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27화>
* * *
화아악!
짙은 어둠에 묻혀 있던 만리장성 위로 내리쬔 은은하고 온유한 빛줄기.
흡사 하늘에서 대천사라도 강림하는 듯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치열하게 만리장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그곳을 쳐다봤다.
이 저주받은 땅에 진정한 기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해골 병사들이…….”
투둑.
“끼히이…….”
투둑. 투두둑.
빛줄기에 닿은 해골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이음새가 빠진 장난감들처럼.
“끼하!”
해골 병사들은 빛이 내린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발을 놀렸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 앞발부터 시작해서 관절들이 하나씩 부서져 내렸다.
와르르!
“끽…….”
그리고 결국 모든 뼈와 관절들이 전부 분리되어 바닥에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인가?”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루하루를 버텨 오던 사람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돌아왔다.
“세상에! 기적이다!”
그렇다. 그것은 진정으로 기적이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하늘은 가끔 희망을 내려 줄 때가 있었다.
“살았다! 이제 살았다고!”
“신께서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사람들 속에서 한 소년이 용맹하게 소리쳤다.
“좋아!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빛이 닿는 땅으로 나머지 해골들을 몰아붙입시다!”
우와아!
그 말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함성을 지르며 만리장성 아래로 뛰어내려 해골 병사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빛줄기가 내려온 땅은 범위가 상당히 넓었지만 저 지긋지긋한 언데드들의 숫자는 그보다도 훨씬 많았다.
모두가 그 지역에 해당될 수 없으니, 나머지 언데드들을 ‘기적의 땅’에 닿도록 밀어붙이는 것이 방금 생각해 낸 작전이었다.
“방패병! 방패진을 짜! 힘으로 밀어붙여!”
“스킬! 뭐든 좋으니까 놈들을 저 기적의 땅으로 유인해!”
끼히익!
전쟁이란 본디 기세 싸움.
기세가 뒤집히자 해골 병사들이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성전의 기본인 성벽의 방어는 들어 있지도 않았다.
“공격! 오로지 공격뿐이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
애초에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무너진 성벽의 구멍들이 저절로 메워지고 있었다.
본디 섬서성은 오랫동안 가난한 지역이었다.
어찌나 가난한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만리장성의 벽돌까지 뽑아서 기념품이라며 팔았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만리장성 곳곳에는 기본적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결과 섬서성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뚫었던 구멍들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벌어진 그 많은 불행의 틈새들이 희망이라는 이름의 찰진 흙덩이로 꾸역꾸역 채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적이라는 건 가끔씩 연달아 찾아오기도 하나보다.
그들을 위협하던 가장 큰 불행조차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롸아아!”
성벽을 물어뜯던 거대한 폭군 티라노.
그 거대한 언데드 공룡마저도 정화의 빛을 이겨 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덩치가 큰 만큼 해골 병사들처럼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폭군은 덜그럭거리는 몸을 성큼 움직여 정화 지역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물론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굵은 채찍 같던 꼬리뼈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폭군에게 이것은 크나큰 치욕이었다.
“크롸아아!”
폭군이 크게 분노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문어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정다운은 아깝다며 입맛을 다셨다.
“에이, 제일 중요한 놈이 빠져나갔네.”
[덩치가 큰 만큼 내구도도 높은가 봐요. 아무래도 저 녀석은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패야 될 것 같은데요?]
범위형 정화 스킬은 광범위한 지역을 한 방에 정화할 수 있는 대신, 대상을 추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폭군이 정화 지역에서 좀 더 오래 머물러 주었다면 다른 해골 병사들처럼 파괴되었겠지만, 저렇게 금방 다른 곳으로 피신해 버리면 답이 없었다.
“한 번 더 쓰는 수밖에. 정화!”
파아앗!
정다운이 다시 범위형 정화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처음 정화했던 지역에 빛이 뚝 끊기더니, 그 대신 폭군이 서 있는 땅 위로 새로운 빛줄기가 내려왔다.
범위형 정화 스킬은 레벨이 오를수록 범위가 점점 늘어나지만, 여러 지역을 동시에 정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크뤄어!”
