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외전 3화>
* * *
갑작스런 사태에 괴물 도마뱀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위협을 느끼자 공기를 들이마셔 몸집을 한껏 부풀리고, 등에 난 수백 개의 가시뿔을 곤두세웠다.
“으헉!”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기세에 가까이에 있던 회사원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쉬익! 쉬이익!
뿔 도마뱀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정다운을 향해 동시에 덤벼들었다.
토끼가 혀를 찼다.
[처음 보는 괴물들인데 머리가 영 안 돌아가네요. 이걸 님이 한 짓이라 생각 못하나 본데요?]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땅이 갈라지고 뒤집히는 광경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천재지변에 가까웠으니까.
쉬이익-!
뿔 도마뱀들의 몸에서 쏘아진 수백 개의 가시들이 화살처럼 정다운을 노리고 날아갔다.
이 가시 공격은 한 번 사용하면 벌침처럼 다시는 복구가 안 되는 최후의 수단.
그러한 리스크가 있는 만큼 위험하고 강력한 필살의 공격이었으며, 지금 놈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기는 개뿔, 다 소용없었다.
“도마뱀 징그러.”
정다운이 손짓을 위로 까딱했다.
쿠르릉!
그에 따라 갑자기 땅 위로 솟구쳐 올라온 두꺼운 흙기둥!
파바바박!
가시들이 전부 흙기둥에 맥없이 꽂혀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아래로 까딱.
꽈르릉!
할 일을 마친 흙기둥이 다시 밑으로 쑤욱 내려간다.
“샤하악!?”
뿔 도마뱀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흙기둥이 내려가면서 자신들이 서 있던 바닥까지 잡아끌고 아래로 움푹 꺼져 버린 것이다!
“샤하아아……!”
갑자기 발밑에 거대한 구덩이가 뚫리자, 뿔 도마뱀들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속절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위로 대량의 흙더미가 가차 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공사장 덤프트럭이 쏟아붓는 모래 폭포처럼 와르르!
삽시간에 뿔 도마뱀들의 비명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잠시 후 뿌연 흙먼지가 걷히자, 괴물 도마뱀들을 전부 집어삼켜버린 땅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평평해져 있었다.
[깔-끔.]
이때다 싶어 우아하게 빙그르르 날아 그 위로 살포시 내려서는 토끼.
“한 건 난데 왜 생색은 네가 내냐?”
정다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사방에서 쳐다보는 경악 어린 시선들이 있었다.
“세상에…….”
“저 많은 괴물들을 한 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봐 버렸다.
그저 손가락 까딱했을 뿐인데 땅이 갈라지고 흙기둥이 솟구쳤다. 지진을 일으키고 온 땅을 갈아엎어 버렸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귀환자가 강하다고는 듣긴 했지만…….’
‘저건 소문 이상인 거 같은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인위적인 천재지변에 지금까지 도마뱀들과 목숨 걸고 싸우던 회사원들은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자, 그럼 새로운 지역에 왔으니 일단 정보부터 들어야겠죠?]
토끼가 히죽 웃으며 그들에게 쪼르르 날아가 말을 걸었다.
[헤이! 거기 약해 빠진 애송이들! 우리가 구해 줬으니까 아는 거 다 말해 보셈. 살려는 드릴게.]
“아니, 그러니까 왜 네가 생색을 내냐고.”
[어허. 님은 가만히 있어요. 원래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매니저인 내가 챙기는 거라고요. 앞으로는 나를 매니저 토끼라 불러 주셈.]
누가 뭐래도 토끼의 천직은 도우미. 태초부터 자질구레한 일들을 챙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토끼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작고 동그란 안경을 콧등에 척 올렸다.
그리고 수상하게 생긴 검은 책을 활짝 펼쳐 들고 회사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일단 소속과 이름부터 말해 보셈. 어디 사는 누구?]
그러자 토끼의 검은 책이 버럭 화를 냈다.
[함부로 낙서하지 마라! 이 몸은 낙서장이 아니다! ㅇㅍㅇ]
[올. 간만에 표정 적절한데요?]
