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65)화 (365/393)

<던전리셋 외전 20화>

‘뭐하는 사람들이지?’

왕웨이는 신중한 눈빛으로 정다운과 흑토끼의 정체를 살폈다.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정평이 나 있는 생존자들의 대표였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변수에 놀라긴 했지만,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이런 곳에서 나와 같은 스킬을 쓰는 각성자를 발견할 줄이야. 이건 분명히 우리 계획에 도움이 된다.’

모든 데미지와 고통을 대신 맞아 주는 스킬 수호의 보호막은 게임으로 치면 레어급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매우 특별한 스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스킬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왕웨이의 눈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깝다. 이 사람들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더 나은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을.’

그는 확신했다.

이들 또한 자신들처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숨어 들어온 각성자라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 어차피 대의는 같으니까. 같이 움직이자고 해야겠어.’

끄덕.

왕웨이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동료들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오이를 나눠 먹었다.

아사삭? 

“……!”

“……헉! 이게 왜 내 손에!?”

왕웨이를 포함한 C조 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자신들의 손에 오이가 들려 있었다!

건네받은 적도 없는데 은근슬쩍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뿐.

아삭아삭!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그들의 입은 본능적으로 오이를 미친 듯이 씹기 시작했다.

아삭, 아삭, 아삭, 아삭!

‘시, 시원해애-!’

‘아아! 메마른 사막의 단비 같구나!’

바짝 마른 입안을 가득 채운 수분처럼 모두의 얼굴에도 동시에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평소에 워낙 험악한 인상이었던 왕웨이조차 만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떠올리며 오이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헉?”

왕웨이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 황급히 주변을 살핀 다음, 빠른 걸음으로 정다운과 흑토끼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돌 원숭이들이 이쪽을 눈치채기 전에 빨리 이들을 포섭해야 했다.

“반갑습니다. 저희도 여러분들처럼 각성자입니다. 여러분들도 가족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아뇨?”

“네?”

“네?”

“……?”

묻는 말에 냉큼 대꾸하는 정다운의 표정에는 꾸밈이 없었다.

“가, 각성자 아니십니까?”

“아닌데요?”

순간 말문이 막힌 왕웨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또 와삭.

“헉! 분명 다 먹었는데?”

“뭐지? 마술인가!”

왕웨이를 비롯한 3조 대원들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놈의 오이가 먹어도 먹어도 자꾸만 손에 들려 있었다!

게다가 왕웨이가 이제 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정다운이 자꾸만 뭘 꺼내 주면서 맥을 끊고 있었다.

“이, 이건 또 뭡니까?”

“초고추장이요. 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이거도 찍어 먹어 보시라고요.”

“……?”

작은 종지에 담긴 새빨간 초고추장을 멍하니 쳐다보는 대원들.

정다운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자, 이렇게 찍어서?”

푸욱!

길고 쭉 뻗은 연둣빛 오이를 초고추장에 찍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사삭!

“크으! 역시 이거지!”

오이의 시원한 향내와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이 입안에서 하나가 되며 침샘이라는 것이 폭발해 버렸다!

“헉! 이, 이런 맛이라니!”

“최고야, 이거!”

정다운을 따라 해 본 C조 대원들도 한 템포 늦게 휘둥그레진 눈으로 오이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왕웨이 또한 결사의 눈빛으로 오이를 전투적으로 씹어 먹었다.

“역시 금강산도, 아니 화과산도 식후경이지.”

정다운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흑토끼는 남들과 달랐다.

“히히. 내 취향은 쌈장이지롱.”

푸욱.

치사하게도 흑토끼는 편의점표 쌈장통을 혼자 독점한 채 오이를 찍어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흑토끼의 모습에서 어딘가 이질적인 부분을 포착한 사람이 있었다.

“어? 저 돌덩이!”

반중력 스킬의 소유자 주령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흑토끼는 한 손에 오이를, 다른 한 손에는 쌈장통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화과산을 등반 중인 다른 제물들과 마찬가지로 ‘돌덩이’를 들고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아니, 들고 있지 않았다!

