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26화>
* * *
부오오오!
화창한 하늘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거대한 문어가 있었다.
흙으로 된 8개의 다리가 균형을 잡고.
꽁무니에서 휘몰아치는 차가운 눈보라로 추진력을 얻는, 정다운의 비행 문어 골렘이었다.
그렇다.
정다운은 여태까지 해 왔던 공중 철도 노가다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편하다! 너무 편해! 경치 좋다!”
이제야 좀 경치를 구경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앞에 펼쳐진 끝없는 지평선.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화창한 하늘과 보송보송한 구름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정다운을 보며 토끼가 낄낄 웃었다.
[으히히!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게요!]
“그럼 어떡하냐? 연료 부족이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그 연료가 실시간으로 공중에 흩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물론 정다운이 편해진 대신 지금 고생해 주고 있는 건 바하무트였다.
“우리 모두 바하무트에게 감사의 묵념합시다.”
[묵념합니다.]
문어 골렘 꽁무니에서 쉴 새 없이 블리자드를 사용하고 있는 바하무트에게 두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꾸벅하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그에 바하무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겸양을 떨 뿐이었다.
[껄껄! 소인은 거뜬합니다! 블리자드는 처음에 마법진만 펼쳐두면, 그다음부턴 방향만 잡고 마력만 꾸준히 불어넣으면 되나이다.]
[누구처럼 수작업이 아니라는 말이네요? 호우! 마법사 최고! 낄낄.]
“니들 일부러 그렇게 웃지 마라? 기분 나쁜 건 아닌데, 기분 나쁘거든?”
[결국 기분 나쁘다는 말이잖아요! 깔깔!]
콤플렉스를 찔린 정다운이 씩씩 대자, 바하무트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냉큼 그의 편을 들며 토끼를 꾸짖었다.
[어허! 토끼 선배는 주인님을 너무 놀리지 마시게! 우리 주인님이 마법에 재능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아, 그러네요! 마법만 재능 없을 뿐 바보는 아니었네! 꺌꺌.]
[껄…… 크흠. 아닙니다. 소인은 언제나 주인님 편. 주인님의 부족한 부분을 보조하는 것이야말로 소인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바하무트의 정중한 사과에 정다운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몹시 뚱한 표정이었다.
“와아. 운전하면서 말도 그렇게 길게 할 여유가 있구나아? 나는 열차 추락할까 봐 눈이 빠져라 집중해야 했는데. 역시 마법이 최고네. 와아.”
[크흐흠. 저도 다시 집중하겠나이다. 나의 분신들이여, 속도가 느려졌다! 더욱 힘을 내거라!]
[호우!]
[호우!]
괜히 찔려서 애꿎은 미니 바하무트들만 재촉하는 바하무트였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새하얀 머릿결이 흩날리며 눈가루가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토끼는 문득 그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바하무트는 여자임, 남자임? 기껏 에르테아 님 모습처럼 예쁘게 변했으면서 말투는 여전히 아재스럽단 말이죠.]
“그러게?”
정다운까지 호기심을 드러내자, 바하무트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 소인은…….]
꼴깍.
꿀꺽.
괜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정다운과 흑토끼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하무트가 깜짝 놀라며 밖을 가리켰다.
[아니, 이럴 수가!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밖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왜!”
[왜 하필 지금 큰일 남!?]
동시에 버럭 고함을 치는 정다운과 토끼였다.
그리고 바로 바하무트가 가리키는 창밖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건 그냥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경관들뿐이었다.
[아, 마법사가 아니라 안 보이시겠군요. 이 앞에 거대한 마력 결계가 펼쳐져 있나이다.]
“마력 결계라고?”
그 말에 정다운이 눈을 씻고 다시 앞을 쳐다봤지만, 마력에 재능이 없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석 완료.>
때마침 주변의 마력 패턴을 분석한 알파가 그에게 조언했다.
<마력 흐름을 보니, 목숨에 지장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종류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날씨 조작 수준의 결계인 것 같습니다.>
“날씨 조작? 이 화창한 날씨가 조작된 거라고?”
[아뇨. 아마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날씨가 바뀔 것 같아요.]
한발 늦긴 했지만 토끼도 결계의 존재를 감지했다.