끄적 끄적.
[아, 낙서하지 말라고! >0<]
한때 던전을 지배했던 종말의 서.
위대했던 과거의 영광 따위는 어디 가고, 그는 이제 한낱 토끼의 낙서장으로 전락해 있었다.
‘아아, 이젠 토끼도 모자라서 책까지 말을 하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안도하기는커녕 점점 혼란스러워져 가는 회사원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코모도를 통째로 집어삼킨 집채만 한 흙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나 야무지게 뭉쳤는지 그 무서운 괴수가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었다.
* * *
토끼와의 인터뷰는 아까 물의 정령을 부리던 한아름 사원이 맡게 되었다.
나머지 회사원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식량을 찾아야 한다며, 다시 사방을 경계하며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한아름은 맨 뒷줄에서 정다운과 토끼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토끼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희는 같은 회사를 다니던 직장 동료들이에요. 하필이면 근무 시간에 서울역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집에도 못 가고 꼼짝없이 회사 건물에 모여 살게 되었어요.”
“평소에는 괴물들 때문에 건물 밖으로 절대 안 나오는데, 오늘처럼 식량을 구할 때만 목숨 걸고 밖으로 나와요. 굶어 죽을 순 없으니까요.”
말을 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는 한아름의 모습에서 그동안의 고충이 느껴졌다.
이어서 한아름은 지난 몇 달간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던전에서의 몇 년은 지구에서는 겨우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실상 첫날 하루 만에 모든 게 끝났어요. 세계 곳곳에서 모든 게이트들이 한꺼번에 개방됐으니까요.”
물론 운 좋게 재난을 비껴간 지역들도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게이트의 발생은 첫날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이 열리고 있었다.
각성자와 귀환자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인류는 이미 멸망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전화와 인터넷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어요. 그래도 그 전까지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라도 공유할 수 있었는데 너무 답답하네요.”
한아름은 먹통이 되어 버린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네? 전화와 인터넷이 안 터진다고요? 그럼 안 되는데?”
그녀의 말에 정다운이 깜짝 놀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랜만에 지구로 돌아오면 무엇부터 할지 계획을 세웠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가족들을 만나는 것.
그다음에는 류승우를 비롯해 동료들과 재회해 하하호호 웃으며 회식을 하는 것.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을 심는 일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다.
“와, 이거 어쩌냐. 전화가 안 터지면 이 난리통에 부모님이 어디에 있을 줄 알고 찾아가지?”
[일단 집부터 가 보든가요. 아직 무사하다면 집에 틀어박혀 있지 않겠어요?]
“집이라…….”
토끼의 조언에 정다운이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집보다 직장을 먼저 찾아가는 게 낫겠어. 두 분 다 워낙 바쁜 분들이라 집보다 직장에 계신 시간이 많았거든. 마침 아버지 직장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기도 하고.”
맞벌이에 엄청난 워커홀릭.
정다운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일에 치여 사는 분들이었다.
그 때문에 정다운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아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서울로 다시 올라왔으나, 그때는 자취를 시작하여 여전히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자취요?]
“응. 마침 내가 들어간 대학교가 경기도 끝자락이라서 부모님 직장에서 거리가 좀 멀었거든.”
[님…….]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 얘기를 꺼내는 정다운의 모습에 토끼가 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쩐지 던전에서도 이 인간이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꼴을 거의 못 봤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래부터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독거노인 같으니. 님은 태어날 때부터 쭉 솔로였군요.]
“네가 할 소리야? 넌 되게 인싸였던 것처럼 말한다?”
[……흠흠.]
말해 뭐하랴.
사실 토끼야말로 던전이 인정하는 진정한 솔로였다.
그렇게 독거노인과 독거토끼의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한아름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정다운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정다운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일단 아버지 직장부터 찾아가 봐야죠. 마침 여기서 가깝거든요.”
“직장이 어디신데요?”
“한국대학교요. 거기 연구실 직원이세요.”
