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11화>
* * *
그동안 종말의 서는 늘 궁금했었다.
실로 완벽하게 계획했던 자신의 오랜 숙원이 왜 이딴 놈들 때문에 망쳐졌는지를.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언제나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다.
[네놈들……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거냐.ㅇ_ㅇ]
“좋으면서 뭘 그래? 얼른 제물이나 삼켜.”
[나야 물론 좋지만.ㅇ_ㅇ]
파라락.
정다운이 소지품에서 큼직한 고깃덩이를 꺼내 들자, 토끼가 냉큼 그 밑으로 종말의 서를 활짝 펼쳤다.
마치 종말의 서 자체가 제단이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쨌든 제물은 고맙게 받도록 하겠다.ㅇ_ㅇ]
파아앗!
큼직한 고깃덩이가 황금빛에 휩싸여 종말의 서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꿀-꺽.
그 순간 느껴지는 포만감에 종말의 서는 음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으! 좋구나! 힘이 차오른……!]
“뭐해? 많으니까 더 먹어.”
[으어억? 으냠냠…….]
“옳지. 잘 먹네.”
꿀꺽꿀꺽!
정다운에게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제물들을 종말의 서는 책장을 푸드덕거리며 게걸스럽게 탐식했다.
간만의 포식이었다.
* * *
파앗!
잠시 후, 종말의 서에 깃든 생명 에너지를 이용해 알파가 컴퓨터를 실행시켰다.
모니터 위로 익숙한 화면이 뜨자 정다운은 크게 감격했다.
“크으!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윈도우지? 진짜 반갑다. 아버지, 여기에 게임도 있어요?”
“카드 게임과 스도쿠 정도. 그보다 네 엄마한테 왔던 동영상이 바로 이거다.”
딸깍.
정수호는 다운로드 폴더에서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 가득히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흠흠, 마이크 테스트. 여보, 잘 보여요?”
“……!”
[에엥?]
영상을 확인한 순간 정다운과 토끼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 너머에는 헤진 청바지와 부츠, 민소매티를 입고 있는 건강미 넘치는 50대 여성이 서 있었다.
크고 새까만 자동차 타이어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로.
“……타이어?”
임 조교도 고개를 갸웃했다.
호로록.
어느새 뒤에서는 정수호가 다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대체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들놈이 편의점 하나를 통째로 털어 와 줘서 커피는 넉넉했다.
그리고 이 커피색과 비슷한,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의 아내가 이쪽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여보, 지금부터 우리 같은 비각성자가 괴물들 상대하는 요령을 알려 줄 테니까 잘 보고 따라 해 봐요. 알았죠?”
이런 시국에도 참으로 활기찬 사람이었다. 언제나처럼.
* * *
정다운의 어머니 최민서.
그녀는 유명한 조각가였다.
전시 경력도 풍부하고, 해외에서도 제법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다.
이번에 파리 전시도 초청을 받고 간 것이었다.
파리의 레지던시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무르며 작품을 만든 뒤 전시를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 최민서의 본래 일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고 말았다.
파리 공항에 게이트가 터진 것이다.
공항 폐쇄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최민서의 동영상은 그 피난길 중에 녹화된 것이었다.
“다운이는 괜찮은데, 여보가 워낙 생활력이 없는 게 걱정이에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 죽으려면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마치…… 개인 방송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최민서는 배터리가 절반쯤 남은 자신의 스마트폰 앞에서 양손에 새빨간 목장갑을 꼈다.
그리고 파리 전시 때문에 들고 온 자신의 연장통을 열어 큼직한 가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함석가위’라는 건데 철물점 아무 데나 가면 팔아요. 이걸로 이렇게 타이어를 자를 수 있어요.”
썩둑썩둑!
그러곤 다짜고짜 함석가위로 자동차 타이어의 고무 부분을 오려 내기 시작하는 최민서.
서걱서걱!
우악스럽게 생긴 타이어가 능숙하게 잘려 나간다.
힘이 제법 드는지 가위질을 하는 최민서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도드라졌다.
근육이 갈라진 구릿빛 어깨와 이마 위로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갔다.
썩-뚝!
“휘유. 어때요? 힘은 좀 드는데 생각보다 잘 잘리죠?”
