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50)화 (350/393)

<던전리셋 외전 5화>

그렇다.

말 그대로 통째로였다.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정다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쏟아져 내리는 건물 잔해들을 한 손으로 고스란히 받아 소지품에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편의점 물건들을 챙기면서.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의 양손도 덩달아 바빠졌고, 급기야는 아예 편의점 진열대를 통째로 소지품에 밀어 넣기에 이르렀다.

멀리서 보면 가관이었다.

이쯤 되면 마치 편의점이 그의 소지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뭐, 뭐임? 어째 소지품 능력이 전보다 능숙해진 거 같은 건 내 기분 탓임? 저 정도면 거의 내 아공간과 큰 차이 없겠는데?]

토끼는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정다운은 소지품 안에 적당한 크기의 아이템을 집어 들고 하나씩 집어넣곤 했다.

크기가 너무 크면 잘라서 넣어야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손으로 들 수만 있으면 크기나 모양 상관없이 쑥쑥 들어갔다.

어디까지 들어가나 시험해 봤더니, 방금 만든 흙기둥도 억지로 밀어 넣으니까 통째로 들어갔다.

“와, 이만한 크기도 들어가네? 이쯤 되면 거의 도라에몽 주머니 아닌가?”

실험 삼아 이것저것 쑤셔 넣어 보던 정다운도 감탄사를 터뜨렸다.

물론 너무 부피가 크고 무거우면, 넣고 빼는 게 불편하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진 것이다.

이쯤 되면 진짜 도우미의 아공간 그 자체!

토끼의 인형 옷장이나, 바분의 마법 창고, 세르파의 그림자 공간과 거의 비슷해진 것이다!

[흥. 큰 물건 넣는 게 뭐 별거라고요? 그래 봤자 아공간이랑 별 차이 없네 뭐.]

태어나기를 도우미로 태어나, 도우미로서의 자부심이 강하던 토끼는 단단히 심통이 나 버렸다.

하지만 종말의 서는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뭘 모르는구나. 원래 참가자들의 소지품 능력과 도우미의 개인 아공간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능력이다.]

[앗?]

종말의 서의 말을 듣자, 토끼는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동안 던전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참가자들 손에 저절로 쥐어져 있던 기본 무기들을 누가 건네주었던가.

바로 토끼 자신이었다.

던전의 무기들을 아공간에 미리 챙겨 와서 그들의 손에 척척 떨궈 주었던 것이다.

그 기술을 도우미 사이에선 ‘아이템 지급’이라 부른다.

[뭐, 뭐지? 그러고 보니 아이템 지급도 평소에 저 인간이 땅에 흙벽돌 떨구는 거랑 무지 비슷하잖아?]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네놈은 대체 얼마나 생각 없이 살았던 것이냐.]

종말의 서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도우미는 도우미고, 참가자는 참가자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던 토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정다운이 흙벽돌 떨구는 정도쯤이야 요령만 터득하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지품창의 각도를 틀거나 잽싸게 움직여서 흙벽돌이 떨어지는 위치를 조금씩 변화를 주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요령이 아니라, 소지품 능력의 ‘격’ 자체가 올랐다는 말은…….

[던전의 도우미들처럼 저 인간도 ‘아이템 지급’이 가능해졌다는 말이지.]

종말의 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다운도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원래 ‘격’이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깨닫는 법이니까.

“아, 그럼 이런 것도 되려나?”

정다운은 껌을 짝짝 씹으며 ‘편의점이었던’ 폭삭 주저앉은 건물 더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생난리를 피웠더니 뿌연 흙먼지가 자욱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흙먼지가 정다운을 알아서 피해 주고 있었다.

“흠. 이런 느낌인가.”

정다운은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회사원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처처척!

“……!”

그 순간 그들의 손에 갑자기 500ml 생수병이 하나씩 들려졌다.

아니, ‘지급’되었다.

흡사 토끼가 던전 참가자들에게 기본 무기를 지급해 주었을 때처럼 갑자기 뿅 하고.

“어? 물이네?”

“내 손에 이게 왜?”

엉겁결에 생수통을 받아 든 참가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먼지 많이 날렸죠? 물로 목이라도 축이고 세수라도 하시라고요.”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하는 정다운.

