은 정다운은 토끼에게 미후왕을 최대한 덜 움직이면서 싸우게 시켰다.
“그럼 우리는 그 사령술사라는 녀석을 찾으러 가 볼까?”
“정다운 님! 잠시만요!”
정다운이 비행 문어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허겁지겁 뒤에서 샤오진이 다가왔다.
“실례를 무릅쓰고 청합니다! 저희도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나를 따라오겠다고?”
“네. 지금 언데드들이 처음 출몰한 지역을 찾아가려 하시는 것이 맞으시지요? 저는 마침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길잡이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샤오진의 결연한 눈빛에 정다운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나야 좋지. 무작정 해골 병사들이 오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 볼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너 여기 대표 아니었어? 이렇게 맘대로 이탈해도 돼?”
“지금 상황을 보니 제가 잠시 빠져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하긴 미후왕이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
“감사합니다!”
그렇게 정다운과 샤오진을 태운 비행 문어 골렘이 어둠으로 가득한 북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날아가는 중에 샤오진은 정다운에게 몽골에서 일어난 참혹한 종말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만리장성을 기점으로 섬서성의 바로 북쪽.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
약칭 ‘네이멍구’라 불리는 이 땅은 엄밀히 따지면 몽골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몽골은 자치구보다 더 북쪽으로 가야 있습니다. 처음 언데드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곳은 몽골과 인접한 자치구의 북쪽 산이었습니다.”
“산?”
“네. 정확히는 탄광 지역입니다.”
내몽골은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행정 구역으로, 중국 땅의 12퍼센트를 차지하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세상에 종말이 온 시점에서 정치적인 설명은 다 의미 없어졌고, 중요한 건 이 땅의 지형적인 특성이었다.
내몽골은 광활한 초원과 아름다운 경치의 산세가 유명했고.
무엇보다 석유나 캐시미어, 천연가스 등 천연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특히 내몽골은 중국 북부의 중요한 석탄 생산 기지로 유명했다.
“저는 그 탄광 지역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도와 석탄을 캐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탄광에서부터 언데드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게이트가 열린 곳은 설마…….”
“게이트는 탄광의 깊은 곳에 열렸을 겁니다. 그 시기에 탄광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저희 부모님 또한.”
부모님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샤오진의 표정은 슬픈 기색이 전혀 없이 담담했다.
종말의 시대에서 친구와 부모의 죽음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슬픔에 빠져 있기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되었다.
얼마 후, 내몽골에 들어섰다.
“아, 넓다. 역시 대륙이네.”
가장 처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샤오진의 설명대로 광활한 초원이었다.
어둠 결계 탓에 짙은 어둠이 그 위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사방이 탁 트인 탓에 어렴풋이 초원 위를 우글우글 걸어 다니는 언데드들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정다운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저 참혹했다.
“갑자기 무슨 공포 영화야?”
이제 보니 만리장성까지 도달한 해골 병사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엔 아직 해골 병사가 되어 가는 과정인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이나 뜯어먹어야 할 수많은 양 떼 무리가 뼈만 앙상히 남은 언데드가 되어 사납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언데드가 된 건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던 가축과 산짐승들도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샤오진은 언데드들을 피해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며 말했다.
“언데드 군단의 진정한 공포는 전투가 길어질수록 우리 편은 점점 줄어드는데, 놈들은 그만큼 숫자가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단순히 흡혈귀에 물리면 흡혈귀가 된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어둠 결계에 속한 땅 위에서 죽는 모든 생명체가 언데드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었다.
[주인님, 이 땅에 사령술사가 저주를 건 게 틀림없나이다. 단순히 날씨 조작 결계라 생각했거늘, 생각보다 훨씬 고난이도의 술법입니다.]
비행 문어 골렘을 운전하던 바하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샤오진은 신비로운 설녀의 모습을 한 바하무트를 힐끔 쳐다보며 정다운에게 조심히 물었다.
“그런데 저 여성분은 누구신가요?”
“여자 아니야…….”
“네? 그럼 설마 남자이신가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
순간 어리둥절한 샤오진.
정다운은 어딘가 아련한 눈빛으로 바하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흐흠. 크흠.]
다 들리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바하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