타이어를 다 오린 최민서가 목장갑 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설명을 이어 갔다.
“물론 두께에 따라 절단기나 글라인더를 써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지간하면 함석가위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이건 ‘리벳’이라고 하는데, 이 연장도 철물점에 가면 다 팔아요.”
그녀는 오려 낸 타이어 조각들을 서로 덧대어 리벳기를 가져갔다.
“이건 쉽게 말하면, 철판에 쓰는 스테이플러 같은 거예요. 그냥 힘주고 꾹 누르면 끝.”
꾹.
그러자 신기하게도 타이어 조각 2개가 서로 딱 붙어 버렸다.
최민서는 그 결과물을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밀며 히죽 웃었다.
“짠. 쉽죠? 상황에 따라 에어타카를 써도 되는데, 그건 전기가 필요할 테니까 우리는 리벳으로 수작업을 하자고요.”
“…….”
“…….”
최민서의 동영상을 지켜보는 이들은 마치 입이 리벳으로 꿰인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한 가운데 영상이 계속 흘러갔고.
최민서는 계속해서 함석가위로 타이어를 오려 나갔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리벳으로 연결하기를 반복했다.
썩둑썩둑.
계속되는 노가다를 보며 토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 저분…….]
그때였다.
때마침 최민서가 자신이 만든 조각품을 어깨와 팔에 두르더니 자랑스럽게 생색을 내고 있었다.
“짜잔! 이러면 완성! 타이어 갑옷이 완성되었습니다! 무거우니까 중요 부위만 입는 게 포인트!”
[…….]
토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최민서는 새까만 타이어로 무장한 여전사가 되어 있었다.
“여보! 그리고 지금 해 보니까 갑옷 이음새는 얇은 자전거 타이어를 쓰면 딱이네요. 이것도 참고해요.”
[…….]
토끼는 문득 옆에서 같은 영상을 시청 중인 정다운을 돌아봤다.
그러자 정다운은 세상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과연 그렇구나. 확실히 타이어라면 질기고 튼튼해서 괴물들의 이빨을 충분히 막을 수 있겠어. 역시 어머니다.”
[노트 필기하지 마…….]
어느새 종이 위에 열심히 필기까지 해 가며 동영상 강의를 시청 중인 정다운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키야악!
“……!”
한창 작업 중이던 최민서의 뒤에서 한쪽 벽이 무너지며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출몰했다!
사람만 한 크기의 하이에나였다!
“헉!?”
[안 돼! 피하셈!]
동영상을 보던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모니터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딜!”
최민서가 허리를 급격히 틀더니, 자신을 덮쳐 오는 하이에나의 아가리 속으로 한쪽 팔을 들이밀었다.
콰직!
사나운 이빨들이 질긴 타이어 갑옷 위로 쑤셔 박혔다!
그 틈에 최민서는 재빨리 반대쪽 손을 움직여 연장통에서 락카 스프레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하이에나의 눈에 대고 뿌려 버렸다.
촤아악!
캬악!?
하이에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에 최민서가 부츠 신은 발로 놈의 배를 세게 후려치며, 놈의 입속에서 팔을 뽑아냈다.
다행히도 타이어 갑옷 덕분에 상처는 없었다.
“눈이 좀 맵지?”
최민서는 얼굴이 온통 파란색이 되어 버린 꼬락서니로 바닥을 나뒹구는 하이에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어찌나 눈이 매웠는지 앞발로 자신의 눈을 감싸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딸깍.
최민서의 손에는 어느덧 지포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머쓱한 표정이 떠오르더니, 아직 녹화되고 있는 스마트폰을 향해 외쳤다.
“앗. 여보, 오해하지 마! 나 담배 끊었어! 이건 그냥 기념품이에요! 진짜야!”
그 말과 함께 다시 하이에나를 돌아본 최민서가 능숙한 엄지로 지포라이터를 켜더니, 그 불에 대고 락카 스프레이를 뿌렸다.
화르륵!!
캬륵!?
소스라치게 놀라는 하이에나!
뜨거운 불길이 화염방사기처럼 하이에나의 몸을 덮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디 보자-. FRP 경화제가 불이 잘 붙던가?”
촤악.
“……!”
하이에나의 털 위로 투명한 액체가 뿌려지자, 유독한 냄새와 함께 화력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끼애앵-! 깽깽!!
