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6화>
* * *
아이스 그렘린들의 왕 바하무트는 본래 불사를 선택한 어둠의 리치였다.
태어나기를 마녀들의 시종이 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취미와 특기는 청소와 집안일이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정다운에게 잡혀서 생명의 사도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바하무트는 주인님의 처소를 청소하는 일에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쓸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지저분한 것들을 싹 치워 버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정돈된 장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보면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다운이 마련해 준 바분의 마법 창고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눈사람.
그게 바로 바하무트의 현재 모습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
이 완벽한 평온함을 깨뜨리는 천적이 이 창고 안에 살고 있었다.
“뽀뀨?”
우당탕탕!
[으헉! 뽀뀨, 이노옴! 또 뭔 짓을 저지른 거야!]
그렇다! 바로 저 선반 위에서 쏜살같이 튀고 있는 은빛 쥐새끼!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정리되어야 할 주인님의 창고에 사고뭉치 한 마리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뀨잇!”
후다닥! 후다다닥!
우당탕탕탕!
[으아악! 또 어질러졌어! 제발 선반 좀 그만 헤집고 다니란 말이다! 왜 다 건들고 지나가는 거야!]
바하무트의 신경질 가득한 고함 소리가 창고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뽀뀨우!”
우르당탕탕탕!
[제발 그마안! 거긴 바로 어제 정리가 끝난 곳이란 말이다!]
바하무트가 빗자루를 들고 그 뒤를 쫓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저 빌어먹을 은빛 다람쥐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쉴 새 없이 창고 안을 탐험하는 것이 하루 일과다.
항상 보는 장소인데 왜 매일 매일 새롭고 흥미진진하게 돌아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돼! 거긴 진짜 안 돼! 그 위엔 먹을 거 없단 말이다! 내가 뼛조각 따로 챙겨 줬잖아!]
“뀨?”
자신을 향해 사정하는 눈사람을 보며 은빛 털을 가진 다람쥐가 예쁘게 정돈된 선반 위에 딱 멈춰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하무트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녀석을 달랬다.
[그, 그렇지. 잘했어. 이제 거기서 천천히 내려오면 돼. 착하지? 거긴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정리한…….]
“뀨우?”
[말 좀 들엇!]
아무리 달래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짧은 앞발로 앞에 있는 머그컵을 살짝 밀 듯 말 듯 약올린다.
[야! 너 사실은 다 알면서 그러는 거지!?]
바하무트가 버럭 화를 냈다.
저게 다 정다운이 받은 업적 때문이었다.
〈최초 업적 달성!〉
“땅다람쥐의 친구!”
숲속의 작은 겁쟁이 땅다람쥐를 길들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친화력에 던전이 감탄합니다.
- 보상: 길들인 땅다람쥐가 당신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이 업적 보상 때문에 뽀뀨는 정다운의 말은 잘도 알아들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진짜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다운의 곁에 있을 땐 다른 사람들 말도 조금은 듣는 척하면서, 그가 없는 곳에선 그냥 근본이 멍청한 다람쥐일 뿐이었다.
그래, 저 하찮은 미물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바하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녀석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자, 착하지? 위험하니까 내가 내려 주마. 천천히 내 손 밟고 내려오련?]
갸웃?
뽀뀨는 자신에게로 점점 다가오는 새하얀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뭔 생각인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날개를 확 펼쳤다!
“뽀뀨우!”
[아! 또 왜!]
휘와아악!
뽀뀨가 날았다!
격이 올라 날다람쥐로 진화한 뒤부터, 뽀뀨는 아주 흥이라는 것이 폭발해버렸다.
선반 기둥을 타고 후다닥 뛰어 올라, 공중 곡예를 하며 자신을 노리고 다가온 불사의 리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맴돌기를 총 7번!
그러다 결국엔 바하무트의 새하얀 뒤통수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야! 어디야!]
갑자기 시야에서 뽀뀨가 사라지자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바하무트.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눈의 감촉에 뽀뀨가 뀨뀨 웃었다.
숲속의 작은 겁쟁이라 불릴 정도로 땅다람쥐는 원래 겁이 아주 많은 짐승이었다.
그래서 녀석들은 항상 보호색을 이용해 땅속에 숨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진화를 기점으로 뽀뀨의 보호색이 바뀌어 버렸다. 은빛으로.
그리고 현재 이 창고 안에서 뽀뀨의 보호색과 가장 흡사한 색을 가진 장소는 단 한 군데뿐이었다.