흑토끼의 손은 2개였으니까!

“세상에! 저처럼 반중력 스킬을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

주령의 말에 C조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흑토끼를 쳐다보고 눈을 부릅떴다.

흑토끼가 오이에 쌈장을 찍어 먹느라 돌덩이에서 손을 떼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돌덩이가 그 옆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진짜잖아?”

“반중력 스킬이라니!”

그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수호의 보호막이 레어급 스킬이라면, 주령의 반중력 스킬은 유니크급이었으니까.

“뭐요, 이거요? 에헴.”

그들의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흑토끼가 한껏 우쭐대며 부유석을 자랑했다.

“님들 돌덩이도 부유석으로 만들어 줄까요? 아하, 이미 알아서 잘하고 계시지? 반중력 스킬은 참 재미난 능력이죠.”

뒤에서 스킬은 내 건데 왜 네가 생색내냐고 구시렁대는 정다운의 말은 가볍게 무시해 주는 흑토끼였다.

하지만 흑토끼의 자랑질은 끝나지 않았다.

“에헴. 오랜만에 반응이 좋으니까 특별히 사은품을 드리겠음. 님들 아까 보니 열심히들 달려오던데, 배 좀 찼으면 이거라도 써 볼래요? 달리기가 빨라질 거임.”

흑토끼가 대원들에게 꾸깃꾸깃한 종이 한 뭉치를 내밀었다.

[마법 주문서(복제)]

내구력 : 100/100 (퍼센트)

특수 옵션 : 속도의 룬(1레벨)

“이, 이건!?”

복제 주문서를 받아 들고 비명을 지른 사람은 C조 대원들 중 단 한 명뿐이었다.

반중력 스킬의 주령.

그녀를 보며 흑토끼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죠, 주령 님?”

“……!”

갑자기 흑토끼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또 한 번 놀라는 주령.

“아항, 이런 모습이라 날 못 알아보시나? 그럼 얍!”

그 순간 흑토끼의 몸에서 어둠이 빠져나가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스테이지-1의 악명 높은 도우미.

턱시도 토끼로.

[이러면 알아보겠음?]

“토끼!?”

[오랜만임! 스테이지-1에선 빌빌대던 분이 용케 마지막까지 잘 버티고 귀환했나 보네요?]

“…….”

[에이, 인상 좀 펴요. 내가 예쁜 언니라고 얼마나 잘 챙겨 줬었는데요. 기억 안 나셈?]

“…….”

대답은커녕, 주령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주령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헤이, 예쁜 언니! 좀 더 발버둥 쳐 봐요! 반중력은 좋은 스킬이니까 징징대지 좀 말고요!] 

[되게 허약하시네! 반중력 스킬 사용자가 왜 멀미를 함? 그게 다 근성 부족임! 정신 바짝 차리지 못해욧!]

[이욜, 스킬 영역이 제법 넓어졌네요? 이 정도면 괴물들도 멀미 나게 해서 죽일 수 있겠음! 기특하다!]

“…….”

잘해 줬다고?

따라다니면서 약 올린 기억만 한가득이었다.

[그런데 이제 멀미 안 하나 보네요. 범독수리의 용맹 보상이라도 얻으셨나? 이욜, 그 겁쟁이 토쟁이가 귀환자라니. 다 컸네요, 다 컸어.]

기특하다며 주령의 머리를 쓰다듬는 토끼였다.

그 쓰다듬을 받으며 주령이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째서 지구에 있는…… 아차!”

말을 잇던 주령은 아차 하며 동료들의 표정을 살폈다.

동료들의 의문 가득한 시선들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주령 씨, 귀환자셨습니까? 그런데 왜 여태…….”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제가 귀환자치고는 너무 약하다 보니…….”

주령은 더욱 피곤해져 버렸다.

사실 귀환자라 해서 모두가 다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공격보다 동료들의 전투를 보조해 주는 스킬로 끝까지 던전을 졸업한 참가자들도 있었으니까.