하지만 그의 예의 따위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 이것도 설마 스킬인가?”

“일종의 마술 아냐?”

“저 사람 뭐야, 무서워…….”

솔직히 진짜 무서웠다.

목을 축이라고 준 생수병이 무슨 사약이라도 되는 양 그들의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이쯤 되니 정다운이 사람 같지도 않았다.

첫 만남부터 말하는 토끼나 말하는 책을 데리고 다니지 않나.

또 그들의 격 차이는 엄청 차이나서, 귀엽게 생긴 토끼와 책한테도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위화감이 들 정도고.

아니, 다 필요 없고…….

지진을 일으키고, 건물도 통째로 집어삼키는 인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주변에는 흙먼지가 꾸물꾸물 그가 가는 길을 피해 흩어지고 있었다.

저런 인간 앞에서, 기껏해야 불 좀 던지고 생수 뿌려서 물세례나 주는 잡기를 가진 각성자들이 느끼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걸 뭐라 부르더라. 대요괴? 코스믹 호러?’

한때 게임에 빠져 살았던 한아름은 이 상황에 어울릴 법한 표현을 찾느라 딴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패닉이었다.

반면 토끼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도우미 능력이네요. 같은 편이지만 되게 얄밉다. 아이템 지급까지 가능해지다니요.]

“야. 치사하게 이런 재밌는 기술을 지금까지 너만 써 왔냐? 왜 나는 여태 이걸 시도해 볼 생각을 못했지?”

[원래 격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한번 올라와서 내려다보면 별거 아닌 일도, 밑에 있을 땐 감히 상상도 못하지.]

“도우미의 격은 진즉 넘었던 거 아니었어?”

[애초에 그 능력을 만든 존재는 세계수다. 창세의 기록에 있던 시공 게이트를 흉내 내어 아공간 마법을 개발했지. 인간들이 격이 낮아서 고작 그따위로 밖에 못 썼을 뿐, 기본적으로 도우미의 아공간과 소지품 능력은 기록의 출처가 같다.]

“아하, 그랬구나. 그런데 오늘따라 옛날이야기 많이 해 주네? 역시 본성이 책이라서 그런가 설명이 많네.”

[뭐지? 설명해 줘도 지랄이군.]

“고맙다는 말이야.”

[…….]

뚱해서 말이 없어진 종말의 서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정다운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꼬마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회사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고마워요. 여러분 덕분에 좋은 기술을 터득했어요.”

깜짝!

“아, 아뇨! 저희가 뭐 한 게 있다고요……!”

“맞습니다!”

정다운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오자, 동시에 몸을 흠칫 떨며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회사원들이었다.

영화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원래 진짜로 무서운 악당은 끝까지 정중하고 예의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

정다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선물을 드릴게요.”

“아, 아뇨! 저희는 괜찮……!”

“쉿! 쉿!”

“웁!?”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거절하려던 박 부장의 몹쓸 주둥이를 김 실장이 다급히 틀어막았다.

까마득한 상사였고, 항상 굽실거리던 대상이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순발력이었다.

영화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진짜 무서운 악당 보스의 호의를 함부로 거절했다간 무조건 골로 간다.

자신은 비록 스킬은 없어도 사회생활이 만렙이다.

능청스레 웃는 그의 입가가 달달 떨렸다.

“하하. 무슨 선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히 받아서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네. 그럼 사는 곳이 어디세요?”

“히익!”

딸꾹.

악마가, 집 주소를 물어봤다.

가뜩이나 비각성자인 김 실장은 그만 오줌을 쌀 뻔했다.

[뭐지, 이 멍청이들은.]

토끼가 여전히 심통이 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정다운을 흘겨보며 말했다.

[하여튼. 님이 이상한 흙몽둥이 꺼내서 다 부숴 버리니까 이 사람들 겁먹었잖아요. 기껏해야 평균 레벨이 하급 5레벨일 텐데 그런 걸 보여 주면 어떡함? 아! 퉤퉤. 먼지 입에 들어갔네.]

건물이 무너진 여파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

토끼가 입을 막고 투덜거리자, 정다운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흙 뭉치기.”

휘오오오!!

