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24화>
번쩍!
바위의 금을 타고 눈부신 빛이 새어 나왔다.
쩌적! 쩍! 콰직!
마치 알이 깨지며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바위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크! 뭔지 몰라도 일단 튀어야겠음!”
불길함을 느낀 흑토끼가 잽싸게 한 손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뒤로 뛰어올랐다.
그 밑으로 말벌 하수인이 날아와 흑토끼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종말의 서는 말했다.
[격이 낮은 세계수 따위가 자기보다 높은 기록을 강제로 깨우려 하는구나. 어리석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군.]
그렇다. 세계수 화과산은 지금 분수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지구에서 흡수한 막대한 생명 에너지 덕분에 이렇게 산처럼 성장하긴 했지만, 문제는 그 근간이 되는 세계수의 격이 너무 낮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내내 화과산 돌 원숭이의 기록을 간신히 첫 구절만 베끼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었던 것.
그 결과가 바로 숫자만 엄청 많은 돌 원숭이들이었다.
「동승신주 바다 동쪽 오래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엔 화과산(花果山)이라는 일 년 사계절 꽃이 피고 일 년 내내 과일이 가득한 선인의 산이 있었다.
그 산꼭대기에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바위에 영기(靈氣)가 깃들더니 돌 원숭이(石猿)가 태어났다.」
바위 속에 깃든 막대한 영기.
즉, 생명 에너지.
세계수 화과산은 자신의 모든 힘을 이용해 기록의 첫 구절을 벗어나 그다음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이름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다.
미후왕(美猴王).
필마온(弼馬溫).
제천대성(齊天大聖).
기록에 의하면 <화과산 돌 원숭이>를 부르는 호칭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 석 자가 있었으니.
손오공(孫悟空).
쩌저저적!
결국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그런데.
“으잉? 꽝인가요?”
멀리 떨어져 나온 흑토끼가 깨진 바위 속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바위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쯧. 무리를 하더니 결국 실패했는가.]
종말의 서가 세계수를 비웃던 그때, 세계수에게서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미완의 기록!”
1) 기록의 격이 너무 높음!
2) 감당 못함!
3) 현실 가능성을 재탐색!
4) 기록의 격을 절충!
5) 재탐색! 실패! 재탐색! 절충!
세계수의 다급한 마음이 메시지에서도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이미 화과산은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쿠구구구……!
모래시계 형태로 기괴하게 자라나 있던 화과산이 엄청난 먼지와 함께 서서히 주저앉고 있었다.
흡사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엄청난 먼지였다.
정다운은 분홍색 구름덩이 하나를 붙잡고 올라탄 채 그 먼지들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게 꼼꼼히 뭉쳐서 소지품에 집어넣고 있었다.
“베이는 속도가 예전에 비해 많이 느리네. 예전엔 원샷원킬이었는데.”
<별수 없습니다. 에르테아 님의 부재로 인한 성능 저하입니다.>
정다운이 아쉽다며 중얼거리는 말에 알파가 대꾸했다.
창세의 도끼는 작아진 크기만큼이나 성능도 꽤 저하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시간문제일 뿐.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세계수는 천천히 모든 힘을 잃고 착실하게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잠시나마 유예된 덕분에.
세계수는 가까스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기록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번쩍!
[최초 업적 달성!]
“기록의 개방!”
세계수가 <손오공>의 기록을 절충하는 데 결국 성공합니다!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스스로를 매우 칭찬합니다!
- 보상 : 기록 <미후왕>
“혼자 칭찬하지 마!”
메시지를 본 흑토끼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정다운도 벙찐 표정이었다.
“와, 아무리 자기가 세계수라 해도 스스로에게 업적을 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말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업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중요할 뿐. 화과산에서 조속히 물러나기를 조언합니다.>
알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는 화과산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끼룩! 끼루룩!
화과산에 달라붙어 있던 수많은 돌 원숭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아악-!”
기뻐하라! 경배하라!
위대한 원숭이들의 왕이 이 땅에 현신하셨도다!
번쩍!
“……!”
그 순간 화과산에 붙어 있던 모든 돌 원숭이들에게서 일제히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눈부신 빛무리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무럭무럭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모든 돌 원숭이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것이다.
<위험합니다! 대피하십시오! 세계수가 자신의 모든 힘을 저 존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미후왕(美猴王)이 현신합니다!]
세계수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콰르릉!