“네? 한국대학교요? 한국대학교라면 여기서 거리가 상당히 먼데요?”
그때 갑자기 앞에서 걷고 있던 박 부장이 뒤를 돌아보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든 교통이 마비된 탓에 걸어서 이동할 수밖에 없는데,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튀어나올지……. 제아무리 정다운 씨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다지만 너무 무모합니다.”
박부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이런 건 어떠십니까?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만, 정다운 씨가 한국대학교까지 안전하게 갈 방법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 저희와 함께…….”
“부장님! 두 번째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다니시는 건 어떠신…….”
“부장님, 저기 보세요. 멀리서 봐도 저렇게 식량이 제법 남아 있…… 왜,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
“……?”
중요한 순간에 눈치 없이 끼어든 김 실장은 박 부장이 자신을 노려보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아니, 편의점을 발견했다니까요…….”
“…….”
“괴물도 없는데요…….”
“후우.”
결국 박 부장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편의점을 향해 걸어가면서 정다운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럼 정다운 씨, 제 제안을 한번 신중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아버님이 계신 곳이 한국대학교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국대학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안전한 대피소니까요.
“아,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박 부장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다운이었다.
“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제 제안을 잘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니, 그건…….”
쌔앵.
행여나 정다운이 거절이라도 할까 봐,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가는 박 부장이었다.
그 뒤에서 토끼가 낄낄대며 말했다.
[저 부장 아저씨, 어떻게든 우리를 자기 무리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요. 그런데 어쩌나. 우리 걸어갈 거 아니잖아요?]
“응. 날아가야지.”
당장이라도 공중 철도를 만들어 날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게요?]
“음. 한국대가 안전한 곳이라고 하니까, 가기 전에 잠깐 편의점 좀 들르자. 이 사람들을 보니 식량 문제가 심각한 거 같으니까.”
[어차피 님 소지품에 고기 많잖아요?]
“전부 괴물 고기잖아. 나도 초창기엔 괴물 고기를 먹기 꺼려졌는데 아버지는 어떠시겠어? 그리고 너 아직 아이스크림 못 먹어 봤지?”
[그게 뭐임?]
“따라와. 먹여 줄게. 너 먹다가 울 수도 있어.”
[호오, 그 정도임?]
몇 년 만에 편의점을 봤는데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편의점에는 식량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다운 입장에선 양말이나 팬티, 샴푸 같은 생필품이 절실했다.
“괴물들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쓸어 담아!”
“넵!”
안으로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무슨 은행털이범들 같았다.
박 부장의 지시 아래, 진열된 식량들을 배낭 안에 허겁지겁 쓸어 담고 있는 회사원들.
그 모습을 본 정다운은 문득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이상한지 곧 깨달았다.
“……왜 가방에 담지?”
[으잉? 그러게요?]
그때 마침 한아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비닐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정다운 씨는 이 봉투를 쓰세요. 찾아봤는데 이 사이즈가 제일 크더라고요.”
“……네?”
“물론 배낭을 메는 게 이동할 때나 전투할 때 가장 편하긴 한데, 지금은 급한 대로 양손으로 들고 다니셔야겠어요.”
“……?”
엉겁결에 두 손으로 비닐 봉투를 받아 든 정다운은 계속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결국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소지품은 어쩌고 왜 가방에 담아요?”
“무슨 소리세요? 소지품이라니요?”
“아니, 그…… 이거 있잖아요.”
그 순간 뿅, 하고 그의 손에서 사라지는 비닐 봉투 2장.
<소지품>
비닐봉투(2), 흙벽돌(99),
흙벽돌(99), 흙벽돌(99),
……
그의 소지품에 새로운 품목이 추가되었다.
그러자 한아름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지금 그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 그냥 했는데요?”
신기한 마술이라도 본 듯한 그녀의 반응에 정다운이 오히려 당황해 버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명탐정 토끼가 작은 안경을 반짝거리며 그들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라? 님들 설마…… 소지품 능력을 못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