정다운처럼 심각하진 않겠지만, 바하무트나 알파처럼 마법에 능통한 존재는 아니었던 토끼에게도 이 결계는 익숙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님, 죽음의 산맥 처음 들어갈 때 기억나죠? 이 앞의 결계는 던전의 구획을 나누는 방식과 비슷해요.]
“그럼 이 앞에 또 세계수가 있다는 건가?”
그 말에 종말의 서가 책장을 팔락이며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아니라 게이트만 뚫려 있을 가능성도 있다.ㅇ_ㅇ+]
그리고 바로 토끼에게 버럭 화내는 종말의 서.
[이놈! 언제 또 이상한 낙서를 추가했느냐! ㅇㅍㅇ++]
[히힛. 나 잡아 봐랏!]
입에 펜을 물고 촐랑촐랑 도망치는 토끼였다.
종말의 서는 한숨을 내쉬곤 정다운에게 설명을 이어 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이계의 세계수의 침략 방법은 총 2가지다.ㅇ_ㅇ+]
설명은 간단했다.
<세계수의 침략 방식>
1) 서울역 게이트.
구멍(게이트)만 뚫고 본체는 안 넘어온다. 하수인들만 내보내서 지구를 침략한다.
- 장점 : 본체가 여전히 이계에 남아 있어서 안전하다.
- 단점 : 하수인들만으로는 침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2) 세계수 화과산.
세계수가 통째로 넘어와 뿌리를 내린다.
- 장점 : 단기간에 훨씬 많은 생명 에너지를 직접 흡수할 수 있어서 급성장이 가능하다.
- 단점 :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만큼 본체가 위험에 노출된다.
“아무튼 이 앞에 세계수나 게이트가 있다는 말이네.”
창밖에 시선을 두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다운에게 알파가 조언했다.
<이제 생명 에너지도 충분한데 결계 옆으로 돌아가는 걸 추천드립니다.>
“얼마나 돌아가야 되는데?”
<…….>
그 말에 선뜻 대꾸를 못하는 알파를 대신해 바하무트가 대답했다.
[현재 위치에선 얼마나 돌아가야 할지 가늠이 안 되나이다.]
“그렇게나 넓다고?”
<……아마도 날씨 조작 수준의 결계라서 범위가 넓은 듯합니다.>
[어쨌거나 그럼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네요. 뭐하셈? 바로 들어가죠?]
“그러자. 더 시간 끌어서 뭐해.”
고작 날씨 조작 따위가 그들의 강행 돌파를 막을 수 없었다.
정다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하무트가 눈을 번뜩이며 함성을 질렀다.
[과연 주인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나이다! 바로 진입하겠나이다!]
[호우!]
토끼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내용이 달랐다.
[그래서 여자냐고, 남자냐고요! 내가 깜빡할 줄 알았지?]
[……쳇.]
토끼의 집요함에 바하무트는 결국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크흠. 소인은 본래 태어나기를 마녀들의 실험체 아이스 그렘린으로 창조되었나이다. 기억하십니까?]
“맞아. 그랬지.”
[그래서요? 그래서요?]
[실험으로 태어난 호문크루스들은 생식이 불가능합니다. 애를 낳는 게 아니라 실험관에서 태어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요? 그래서요?]
“야, 그만해.”
뭔가를 눈치챈 정다운이 황급히 자꾸 재촉하는 토끼를 말렸다.
[성별이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
“아아…… 결국.”
결국 대답을 들어 버리고 만 정다운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토끼는 신나 버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면?
[뭐야! 고자였네! 꺄르륵!]
[아니야! 내 그렇게 놀릴 줄 알고 말 안하려 했다! 이 망할 선배!]
휘오오오-!
바하무트의 분노가 비행 문어 골렘에 더욱 추진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이 결계 속으로 진입했다.
풍덩!
“……!”
갑자기 화창하던 하늘이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팍! 하고 꺼졌다.
[큭! 날씨 조작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눈앞이 캄캄해지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바하무트가 다급히 문어 골렘을 멈춰 세웠다.
“알파! 분석해!”
<분석 완료! 다행히 그냥 어둡기만 할 뿐, 심연의 안개는 아닙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어둠에 익숙해질 겁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들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중국의 중앙에 위치한 지역 섬서성(陝西省).
중국의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인구수는 약 4천만 명.
