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49)화 (349/393)

<던전리셋 외전 4화>

“왜들 그래?”

“거기 무슨 일 있어?”

소란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손에 들린 식량이 가득 찬 가방을 보며 토끼는 확신을 가졌다.

[와, 설마 했는데 진짜인가 보네. 님들 혹시 소지품 능력이 뭔지 몰라요? 기억과 함께 개인 아공간도 다 까먹은 거임?]

“아, 알긴 알아요. 게임에서 아이템 보관하는 인벤토리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거죠?”

평소에 게임 좀 해 봤는지 냉큼 대답하는 한아름이었다.

[응, 응. 바로 그거. 던전의 기본 능력이잖아요. 이런 거 말이에요.]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던전의 일타강사 토끼 선생의 시범 교육.

[이렇게 열고-.]

찌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지퍼가 열리며 토끼의 개인 아공간이 오픈됐다.

[이렇게 넣고.]

토끼가 쓰고 있던 장난감 안경을 벗어서 아공간에 던져 넣은 뒤, 다시 지퍼를 찌익 닫았다.

그리고 마술쇼처럼 빈손을 쫙 펼치고 우쭐거렸다.

[짜잔!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참 쉽죠? 님들도 한번 해 보셈!]

그런데 손님들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엥?]

회사원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설마 저거…… 진짜 ‘그 능력’인가?”

“그, 그런 것 같은데요?”

[아니, 자꾸 쫑알대지만 말고 한번 해 보라니까요?]

토끼가 혀를 차며 그들을 타일렀지만, 회사원들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그거 못하는데요.”

[못하긴 왜 못해요? 상태창처럼 그냥 열고 닫기만 하면 되는데. 스킬도 기억해 낸 양반들이 소지품을 못 연다는 게 말이 됨?]

“진짜예요. 저희뿐만 아니라 귀환자들도 이제 못 써요.”

[엥. 그게 뭔 헛소리……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처음에는 엄살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대답이 계속되자, 토끼도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아름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 문제를 놓고 인터넷이 한창 떠들썩했어요. 다들 지구에 돌아오니까 갑자기 소지품이 안 열린다더라고요. 그 탓에 소지품에 보관 중이던 식량이나 아이템들을 꺼낼 수 없게 됐다면서.”

토끼와 정다운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쳐다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님은 잘 되잖아요.]

“응. 나는 잘만 열리는데?”

[남들은 다 안 된다는데 님은 왜 돼요?]

“내가 어떻게 알아? 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나 혼자만 소지품이 열린다니.”

[그러게요. 원래는 남들은 다 되는데 님만 오류라서 안 되는 게 정상이잖아요. 이번엔 왜 반대임?]

그때 토끼의 손에 들려 있던 종말의 서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쯧. 네놈은 정말 전직 관리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흥. 이럴 때만 또 표정 적절한 거 보소? 우쭐대지 말고 아는 거나 말해 보셈.]

“뭐 아는 거 있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세계수는 인간들을 잡아먹기 위해 던전으로 불러들였다.]

종말의 서는 마치 옛날이야기라도 하듯이 담담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다운은 회사원들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처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다운 입장에서는 이미 아는 이야기도 있고 처음 듣는 표현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던전 게임의 비사를 듣게 되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로 지구의 인간들이 격이 너무 하찮았던 것.]

그렇다.

곧바로 잡아먹기에는 영양분이 너무 형편없다 판단한 세계수는 그들을 키워서 먹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른바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수는 보다 효율적인 농사를 위해서, 창세의 기록을 흉내 내어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가호’를 하나씩 적용시켜 나갔다. 그중 가장 처음에 내린 가호가 ‘초월’이었지.]

바로 레벨 업.

노력해서 업적을 쌓으면 저절로 격이 올라가는 계단식 성장 시스템.

창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워 내는 작업과 비슷해서 세계수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다음엔 자신이 키우는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틈틈이 확인하고 싶어 했다.]

바로 상태창.

