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70)화 (370/393)

<던전리셋 외전 25화>

쿠르릉!

이날 산동성에는 거센 지진이 몇 번이나 온 땅을 뒤흔들었다.

말 그대로 산사태였다.

구름마저 뚫고 솟구쳐 있던 화과산이 폭삭 무너졌고.

그 위에서 태어났던 거대한 암석 거인 미후왕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을씨년스러운 돌산.

“후으읍!”

흑토끼가 그 돌산 위에 올라서서 주인을 잃고 방황하는 생명 에너지를 마음껏 빨아들였다.

그 힘은 고스란히 종말의 서 안에 저장되었으며, 종말의 서는 그 안에서 ‘미후왕’의 기록을 베껴 내는 데 성공했다.

[흐흐. 아주 좋군. 이번 기록은 제법 쓸 만하구나.] 

<세계수가 기록을 절충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거기까진 너무 욕심이겠지요.>

[……있는 놈들이 더하군.]

아쉽다는 듯이 대꾸하는 알파의 말에 종말의 서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 다 끝났으니까 모두 내려오세요!”

정다운이 사방에 떠 있는 하늘 공원들을 향해 손짓하자, 하늘 공원들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공중 계단 스킬이 마스터 레벨이 되면서 생긴 기능 ‘부유섬’.

이 능력 덕분에 정다운은 공중 계단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부유섬의 이동 속도가 조금만 빨랐어도 이걸 타고 갔을 텐데, 너무 느리단 말이지.’

고오오!

“으헉! 공원이 움직인다!”

“이건 또 무슨 스킬이야?”

“저 사람 뭐야, 나 무서워…….”

한편 하늘 공원에 있던 사람들은 오줌이라도 쌀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 후, 하늘 공원은 무사히 지상으로 착륙했다.

하지만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선뜻 공원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들도 많았지만, 너무 경악스러운 일을 연거푸 경험했더니 다리가 완전히 풀려 버린 것이다.

특히나 귀환자였던 주령은 다른 누구보다도 충격이 컸다.

‘맙소사. 움직이는 부유섬이라니. 이러면 마치 무간도 같잖아? 게다가 저 구름들은 낙원…….’

무간도, 그리고 낙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이름들이었다.

그 끔찍한 이름들을 손짓만으로 떠올리게 만들어 내는.

그 무섭던 화과산과 미후왕을 웃으면서 박살 내는 정다운이라는 존재가 주령의 눈에는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옆에 토끼 도우미가 붙어 있나 했더니, 역시 던전 게임과 관련된 인물이었어.’

화들짝!

우연히 정다운과 눈이 마주친 주령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종말의 서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무척 흡족했다.

[보기 좋군. 역시 인간들이란 압도적인 공포로 지배해야 하는 법이지.]

<종말의 서다운 헛소리군요. 이런 분위기일수록 저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면 모두의 경외를 받을 겁니다.>

[그건 당근과 채찍으로 마음을 휘어잡겠다는 말인가? 실로 교묘한 전략이구나. 나보다 악랄해.]

<흥. 왜 말을 그렇게 합니까? 삐뚤어진 책 같으니.>

매사에 종말의 서와 티격태격하는 알파였다.

알파가 정다운에게 조언했다.

<이곳에 세계수의 화분을 꺼내 두신다면, 조금이나마 성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바하무트, 창고에서 세계수 화분 좀 꺼내 줄래?”

[명을 받듭니다.]

바하무트가 아기 세계수를 조심히 꺼내 왔다.

“뀨우…….”

화분 안에 뽀뀨가 새싹을 끌어안고 도롱도롱 잠들어 있었다.

정다운은 뽀뀨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화분을 받아 들고 한때 미후왕이었던 돌산 위로 가져갔다.

그러자 누가 말하기도 전에 세계수의 새싹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뾱!

새싹 위에 작은 떡잎 하나가 돋아나며, 옆에서 자는 뽀뀨의 도톰한 볼을 밀어냈다.

번쩍!

[업적 달성!]

“떡잎 하나!”

세계수에 떡잎이 돋아났어요!

떡잎은 성장에 필요한 잉여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소랍니다!

- 보상 : 생존자 전체 회복!

“이건?”

새로 돋아난 세계수의 떡잎이 파르르 떨리더니, 사방에 흩뿌려진 기운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던 흑토끼과 종말의 서가 아기 세계수를 비웃었다.

“으하핫. 이게 뭐야? 진짜 개미 눈곱만큼 빨아들이네요.”