결국 하이에나의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놈은 어찌나 놀랐는지 눈앞이 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뒤를 돌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쿠당탕! 콰당!
앞이 안 보이니 몇 번이나 어딘가에 부딪치면서도 미친 듯이 눈을 감고 질주하는 하이에나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져 갔다.
“휴. 놀래라.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최민서는 땀에 젖은 머리를 한손으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곤 힐끔 옆으로 시선을 돌려 스마트폰을 향해 히죽 웃었다.
“봤죠, 여보? 타이어가 생각보다 방어력이 좋다니까요? 이거 봐. 하나도 안 다쳤어. 그치? 만들기 쉬우니까 잘 한번 만들어 봐요.”
“…….”
타이어 갑옷을 벗고 괴물에게 물린 팔을 꺼내 보여 주는 그녀의 표정이 매우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에서 토끼는 아주 익숙한 표정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니…… 이 가족들이 진짜 미쳤나.]
토끼의 시선이 모니터를 넘어서 정다운을 지나 커피를 홀짝거리는 정수호에게까지 흘러갔다.
후루룩.
정수호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보내 준 것 같은데, 더 걱정이 되는 영상이지.”
“그, 그러네요.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 선생님.”
임 조교는 자기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정수호는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다.
“차라리 각성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저렇게 겁도 없이 망아지처럼 날뛰는 사람이라서 정말 걱정이야.”
토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각성을 안 했다고요? 저게 어딜 봐서?]
“각성자였으면 스킬부터 썼겠지.”
[…….]
토끼는 다시 정다운을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노트 필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 철물점이었어! 편의점이 아니라 먼저 철물점부터 갔어야 했네.”
[…….]
* * *
다음 날, 정다운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한국대학교 근처를 탈탈 뒤져 기어코 철물점을 찾아낸 것이다.
“와아! 철물점 최고다!”
정다운은 엄청나게 흥분해 버렸다!
사방에 빼곡히 진열된 이름 모를 연장들!
어딜 둘러봐도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한 신비의 세계 철물점!
숨을 크게 들이켜면 콧속을 가득 채우는 쇠 냄새에 정다운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철물점에 있는 모든 연장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고 사용법도 모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단은 다 소지품 안으로 쑤셔 박았다.
[아니, 그, 에효…….]
어제부터 토끼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났다.
소지품을 열고 철물점을 통째로 쑤셔 박고 있는 정다운의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던 토끼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쩔 거예요? 찾으러 갈 거임?]
“당연히 가야지! 최대한 빨리 출발할 거야!”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서요?]
“유럽 쪽을 전부 찾아봐야지! 어머니는 각성자도 아니시니까 진짜 한시가 급해.”
[그건 그런데…… 진짜 걱정이 안 되는 건 왜죠……?]
토끼는 이런 복잡한 기분이 매우 익숙했다.
스킬 하나 없는 약해 빠진 비각성자 최민서가 이상하게 어딘가에서 무사히 살아 있을 것 같았다.
* * *
그런데 바로 떠나기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난 여기 남겠다.”
“같이 안 가신다고요?”
정수호는 정다운을 따라가지 않고 한국대학교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비각성자인 자신이 따라갔다간 방해만 될 거라는 이유였다.
물론 정다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너희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엇갈리게 될 거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 있어야지.”
“음, 그건 또 그러네요.”
정다운이 정수호가 학교에 있을 거라 확신했듯이, 최민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만에 하나 최민서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분명 한국대학교부터 찾아올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정수호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내가 혼자 힘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영상만 보면 진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었다.
정다운은 고민에 빠졌다.
“으음. 이러면 또 아버지가 걱정인데. 여기에 아버지를 지킬 누구 하나를 남겨 놔야 하나?”
그때 알파가 말했다.
<어차피 이 건물은 이제 용의 신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없다 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러면 떠나기 전에 여기부터 일단 안전하게 만들어 둘까?”
정다운이 눈을 번뜩이며 히죽 웃었다.
그 표정에서 얼핏 동영상에서 봤던 최민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아. 나도 커피 한 잔만 주셈.]
괜히 피곤해진 토끼가 정수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호로록 홀짝.
[……써!]
토끼 입맛엔 커피가 안 맞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