주령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반중력 스킬은 아무리 레벨이 올라도 전투를 보조하고 괴물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기에 최적화된 스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지옥이 되어 버린 지구에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귀환자라는 이미지는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구원자였다.

강력한 스킬로 괴물들을 학살하는…….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지. 항상 죽을까 봐 떨면서 살아왔어. 던전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령은 그동안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령이 귀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몰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맡겨 놓은 듯이 살려 달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리고 막상 그녀의 힘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선 저주까지 퍼부었다.

귀환자가 왜 몸을 사리냐고.

귀환자가 왜 약한 척을 하냐고.

너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지 않냐고.

‘그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 저들도 당장 자기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절박하겠지. 하지만…… 나도 너무 힘든걸. 나도 다치면 아픈걸.’

주령은 이미 그런 과정을 수도 없이 경험한 후였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동료들에게조차 자신이 귀환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자신이 그저 조금 특별한 스킬을 가진, 레벨이 제법 높은 각성자라고 자신을 낮췄더니 모두가 자신을 좋아해 주었다.

지구는 던전처럼 업적이나 레벨 업 메시지가 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레벨 업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 틀렸다.

토끼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 버린 것이다.

“주령 씨.”

왕웨이가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주령의 몸이 본능적으로 흠칫 떨렸다.

그리고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왕웨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령 씨.”

“……네.”

“작전 시작입니다.”

“네?”

왕웨이는 주령이 귀환자인지 각성자인지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시선을 주령의 등 뒤를 지나 화과산 아래쪽 상황을 주시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A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콰쾅! 쾅!

때마침 화과산 근처에서 A조가 본격적으로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룩? 끼라락! 

우끼끼-!

화과산의 돌 원숭이들이 A조가 소란을 피우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왕웨이가 대원들을 돌아보며 다급히 외쳤다.

“여기서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B조까지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주령 씨!”

“네, 넵!”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주령.

왕웨이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반중력 스킬을 다시 좀 부탁드립니다!”

“아! 죄송해요!”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어느새 대원들에게 걸려 있던 반중력 스킬이 다 풀려 있었다.

주령은 스킬을 다시 사용하면서, 동료들에게 토끼가 나눠 준 룬 주문서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어서 이 종이를 찢으세요! 이건 움직임이 빨라지는 마법 주문서예요!”

“정말입니까? 이렇게 좋은 아이템이 있었다니! 감사합니다, 주령 씨!”

쫙, 쫙!

“오오! 진짜다!”

대원들이 주령의 말대로 주문서를 찢자, 그 순간 움직임이 민첩해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주문서의 힘과 반중력의 효과가 합쳐지자,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화과산을 오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좋았어! 이대로 계속 달립시다!”

“넵! 가자!”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꼬르륵.

“응? 왜 배가 고파?”

속도는 빨라졌는데, 급격히 허기가 졌다.

“설마 부작용인가?”

“주령 씨, 원래 이런 건가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주령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주령의 시선은 주문서를 건네준 흑토끼에게로 향했다.

“뭐야? 룬 주문서에 이런 부작용은 없었잖아?”

흑토끼는 정다운을 힐끔거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네, 그거 부작용 맞음. 그거 불법 복사본이거든요. 주문서 내용을 끝까지 확인했어야죠.”

“……!”

“그런데 님들 재미있는 계획을 세웠네요? 우리도 마침 비슷한 계획이었는데.”

“그러게.”

마침 정다운도 화과산 밑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치 산책 나와서 경치를 구경하듯이 태평하게.

“저러다 우리 애들이랑 만나겠는데?”

“앗, 말하는 순간 만나 버렸음!”

크워어어!

때마침 끝도 없이 몰려드는 돌 원숭이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A조 대원들 앞으로 거대한 덩치들이 나타났다.

“헉! 이 괴물들은 또 뭐야!”

“철갑으로 무장한 고릴라들입니다!”

“이런 제기랄! 돌 원숭이들도 모자라서!”

A조 대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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