결국 화과산이 완전히 무너지며 그 잔해 위에 거대한 돌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다운의 철갑 골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괴물 원숭이였다.
[크아아아!]
“……!”
놈이 하늘을 향해 사납게 포효하자, 그 기세에 온 땅과 하늘이 벌벌 떨었다.
“으아아…….”
하늘 공원으로 대피했던 사람들은 그 위압적인 투기에 짓눌려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그나마 간신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은 최소 각성자, 혹은 귀환자인 주령뿐이었다.
‘말도 안 돼. 손오공이라니!’
하지만 공포에 짓눌린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란 말인가.
저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자신들이 무얼 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다운도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진심으로.
“미친. 왜 저렇게 멋있게 생겼지?”
그렇다.
미후왕은 돌덩이들을 뭉쳐 만든 골렘이라 하기엔 퀄리티가 지나치게 뛰어났다.
로봇처럼 각진 어깨와 골격.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몸에 바위로 된 갑주를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전쟁터에 나간 왕이 쓸 법한 화려한 투구가 쓰여 있었다.
정다운이 지금껏 만들어 낸 수제 골렘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후왕의 퀄리티는 정도가 지나쳤다.
장르가 아예 달랐다.
그그극.
지척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은 미후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구름을 밟고 하늘에 떠 있는 정다운을 향해 사납게 기염을 토해 냈다.
[누가 당연한 소리를 하였는가? 본좌는…… 미후왕이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원숭이들의 왕이 바로 나다!]
“아, 그러냐.”
정다운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외모에 자부심이 가득한 녀석이었다.
그렇다. 미후왕(美猴王).
아무래도 이계의 세계수는 기록 그대로 ‘잘생긴 원숭이들의 왕’을 최선을 다해 재현한 것 같았다.
“히익! 원숭이가 말도 한다!”
어느새 정다운 곁으로 돌아온 흑토끼가 비명을 질렀다. 물론 좋아서.
“빨리 쟤 좀 잡아 주셈! 쟤 잡으면 분명 내 기록이 될 거예요! 나도 말하는 부하 만들래! 나도 바하무트 같은 부하 만들래!”
크르륵!
정다운의 옷깃을 마구 흔들며 떼를 쓰는 토끼의 말에 미후왕이 이번엔 토끼를 노려보며 고함을 쳤다.
[누구인가! 누가 감히 본좌를 부하로 만들 생각을 하는가!]
쿠와앙!
말보단 행동.
미후왕의 육중한 팔이 하늘도 찢을 기세로 정다운과 토끼에게 내리쳤다.
“히익! 돌 주제에 왜 이렇게 빠름?”
공기와 구름을 찢어발기며 짓쳐 드는 미후왕의 공격에 정다운과 흑토끼가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흑토끼는 애완 말벌을 타고.
정다운은 문어 열차를 꺼내 타고.
부오오!
처처처처척!
“일단 돌이니까 깨지긴 하겠지!”
정다운은 큰 호선을 그리며 미후왕의 옆구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미후왕도 빠르게 몸을 틀어 정다운을 향해 다시 팔을 휘둘렀다.
[가소롭도다! 이 날파리 같은 놈이 감히 본좌를 공격하느냐!]
쿠와앙!
바람이 미친 듯이 나부끼며 정다운의 문어 열차를 뒤흔들었다.
“조심하셈! 크기가 너무 커서 살짝만 스쳐도 아웃임요!”
흑토끼가 반대쪽에서 다급히 소리치는 말에 정다운이 소지품을 활짝 개방했다.
“나도 큰 공격은 가능하다고! 나와라! 흙기둥!”
쑤와악!
그 순간 저번에 편의점 건물을 동강 냈던 거대한 흙기둥이 소지품 안에서 쑤욱 튀어나왔다.
“돌리기!”
고오오오!
정다운이 흙기둥을 미후왕을 향해 휘둘렀다.
[이 무슨……!]
당황한 미후왕은 다급히 팔을 들어 흙기둥을 막아 냈다.
쿠와앙!
엄청난 흙먼지가 폭발했다.
미후왕의 방어에 막힌 흙기둥이 처참히 뭉개졌다.
아무리 잘 뭉쳐도 흙은 흙일 뿐, 단단한 암석 거인을 상대로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게와 크기 탓에 미후왕도 충격이 컸다.
아니, 그보단 마음의 충격이 더 컸다.
[맙소사! 이건 여의봉 아닌가!]