체력과 포만감, 그리고 스킬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기록하는 꼬리표가 달린 것은 그런 이유였다.

“말하자면 화단 앞에 꽂아 두는 푯말 같은 거구나. 그럼 소지품은 뭔데?”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소지품은…… 이른바 ‘뿌리’다.]

“뿌리?”

이 또한 지극히 식물에게나 적용될 법한 표현이었다.

[세계수는 조금 더 효율적인 농사를 위해서, 인간 스스로가 외부에서도 양분을 모으길 원했다. 그래서 소지품의 가호를 내렸지. 인간들이 죽을 때 비로소 진정한 쓰임새를 드러내는 가호를.]

[죽을 때요? 앗, 설마?]

갑자기 뭔가를 깨닫고 깜짝 놀라는 토끼를 정다운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

[와, 진짜 소름임! 던전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어떻게 됐죠?]

“그야 던전이 리셋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사라지…… 어?”

정다운도 뒤늦게 깜짝 놀랐다.

종말의 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다. 던전 게임의 참가자들이 죽으면, 그동안 모아 둔 소지품들과 함께 던전으로 돌아가지. 그 모든 생명 에너지가 고스란히 세계수의 양분이 되는 것이다.]

“지독할 정도로 알뜰하네.”

[원래 농사란 그런 것이다.]

어쩐지 그동안 던전에서 참가자들이 죽어도 게임처럼 아이템을 떨구지 않는다 했다.

이제 보니 그런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흐흐. 게다가 소지품의 진정한 용도는 또 하나 있었다.]

종말의 서는 자신의 말에 일일이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며 첫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 주었다.

[그건 바로…… 참가자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원래 세계로 도망칠 경우, 그때까지 축적했던 소지품들을 전부 압수하는 것.]

알맹이는 놓치더라도 주머니에 있던 짐이라도 다 빼앗아 손실을 최소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소지품의 진정한 쓰임새였다.

정다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구나. 다 이해했는데, 그럼 나는 왜 열려?”

[끄응. 네놈은…….]

잠시 말문이 막힌 종말의 용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물론 혀는 없지만.

[네놈이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수들을 베었는 줄 아느냐. 너의 격은 이미 세계수보다 높으니, 세계수가 한 번 줘 버린 네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하.”

[오호라. 결국 이 오류종자만 또 개이득 봤다는 거네요?]

“무슨 소리야? 이번엔 오류가 아니라 내 격이 높은 거라잖아?”

[흥. 웃기시네. 그 격도 난 인정할 수 없다요!]

그리고 그들의 수다는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쉬이익. 쉬익!

“……!”

어느새 편의점을 둘러싸고 괴물 도마뱀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헉. 어느새!?”

“이미 포위됐습니다!”

편의점의 유리벽 너머로 몰려들고 있는 놈들의 모습에 회사원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까보다 2배, 아니 3배가 넘는 숫자에 심지어 지금은 건물 안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상황.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괘, 괜찮아! 우리에겐 정다운 씨가 있잖아!”

“맞아!”

회사원들은 절박한 표정으로 정다운을 일제히 쳐다봤다.

“아까보다 숫자가 많긴 해도 정다운 씨라면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을…… 응?”

그리고 바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뭣들하고 있어요? 괴물들이 와서 식량 다 먹어 버리기 전에 빨리 챙기지 않고!”

“……음?”

탈탈탈탈!

정다운은…… 누구보다 잽싼 손놀림으로 편의점을 통째로 털어 먹고 있었다.

치사하게 자기 혼자만 소지품을 활짝 열고.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사람들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아니, 안 싸우고?’

‘괴물들이 몰려왔는데?’

한아름이 용기를 내 그를 설득했다.

“정다운 씨,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라……!”

“아차, 그러네요!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지!”

“마, 맞아요! 지금 괴물들이…….”

“팬티도 챙겨야겠어요! 양말하고 칫솔도!”

“……?”

아니, 저기요? 어디 여행 가세요?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한아름이었다.

정다운이 감동의 눈물까지 흘리면서 너무 기뻐하고 있었다.