[쯧. 떡잎 하나로는 저장 공간이 부족해서 그럴 거다. 하지만 미처 저장하지 못한 기운을 사용하는 방법이 꼭 제 부모를 닮았구나.]

파앗!

그 순간 보상이 이루어졌다.

떡잎을 다 채우고 배가 부른 아기 세계수가 허공에 남은 음식들(?)의 일부를 제 마음대로 사용한 것이다.

[생존자 전체 회복!]

파아앗!

하늘 위에서 은빛 가루가 흩날리며 화과산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 효과가 아주 대단했다.

마치 던전 게임에서 이루어졌던 수준으로.

“헉. 이거 뭐야? 내 상처들이 없어지고 있어!”

“나, 나도! 체력이 돌아오고 있어!”

탄성을 터뜨리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화과산의 생존자들.

화과산에게 제물로 바쳐지면서 돌 원숭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던 부상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고 있었다.

“기적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칫.

습관대로 신에게 기도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발 늦게 정다운의 눈치를 봤다.

원리는 모르지만 이러한 기적을 실제로 이뤄 낸 인물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면, 그 내용은 절망만이 가득하던 이 땅 위를 정다운이 지나가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옳으리라.

그리고 그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고스란히 아기 세계수의 업적으로 쌓였다.

번쩍!

[‘생존의 가호’가 2레벨로 발전합니다.]

[‘생존의 가호’가 3레벨로 발전합니다.] 

 

<세계수의 가호>

생존의 가호 (3레벨)

-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몸과 마음이 점점 회복된다.

레벨이 오를수록 회복량과 속도가 올라간다.

“……뽀뀨!”

곤히 자고 있던 뽀뀨는 자꾸 옆에서 세계수의 새싹이 반짝거리자 잠이 덜 깬 눈으로 새싹을 째려봤다.

그러곤 잠투정하듯 작은 앞발로 통통한 떡잎 대가리를 한 대 후려갈겼다.

딱콩!

…….

우연인지 맞아서인지, 아무튼 세계수 새싹은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 새싹 주제에 제법이네요. 정작 자기 가호 레벨은 낮으면서, 주변에 넘쳐 나는 잉여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끌어와서 대단위 마법을 펼쳤어요. 본능적으로 제 부모를 흉내 낸 거예요.”

흑토끼는 세계수의 새싹을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될 재목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던가.

“아마 이 아이는 언젠가 제 부모처럼 엄청 훌륭한 나무로 자라날 것 같네요.”

“그래도 너무 무럭무럭 자라면 안 돼. 그럼 내가 가지치기해 버릴 거니까.”

오싹.

정다운의 노파심 가득한 협박에 아기 세계수는 슬그머니 자신의 떡잎을 뽀뀨의 뒤로 숨겼다.

*   *   *

얼마 후.

화과산이 소멸되었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산동성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그 기쁜 소식에 지금껏 어두운 지하도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던 생존자들이 도시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어!”

빛나는 태양.

끝없는 지평선.

화과산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던 그들의 꿈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떠나실 건가요?”

“네, 바빠서요.”

왕웨이와 주령은 떠날 채비를 갖추는 정다운과 토끼 앞에 서 있었다.

“너무 감사해서 뭐라도 보답을 해 드리고 싶은데, 진짜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네. 필요한 건 다 가지고 있어서요.”

“…….”

잘난 척도 허세도 아닌,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듯한 정다운의 대답에 왕웨이는 말문이 막혔다.

토끼도 옆에서 낄낄댔다.

[됐네요. 님들이 주는 보답을 누구 코에 붙이겠음? 쫄딱 망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들 주제에 속 좋은 소리나 하시네요.]

“팩트라서 가슴이 아프군요. 거지 혐오를 멈춰 주시길.”

왕웨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정다운을 향해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남시의 모든 사람들은 오늘 정다운 님께 받은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불러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건 결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이미 왕웨이는 제남시를 이끄는 새로운 시장으로 추대되고 있었다.

기존에 중국을 지배하던 정부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국가와 민족에 상관없이 도시 국가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상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였다.

그리고 주령은 귀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웨이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고 있었다.

오히려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귀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전투력이 없어서 귀환자라는 사실을 숨겨 왔던 주령.

그녀는 이번에 화과산의 사람들을 모두 공중에 띄워 올린 활약 하나로 모두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다운을 바라보는 주령의 얼굴에는 살짝 질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과연 이분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날이 있기나 할까?’

마침 정다운의 앞에는 앞으로 그가 타고 갈 거대한 비행 문어 골렘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중력의 방향을 뒤트는 주령의 반중력 스킬이 초라하게도, 정다운의 비행 골렘은 중력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비행선이었다.