바로 바하무트.
리치의 두개골을 중심으로 새하얀 눈을 뭉쳐 만든 눈사람을 뽀뀨는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뀨웃!”
파바박! 파바바박!
[으헉!? 또냐! 왜 틈만 나면 내 몸 속을 파고 들어오는 거야! 떨어져!]
뽀뀨가 앞발을 신나게 휘둘러 바하무트의 몸속으로 파고들자, 바하무트는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다.
목표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뽀뀨의 주식은 뼈.
그리고 마침 이 눈사람의 머릿속에는 리치의 황금 두개골이 숨겨져 있었다.
와! 황금색 뼈라니! 그건 얼마나 맛있을까! 제발 한 입만!
“뽀!”
들썩.
“……뀨?”
[그만해, 이 녀석아. 두개골이 손상되면 아무리 나라도 아프단 말이다.]
끝내는 잡혀 버리고 만 뽀뀨였다.
바하무트는 새하얀 눈송이 같은 뽀뀨의 뒷덜미를 살포시 잡고 들어 올리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끝까지 포기를 못하고 자신의 손에서 짧은 팔다리를 바둥거린다.
표독한 눈빛으로 낑낑대는 모습이 너무 하찮아서 그만 화가 풀려 버렸다.
[하이고, 진짜……. 주인님의 총애를 받는 짐승만 아니었어도 넌 진즉에 죽었다. 알긴 아냐?]
“뽀뀨.”
[…….]
뭐라 말하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욕 같단 말이지…….
바하무트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며 뽀뀨를 창고 구석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창고 문을 슬쩍 바라보며,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흠. 주인님은 고향에 잘 도착하셨으려나. 이곳에선 시공의 흐름을 알 길이 없으니 좀 답답하군.]
바하무트는 정다운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그렇다 해서 딱히 걱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다른 차원이라도, 감히 누가 그분을 곤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주인님의 고향이 과연 어떤 곳일지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쯤 불러 주시려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바하무트는 그때까지 청소나 열심히 해 두자고 다짐했다.
주인님이 오랜만에 방문해 주시는 순간, 창고 전체에서 번쩍번쩍 광채가 난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렇게 한참이 흘러.
파아앗!
창고 전체가 빛이 났다.
[오오! 주인님이시다!]
뽀뀨와 실랑이를 하고 있던 바하무트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주인님을 맞이할 채비를 갖췄다.
휘오오!
순백의 눈가루가 휘몰아치며, 동글동글한 눈사람의 실루엣이 맵시 있게 변해 간다.
샤라락.
반짝거리는 눈가루가 흩날리며 새하얀 머리카락이 찰랑인다.
바하무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신했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가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토끼는 이 모습을 ‘불사의 바하무트 설녀 버전’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실 아무 의미는 없다.
모양이 어찌됐든 어차피 눈사람인 건 마찬가지니까.
이건 일종의 화장 같은 거다.
벌컥!
[주인님, 부르셨나이까.]
바하무트가 정중하게 창고 문을 열어젖히자, ‘흙먼지 하나 없는’ 화창한 하늘 아래 정다운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르르 서 있는 낯선 인간들 또한.
[훗.]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격이 너무 하찮아서 바하무트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어쩌면 주인님의 친구분들일 수도 있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했는데, 저 수준이라면 뽀뀨보다도 못하지 않은가.
예전이었으면 대뜸 버러지들이라고 욕부터 했을 것이다.
“뀨잇!”
정다운을 발견한 뽀뀨가 바하무트의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 올라 정다운에게 날아갔다.
녀석을 두 손으로 받아 들며 정다운이 바하무트를 쳐다봤다.
“잠깐 나와서 이분들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좀 얼려 줄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흠칫.
정다운 때문에 계속 놀라기만 해 온 회사원들은 바하무트의 등장과 동시에 이미 얼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바하무트보다도 더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저, 저 여자는 또 뭐야?’
‘설녀?’
‘석고상?’
‘석고상이 말을 해?’
전신이 눈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여인의 모습은 미술관에 전시된 비너스의 석고상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석고상이 살아 움직이며 말까지 하니까 어찌 안 무서울까!
심지어 눈동자까지 다 하얀색인데!
이미 지구의 상황은 몇 달 전부터 재난물 영화처럼 변했는데, 어째선지 아까부턴 장르가 호러로 변해 있는 기분이었다.
[후.]