하지만 폭군은 두 번은 안 당하겠다는 듯 서둘러 그 지역을 벗어났다.
이번에는 발 빠르게 움직여서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이걸 피해? 다시 정화!”
몇 번을 다시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토끼가 짜증을 냈다.
[아오, 얄미워라!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놈임!]
“그래도 덕분에 제일 위험한 놈이 만리장성에서 많이 멀어졌어. 이런 식으로 다른 공룡들한테도 써 보자고.”
만리장성을 공격하던 언데드 공룡들은 티라노사우르스 외에도 더 있었다.
정다운은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공룡들도 만리장성에서 최대한 멀리 떼어 내는데 성공했다.
머리가 좀 둔한 공룡은 우왕좌왕하다 다리가 부러져서 그 자리에서 정화되기도 했다.
“끼히잉…….”
덕분에 그 사이에 끼어 있던 해골 병사들만 불쌍하게 됐다.
공룡들 근처에 있던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도망가는 공룡들에게 밟혀 죽는 놈들도 허다했다.
“크롸아!”
[어? 쟤 다시 와요!]
제일 처음 뒤로 빠졌던 폭군 티라노는 생각보다 집요한 놈이었다.
정화 스킬이 다른 공룡들을 노리는 틈을 타서 득달같이 달려와 또 한 번 성벽을 물어뜯었다.
정다운이 다시 그쪽으로 정화 스킬을 썼지만, 그러면 금방 또 뒤로 빠졌다가 다시 덤비는 식이었다.
“얼씨구? 또 피했어?”
정다운은 그 집요함에 박수를 치고 말았다.
“와, 인정한다. 뼈만 남았어도 공룡이다 이거지?”
씨익.
[으익? 님 왜 그렇게 웃어요?]
토끼가 기겁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약이 바짝 오른 정다운이 이를 드러내며 폭군을 향해 웃고 있었다.
“나 잠깐 내려갔다 올게?”
[앗! 님 못 날잖아요!]
휙!
토끼가 말리기도 전에 정다운이 비행 문어 골렘의 문을 열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흙 뭉치기. 공중 계단.”
처처척!
토끼의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도 정다운은 곧장 허공에 구름 벽돌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폭신한 구름 위를 펄쩍펄쩍 밟고 다니며, 폭군 티라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크롸!”
폭군 티라노는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성벽을 공격할 뿐이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었고, 인간 한 명쯤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정체불명의 빛줄기만 주의하면 그만이었다.
가뜩이나 약이 바짝 올라 있던 정다운은 무시까지 당하자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을 불렀다.
“나를 봐! 이 자식아! 흙 뭉치기!”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정다운이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꺼냈던 구름들이 허공에서 하나가 되며 순식간에 거대한 손바닥으로 변했다.
그리고.
빡!
“롸!?”
폭군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크롸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폭군은 사납게 이를 갈며 뒤를 휙 돌아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덥석!
어디서 나타난 건지 거대한 분홍색 손바닥이 갑자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응. 한 대 더 맞아야지?”
정다운은 이미 저 멀리서 반대쪽 손바닥을 뭉치고 있었다.
“돌리기!”
그리고 손바닥을 허공에서 강하게 돌려 폭군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빠악!
“크롸아!”
또 한 대 맞은 폭군이 강하게 반발하며 구름손을 입으로 찢어발기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어딜 도망가! 정화!”
파아앗!
그쪽으로 정다운이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줄기가 길게 뻗어 나와 놈을 공격했다.
“크롸!?”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비트는 폭군.
살짝 빗겨 맞았을 뿐인데도 뼈마디가 쑤셔 왔다.
하지만 거기서 지체할 틈은 없었다.
“구름 흙은 가벼워서 안 아프다 이거지? 그럼 무겁게 맞자.”
바로 머리 위에서 정다운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갑자기 묵직한 흙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콰르르!
“……!”
때아닌 산사태에 직격당한 폭군의 어깨뼈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척.
정다운이 마침내 만리장성 위에 내려섰다.
“크으. 내가 이렇게 만리장성에도 와 보는구나.”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감격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굴색을 바꿔 다시 폭군을 노려봤다.