“아니, 그냥 흙인데?”
[……!]
정다운의 대답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자 미후왕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이 작은 인간이 흙기둥을 막아 낸 팔 위에 올라타 있었다.
곡괭이를 들고.
“돌 깨기!”
콰직!
그가 가차 없이 곡괭이를 내리치자, 거대한 미후왕의 팔에 금이 갔다.
[무슨!?]
미후왕은 두 번 더 놀랐다.
이 작달만한 인간 나부랭이가 고작 곡괭이 따위로 자신을 공격했다는 것에 놀랐고.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콰직! 콰직! 콰직!
짧은 순간에 그 하찮은 공격을 엄청난 속도로 반복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그리고.
콰르릉!
[……!?]
무게가 무거운 만큼 깨지는 것도 빨랐다.
고작 곡괭이질 몇 번에 그의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쿠웅!
육중한 그의 팔이 추락한 땅이 움푹 주저앉았다.
갑자기 외팔이가 된 미후왕이 어리둥절해서 자신의 팔꿈치를 쳐다봤다.
[……내 팔이 왜 이렇게 쉽게?]
상상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아무리 위대한 원숭이들의 왕이라도 잠시 머릿속이 하얘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꼴을 보며 정다운과 흑토끼가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얼굴로 동시에 히죽 웃었다.
“이야, 너? 재생이 안 되나 보네?”
“이러면 덩치만 산만 하지, 흙 골렘보다도 못한 거 아님?”
오싹.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그들의 미소에 미후왕은 영문 모를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무, 무슨 소리인가! 본좌는 재생이 된다! 이까짓 팔쯤 부러져도 얼마든지!]
그가 떨어진 자신의 팔을 얼른 주워들고 부러진 팔꿈치 위에 가져가 붙였다.
툭. 툭툭.
열심히 붙였다.
그리고 조심히 손을 뗐더니.
쿵.
[…….]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미후왕은 냉큼 팔을 다시 주워들고 다시 한번 재생을 시도했다.
툭. 툭툭.
철컥?
[오?]
“오?”
미후왕과 정다운, 흑토끼의 눈에 동시에 이채가 떠올랐다.
“진짜 되나요?”
이번엔 부러진 팔이 갑주 사이에 교묘히 걸쳐졌다.
팔에서 조심히 손을 뗐는데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크흡.]
미후왕이 부러진 손을 신중히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시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게 아닌가!
[크흐, 크하하!]
그제야 미후왕이 자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았느냐! 나는 미후왕! 위대한……!]
쿵.
반전은 없었다.
몸이 흔들리니까 팔이 여지없이 다시 떨어지고 말았다.
[…….]
“…….”
잠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렇다.
화과산의 기록을 다 뒤져 보아도 미후왕의 몸이 재생이 된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돌은 흙처럼 점성이 없지 않은가.
다시 뭉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오케이. 어떤 놈인지 알았으니까 슬슬 정리하자.”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두 주먹을 우두둑거렸다.
“토끼야, 방울은?”
“아까 거기 그대로 있죠!”
흑토끼가 쪼르르 다가와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
그 소리에 화답하는 수많은 마녀의 방울 소리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이제는 무너지고 없는 화과산.
그곳에는 여전히 아까 심어 두었던 방울들이 깃들어 있었다.
“그림자 광부들 출동.”
미요옹!
정다운의 말에 미후왕이라는 거인의 발밑에서 작은 난쟁이 광부들이 일제히 곡괭이를 치켜들었다.
[이것들은 또 무슨…….]
이미 미후왕은 처음의 서슬 퍼런 기세를 잃고 말았다.
그 앞에서 정다운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목 앞을 그으며 그림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 부숴 버려.”
냐앙!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미후왕은 자신의 다리를 타고 기세등등하게 걸어 올라오는 그림벨들을 보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크륵? 무, 무어냐! 이 난쟁이들이 감히 어딜 올라오느냐!]
돌깨기 (X17)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뭐야! 떨어지거라! 내 몸을 어쩌려는 것이냐! 안 돼!]
쩌적! 쩌적! 쩌적! 쩌적!
곡괭이질이 시작되자, 미후왕은 발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다! 본좌는 이제 막 태어났단 말이다! 정정당당하게 무력으로 겨루자! 본좌는 무소불위 천하무적의 위대한 원숭이들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미후왕을 향해 흑토끼는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반갑다, 내 하수인아. 우리 같이 서쪽으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