“크으! 역시 지구는 최고야! 편의점에서 팬티까지 파는 세계가 어디 있어! 이제 땀만 차는 괴물가죽 팬티는 안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던전 게임에선 여벌의 옷이 없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시체에서 옷을 벗겨 입거나, 가죽이 얇은 괴물을 잡아서 직접 바느질해 입어야 했다.

“그게 진짜 되게 찝찝한 일이거든! 알기나 아냐! 이 노팬티 토끼야!”

[와, 여기서 갑자기 나를 걸고넘어진다고??]

토끼가 억울하다며 항변했지만, 그 순간 편의점 유리창이 전부 깨지며 괴물들이 쳐들어왔다.

파창창!

“샤하악!”

“샤학-!!”

[얼레? 저놈들 아까 님이 파묻어 버린 애들인데요? 용케 기어 나왔네? 또 보니까 반갑다, 애들아!]

토끼가 가장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살기를 피워 내는 뿔 도마뱀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말에 설마 하며 놀라는 사람들.

“아까 그놈들이라고요? 다 똑같이 생겼는데?”

[똑같긴요? 얼굴이 다 다르잖아요. 제일 앞에 있는 두 놈이 제일 잘생긴 거 보니 대장 도마뱀임.]

오랜 세월 동안 괴물들 얼굴을 구경하며 살아온 토끼의 눈썰미였다.

“샤하?”

제일 잘생겼다고 인정받은 대장 도마뱀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전신의 가시를 곤두세웠다.

[오호라. 잔뜩 열 받아서 자기 부하들을 끌고 복수하러 왔나 본데요?]

토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마뱀들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정다운을 향해 일제히 덤벼들었다.

“샤하악!”

“나 바빠, 이놈들아! 나도 제발 새 팬티 좀 입고 살자!”

정다운이 버럭 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 열려 있던 소지품창에서 큼직한 흙벽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일렬로 쭈욱.

“공중 계단!”

퍼버버벅-!

“캬학!?”

“……!”

“헉!?”

우렁찬 비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목격하고 말았다.

정다운의 손바닥에 열린 소지품창에서 장풍처럼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온 흙기둥을!

마치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거대한 흙기둥의 끝이 괴물들을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샤하악!”

가까스로 그의 흙장풍을 피해 낸 대장 도마뱀이 옆으로 빠져나와 한 템포 늦게 덤벼들었다!

놈은 이미 한번 그의 신기한 능력에 당한 적이 있었기에 뒤에서 계속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

하지만!

“돌리기!”

“……!?”

정다운이 흙기둥 귀퉁이를 손으로 밀자, 이번에는 흙기둥이 거대한 야구방망이가 되었다.

와장창창!

“캬학-!?”

흙기둥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호쾌하게 후려치며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건물 옆구리까지 호쾌하게 뚫고 지나가, 한쪽 벽이 뻥 뚫려 버렸다.

후두둑. 쿠르릉!

“어어? 천장이?”

“거, 건물이 무너진다! 모두 여기서 나가!”

“으아아아!”

급기야 천장이 무너져 내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가는 회사원들.

하지만 정다운은 드디어 방해꾼들이 없어지자,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재기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 물건들을 양손에 한가득 집어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으하하! 이거 봐! 껌이야! 이제 난 부자야! 모든 맛의 껌을 한 번씩만 씹고 뱉어도 된다고!”

[아, 쫌! 그만 나대고 나와요! 아빠 찾으러 간다면서요!]

“으하하!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십쇼! 제가 만나러 갑니다!”

편의점을 통째로 들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저 사람!?”

회사원들은 아연실색했다.

괴물들을 초토화시키는 것도 모자라, 건물까지 폭삭 주저앉혀 버린.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 놓고는 자기는 거대한 공중 계단 위에서 껄껄 웃으며 껌이나 씹고 있는 정다운을 보며…….

“내가 괜한 짓을 했나…….”

그를 자기 무리로 끌어들이려 했던 박 부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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