“너 되게 터프하네?”
오싹.
처음으로 정다운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폭군 티라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예전에 정다운이 해골거인 반다이크를 물리치고 받은 업적 보상 때문이었다.
[최초 업적 달성!]
“용기사 살해자!”
종말의 용을 섬기는 죽음의 기사에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선사했습니다!
당신들의 위대한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1 : 당신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이 벌벌 떱니다.
(언데드들의 공격력이 20퍼센트 약해집니다.)
- 보상 2 : 용기사를 사냥한 당신의 위엄에 주변 언데드들이 위축됩니다.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20퍼센트 느려집니다.)
- 보상 3 : 용기사의 힘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언데드 대상으로 당신의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정다운이 양손을 펼치며 이를 드러냈다.
“내가 뼈 부수는 데는 이골이 났단 말이지. 우리 제대로 해볼까?”
어느새 그의 손엔 던전 콩이 한가득 잡혀 있었다.
“아이템 지급.”
처처처처처척!
수많은 콩들이 만리장성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 저러니까 약간 숲의 일족들이 쓰던 씨앗 심기 마법 같네요?]
토끼가 감탄하든가 말든가, 정다운이 바로 스킬을 썼다.
“함정 설치.”
촤아악!
던전 콩들이 빠른 속도로 뿌리를 뻗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콩깍지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갸웃?
정다운이 노려보는 시선을 따라 대포처럼 일제히 고개를 치켜드는 던전콩들.
갸웃? 갸웃? 갸웃? 갸웃?
갸웃? 갸웃? 갸웃? 갸웃?
참고로, 정다운이 받은 업적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업적 달성!>
“해골 파괴자!”
혼자의 힘으로 해골 병사 1천 명을 파괴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 뼈를 2배로 더 잘 부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효과는 그의 스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물론 함정 설치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정다운이 의미심장하게 손가락으로 폭군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일제 사격! 발사!”
투다다다다다!
“크…… 롸라라!”
맹렬하게 퍼부어지는 대포 사격에 폭군의 몸이 덜덜 떨리며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려났다.
공룡의 뼈가 아무리 두껍다 해도, 이렇게 엄청난 집중 사격을 받자 약한 뼈들부터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롸아아!”
결국 폭군은 크게 성을 내며 뒤로 도망쳤다.
그 뒤통수에 대고 정다운이 손을 뻗었다.
“어딜 가? 정화!”
파아앗!
“크롸!”
폭군이 집요하다 한들 정다운이 조금 더 집요했다.
결국 폭군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얻어맞고 정화되어야 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뼛조각을 떨어뜨리며 사라진 놈을 계속 추격할까 하던 정다운.
이곳엔 다른 공룡들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그가 놈들을 찾아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너네 차례지?”
움찔.
“……크룽.”
그 시선에 코뿔소처럼 성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있던 트리케라톱스가 몸을 주춤거렸다.
“정화. 방출형.”
파바바바밧!
정다운을 중심으로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새하얀빛의 구체들.
“저게 무슨…….”
끝없는 절망 속에서 만리장성을 지켜오던 섬서성의 사람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단 한 명의 인간 때문에 거대한 공룡들이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을.
그러기를 한참 후.
해골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만리장성 앞이 어느새 한산해져 있었다.
……끼릭. 끼기긱.
그 적막한 분위기 가운데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해골 병사들만이 바닥을 기어가며 간간이 생존 신고를 했다.
“…….”
“…….”
그 앞에 선 섬서성의 사람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부터 혼란스러웠고, 무슨 소리라도 내었다가 이 꿈에서 깨어날 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수많은 해골 병사들의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그 위로 은빛 낙엽 한 장이 휘적휘적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낙엽이 아니라 날다람쥐였다.
“뽀뀨우-!”
뽀뀨는 몹시 행복한 표정으로 수북한 뼈 동산에 풍덩 다이빙을 했다.
“하아.”
가까스로 현실을 자각한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사, 살았다.”
길고 길었던 오늘의 일과가 끝난 것이다.
[<정화> 스킬이 상급 7레벨로 발전했습니다.]
토끼의 손에서 아기 세계수가 작게 메시지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