그리고 그 숫자는 하루아침에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끼히히히!
어느 날 갑자기 북쪽에서 밀려 들어온 수많은 괴물들.
놈들의 침략에 섬서성의 주민들은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웠다.
비록 인구가 10분의 1이 되었지만, 제남시의 인구가 100분의 1까지 줄었던 것을 생각하면, 섬서성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섬서성 북쪽을 가로지르는 ‘만리장성’ 덕분이었다.
[만리장성이 뭔데요?]
토끼의 질문에 정다운이 교과서에서 본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해 주었다.
“옛날에 진시황제라는 사람이 북방의 흉노족을 막으려고 쌓은 성벽이야. 길이가 10000리가 넘어서 만리장성이래.”
[님 같은 짓을 하는 종자가 지구에는 많았나 보네요. 이 얼마나 끔찍한 세계인 거지?]
토끼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진짜 알뜰살뜰 잘 짓긴 했네요. 벽이 엄청 높은 건 아닌데 산 지형을 잘 이용했어요.]
“그러게. 저런 건 나도 좀 본받아야겠는데.”
만리장성의 높이는 약 9미터.
정다운이 평소에 짓던 전망대 높이와 비슷하거나 좀 더 낮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위치가 하필 산의 능선을 따라 지어져 있어서, 산등성이의 높이까지 성벽에 포함되는 구조였다.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만리장성’이 가까스로 막아 내고 있는 수많은 괴물 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끼히히히!
“……해골 병사들 오랜만에 보네.”
[그러게요. 반갑네요.]
멍하니 대화를 주고받는 정다운과 토끼의 말에는 영혼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결계 안의 세상이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언데드 군단.
그리고 그들의 침공을 만리장성 위에서 원거리 스킬을 날리며 수성전을 펼치고 있는 주민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다 모르겠고, 그들이 정신이 멍한 이유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캬아악!
크러렁-!
높고 긴 만리장성의 담장 위로 포악한 머리통을 치켜들고 포효하는 공포스런 괴물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릴 적 꿈에서나 나오던.
꿈속에서 집을 부수고 사람들에게 포효하던.
“공룡이라니…….”
결국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만 정다운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생명의 용을 섬기는 알파는 정말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며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이렇게 불경스러울 수가! 본 드래곤(Bone Dragon)이라니요! 이건 너무 참혹합니다!]
정다운이 정정해 주었다.
“아냐. 저건 일단 본 다이노소어(Bone Dinosaur)라고 해 두자. 공룡 화석이 살아 움직이는 거니까.”
캬아악!
때마침 사나운 폭군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이 거대한 입으로 만리장성을 위에서부터 아작아작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겁하며 그 양옆에서 놈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수많은 각성자들이 있었다.
“막아라! 폭군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한다!”
“작열하라! 태양의 힘이여!”
콰콰쾅!
사방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들어 폭군의 새하얀 두개골 위에서 폭발했다.
“캬아악!”
잠시 휘청거린 폭군 티라노가 얼굴을 흔들어 화염을 털어 냈다.
그러곤 오히려 크게 분노하며 뼈로 이루어진 꼬리로 만리장성을 후려쳤다.
꽈르릉!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만리장성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해골 병사들의 눈에서 사악한 빛이 터져 나왔다.
끼히야!
끼햐하하!
놈들이 몰려온다!
“아, 안 돼! 지원병! 성벽을 막아!”
“놈들이 못 들어오게 해!”
“막아! 막으라고!”
“아냐! 폭군부터 막아! 얼굴이 아니라 하체부터 공격하란 말이야!”
어둠이 깔린 섬서성에 혼란과 공포가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머리 위로 점점 드리워지는 거대한 폭군의 그림자.
그것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절망과 인간의 무력함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외침이 하늘에 닿았다.
“저 정도면 굳이 내릴 것도 없겠는데?”
하늘 위에서 유유히 날고 있던 정체불명의 비행 문어.
그 안에서 정다운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처처처처척!
“……!”
갑자기 성벽이 메꿔졌다.
그리고 하나 더.
“정화. 범위형.”
그 순간 혼돈으로 가득 찬 섬서성의 땅 위에.
화아아악!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
그 경이로운 광경에 아래 있던 사람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유, 유에프오(U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