그 순간 근처의 모든 흙먼지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정다운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확! 하고 거짓말처럼 세상이 맑아졌다.

한순간의 꿈처럼.

“……와.”

그러나 역효과였다.

이번에도 회사원들은 제대로 쫄아 버렸다.

“하하…… 하하…….”

진짜 패닉이다.

요괴? 악마?

아니면 종말이 되면 등장한다는 공포의 마수인가?

역시 사람이 아니라 게이트에서 새로 튀어나온 괴물이었던가?

워낙 신기한 일이 많은 세상이라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여겼건만.

정다운을 만난 오늘 하루 만에 그들은 10년은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   *   *

정다운의 선물은 간단했다.

회사원들이 모여 사는 장소로 다 같이 이동해서, 소지품에 잔뜩 챙긴 편의점 식량들을 나눠 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겨우 배낭 따위로 식량을 챙겨 봐야 며칠이나 먹겠어요? 제가 잔뜩 모아서 소지품으로 옮겨 드릴게요.”

“아니, 진짜 괜찮…….”

“괜찮아요. 저한텐 쉬운 일이에요.”

“…….”

정다운은 그들의 거절을 거절했다.

“아버지 만나러 가신다면서요…….”

이제 됐으니 제발 가라는 말이었다.

물론 정다운은 아버지를 만나러 가긴 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대학교는 날아가면 진짜 순식간에 도착할 테고, 회사원들의 식량을 옮겨 주는 것 또한 날아가면 금방이었다.

어차피 다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정다운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 아버지가 도움을 받으면 꼭 보답하라고 하셨거든요.”

“아니, 네…….”

자기 아버지까지 들먹이니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괜히 반박했다간 자기 아버지를 모욕하냐며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게다가 정다운은 본의 아니게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 그런데 이렇게 코앞에 편의점이 또 있었네요? 아까는 왜 못 봤지?”

‘그야 건물 뒤에 가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건물은 이제 없다.

누가 다 부숴 버렸으니까.

그리고 곧 있으면 저 편의점 또한 바스러질 계획이었다.

“지금은 제가 바쁘니까 일단 한꺼번에 챙기고 이따 배분해 드릴게요. 소지품 오픈.”

쩌적.

“…….”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정다운은 돌 깨기로 편의점 한쪽 벽을 가볍게 뜯어내고, 진열대를 통째로 소지품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딱 5분 후.

번화가에 모여 있던 편의점 3곳을 포도알 까듯이 알맹이만 쏙쏙 뽑아 먹은 정다운이 해맑게 웃었다.

“와! 진짜 부자다, 부자! 저는 편의점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 두 군데는 여러분 드릴게요.”

“그…… 네, 어. 감사합니다.”

회사원들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물론 고맙긴 무지 고마운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원래 세상이란 게 그렇다.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서 조건 없이 선물을 막 퍼 주면, 어느 날 돌변해서 조건 없이 막 때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정다운이 그럴 리도 없고 전부 그들의 오해였지만, 압도적인 능력과 격을 가진 강자는 존재만으로도 약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힘겹게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생존자들에게는 그게 곧 진실이었다.

“그래서 사는 곳이 어디시라고요? 우리 가면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갈까요?”

처처척!

“……!”

회사원들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정다운이 가볍게 손짓하자 어느새 그들의 손에 아이스크림이 하나씩 들려졌다.

그리고 토끼의 손에도 제일 비싼 아이스크림 하나가 짠 하고 생겨났다.

여전히 심통이 나 있는 토끼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흥. 감히 도우미한테 도우미 능력을 써? 요즘 격 좀 올랐다고 건방짐이 아주 하늘을 뚫네요? 근데 이거 다 녹았음.]

화는 났지만 아이스크림은 먹고 싶었다.

그런데 냉동실 전기가 끊겨서 아이스크림들이 다 녹아 있었다.

“아, 그러네? 다시 얼려 줄게. 열려라, 바분의 마법 창고.”

녹은 건 다시 얼리면 그만이었다.

정다운이 큼지막한 자물쇠를 꺼내 열쇠를 돌렸다.

철커덕.

휘오오!

그 순간, 갑자기 몰려오는 새하얀 한기에 회사원들은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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