하늘 공원을 조종했던 부유섬 기능으로 자체적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연료도 충분히 얻어서 폭발적인 추진력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님! 이 바하무트 언제든 준비되었나이다!]

[호우!]

[호우!]

정다운이 만들어 준 햇빛 차단 밀짚모자를 쓴 바하무트가 비행 문어 골렘의 조종석에서 파이팅 넘치는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자 문어 골렘 곳곳에 착석한 미니 바하무트들이 해적 부하처럼 한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바하무트가 자신의 몸에서 눈덩이를 조금씩 떼어 내 만든 그의 분신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미니 블리자드를 써서 문어 골렘의 운전을 보조할 것이었다.

[완벽.]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토끼는 어느새 애꾸눈 안경을 착용하고 그 위에 올라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자, 선장님 갑시다요! 여봐라! 뱃머리를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라!]

“잠깐. 출발하기 전에 여기에 게이트 하나만 열어 두고 가자. 나중에 진짜 여기 사람들한테 부탁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히익! 악마다! 이 거지들한테 진짜로 보답을 받아먹으려고요? 뼛속까지?]

“누가 뼛속까지래? 혹시 모르잖아. 도중에 길이 엇갈려서 어머니가 여기를 지나가실지도.”

[아항.]

정다운은 왕웨이에게 다가가 사진 한 장을 넘겨주자, 왕웨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분은 누구신지요.”

“저희 어머니인데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저희 어머니가 이 근처를 지나가시면 저에게 연락 좀 주시겠어요?”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락을 드리면 좋을까요? 아시다시피 요즘 전화나 인터넷이 먹통이 된 형편이다 보니.”

[그건 걱정 마셈.]

토끼가 그 말에 대꾸하는 순간.

딸랑.

왕웨이의 그림자 속에서 영롱한 방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이미 내가 알고 있을 거니까요.]

“…….”

의미심장하게 히죽 웃는 토끼의 표정에 왕웨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발밑에서 보이지 않는 눈동자들이 자신을 훑어보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 사진 속 사람을 뜬금 인질로 삼는다거나, 괜히 배은망덕한 일은 하지 말아 주셈. 알겠죠?]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야 모르는 일이죠. 난 사실 인간을 별로 안 믿거든요. 주령 님은 아시겠지만.]

움찔.

그 말에 옆에서 몸을 떠는 주령이었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한때 주령의 연인이자, 팀의 리더였던 사내.

그는 탁월한 리더십과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올곧은 인성으로 동료들을 이끌어 던전을 공략해 나가던 뛰어난 참가자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주령을 인질로 잡은 적대 세력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흔하디흔한, 뻔하디뻔한 이야기.

착해 빠진 강자의 말로였다.

“……걱정 마. 두 번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할 거니까. 내가.”

주령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토끼의 눈을 쳐다봤다.

올곧은 눈빛.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주어진 특혜에 비해 우는소리만 하던 겁쟁이가 아니었다.

주령은 갑자기 왕웨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다부진 팔을 꼭 붙들며 말했다.

“그래,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이 사람을.”

“……주령 씨?”

갑자기 자신에게 팔짱을 끼는 주령의 행동에 왕웨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히죽.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 광경에 토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기억났다.

바로 이 모습이었다.

일찍 죽어 버린 참가자 따위는 금방 잊어버려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왕웨이는 주령에게 큰 상처만을 남기고 떠나간 연인이었다.

비록 지금은 던전에서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각성자가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령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완전히 바닥에서부터 그 인연을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요. 두 번째 얻은 기회니까 잘해 보셈. 이번에 뒈지면 진짜 죽는 거니까요.] 

그렇기에…….

주령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방울 속에 담긴 토끼의 마음을.

앞으로 제남시를 이끌게 된 왕웨이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부족한 힘에 비해 얻게 된 권력.

그것을 질투하는 숱한 인간들의 욕망이 또다시 그를 위협할 터.

‘그래. 바로 그때처럼.’

그러나 그날, 그 모든 광경을 멀리서 구경만 하던 토끼는 이제 변해 있었다.

마녀의 방울은 왕웨이를 감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주령은 토끼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진심으로. 그리고 늦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흥. 이제 와서? 인사가 늦었어요.]

그리고.

괴로움에 못 이겨 모든 걸 포기하려 했던 그때의 자신을 유독 혹독하게 대해 줬던 일조차도.

“고마웠어.”

[커플 꺼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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