바짝 얼어붙은 회사원들을 힐끗 쳐다본 바하무트는 저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쉬더니 귓가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각성자들도 수준 이하인데, 마침 그들 사이에서 비각성자인 김 실장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한숨이 자꾸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후. 이게 지구라는 곳인가. 몹시…… 하찮구나.]
아, 이런! 결국 못 참고 속마음을 말해 버렸다!
주인님의 고향을 대놓고 비웃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참겠는가.
오랫동안 던전의 참가자들만 봐 오다가, 처음으로 비각성자를 봐 버린 순간인데.
옛날이었으면 감히 눈도 못 마주칠 버러지들이 자신의 주인님 곁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샤라락.
바하무트가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창고 밖으로 걸음을 떼는 순간, 반짝거리는 눈가루가 흩날리며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아아, 멋지다. 아름답다.
그리고…….
철퍼덕!
[헉쓰!?]
발끝부터 호쾌하게 녹아 버렸다.
때는 뜨거운 여름.
지구의 태양은 계란 프라이가 익을 정도로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궈 놓은 참이었다.
아무리 바하무트라도 이건 녹을 수밖에 없었다.
[…….]
바하무트였던 무언가가 쪽팔려서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회사원들 사이에서 한아름이 처음으로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눈사람이었네.”
장르가 호러인 줄 알았더니, 만화 영화였다며.
* * *
“한번 녹은 아이스크림을 다시 얼리면 이상하게 배탈이 나더라고요. 세균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정화!”
화아악!
새하얀 빛의 구체가 날아와 아이스크림을 정화시킨다.
그 뒤로 더욱 새하얀 바하무트의 눈보라가 아이스크림을 휘돌며 얼려 주었다.
아이스크림 재생 성공!
[흥. 이게 뭐야. 맛없네 뭐. 흥.]
토끼가 아이스크림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할짝거린다.
아닌 척 투덜거리긴 하지만, 이미 모자 위로 튀어나온 두 개의 귀가 신나게 흔들리는 모습에 정다운이 흡족하게 웃었다.
한번 녹았다 얼리면 맛없어지는 제품도 있어서, 맛이 적당히 유지되는 아이스크림을 신중히 골라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회사원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창백하기도 하고, 약간 멀미할 것 같은 표정.
“우우웁.”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멀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 정다운이 꺼낸 문어 열차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으니까.
아이스크림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처처척! 처처척!
“부오오!”
드르르륵-!
정다운이 설치하는 공중 철도를 따라 8개의 문어 다리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구름 흙 골렘에 광산 수레를 합쳐서 제작한 문어 열차는 지구에 와서도 변함없는 기세로 하늘을 질주하고 있었다.
“저, 저기가 저희 회사 건물이에요! 우웁!”
김 실장이 다급히 아래를 가리키며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았다.
“와, 진짜 가깝다. 날아오니까 1분도 안 걸렸네.”
[아이스크림 반도 못 먹었다고요.]
“그럼 짐은 이쯤에 내려 드리면 될까요?”
“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다운이 손짓을 까딱였다.
그러자.
처처처척!
빈 공간에 편의점 진열대가 주루룩 나열됐다.
“오, 재밌어, 재밌어!”
휘적 휘적!
정다운은 자신이 무슨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도 되는 양 우아하게 양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 손짓을 따라서 챙겨 왔던 식량들이 진열대 위에 좌르륵 생겨났다.
마법이 따로 없었다.
“와, 램프의 지니 같아…….”
평소에 게임과 만화를 좋아하던 한아름은 이제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경외의 시선으로 정다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토끼는 또 심술이 났다.
[흥. 원래 아이템 지급이 이러라고 있는 기술이 아닌데.]
참가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할 때나 쓰여 왔던 능력이 정다운에게 들어가자, 어느새 전국의 편의점 알바생들이 탐낼 만한 마법으로 둔갑해 있었다.
그동안 다양한 상황에서 수도 없이 흙벽돌을 떨궈 왔던 덕분에 어떤 면에선 토끼보다도 훨씬 능숙했다.
[흥.]
“자, 이제 진짜 가자.”
정다운은 식량을 다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며 바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이래저래 편의점과 이곳을 들르느라 벌써 30분이나 시간이 지체됐다.
처음에 그를 회유하려 했던 박 부장도 이미 한참 전부터 자신과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있었으니, 이제는 정말 아버지를 찾아갈 차례였다.
한국대학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