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47)화 (347/393)

<던전리셋 외전 2화>

*   *   *

잿빛 하늘.

무너진 건물들과 쩍쩍 금이 간 아스팔트.

한때 번영했던 도시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황량했다.

‘서울역’

도로 옆으로 허리가 꺾여 있는 표지판이 간신히 지명을 표시해 주고 있는 도시.

주인 없는 차들이 어지러이 멈춰 있는 그곳의 도로 위를 소리 없이 걷고 있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중간쯤에 걷고 있던 중년 남성이 모두에게 속삭였다.

“다들 긴장해. 여기서부턴 본격적으로 도마뱀들의 소굴이니까.”

“알겠습니다, 부장님.”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먼지 묻은 정장을 걸친 회사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평소에 성질만 부리고 잔소리꾼이던 부장님이 어느 날 각성자가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직원들 중에서도 각성자가 몇 명 더 있었지만, 연배와 직위 덕분에 부장이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차라리 처음부터 리더가 정해져 있는 편이 마음 편했다.

“도마뱀들은 귀가 어둡지만, 시각과 후각이 뛰어나. 탈취제로 냄새는 최대한 감췄지만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사방을 계속 경계해.”

서울역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괴물 도마뱀들은 이 도시 전역에 퍼져 있었다.

개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덩치가 큰 놈들은 한입에 사람을 집어 삼키는 위험천만한 놈들이었다.

“쓸데없는 접전 없이 우리는 조용히 식량만 주워 가면 되는 거야.”

“그 먹성 좋은 놈들이 식량을 아직 남겨 두었을까요?”

앳된 인상의 여직원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짓자 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놈들은 활동성이 없어서 잘 돌아다니지 않아. 대부분은 전철역에 붙어 있는 백화점 식품 코너에 모여 있다고. 그 덕분에 이 근처 편의점들은 아직 무사할 가능성이 커.”

“과연 부장님이십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뒤를 따르던 김 실장이 잽싸게 아부를 떨었다.

스킬을 각성하지 못한 김 실장이 뒤바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에게 빌붙어야만 했다.

김 실장은 앞을 가리키며 빠르게 속삭였다.

“저깁니다. 저기가 바로 제가 아침마다 들리는 편의점입니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 김 실장.”

“죄, 죄송합니다.”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편의점으로 다가간 회사원들.

다행히 편의점 안에는 도마뱀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부가 완전히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젠장. 허탕이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먼저 털어 간 곳이야.”

선수를 뺏겼다.

식량을 노리는 경쟁자가 괴물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생존자는 그들 외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편의점을 찾아 발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쿠르릉!

“……!”

갑자기 그들의 등 뒤에 있던 건물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샤아아!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듣자마자, 회사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젠장! 튀어!”

“왜 걸려도 하필 코모도야!”

괴물 도마뱀들 중에서도 가장 큰 괴수를 사람들은 임의로 ‘코모도’라 부르고 있었다.

거의 트럭만 한 크기의 괴수가 지하주차장에서 기어 나와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오기 시작했다.

“하, 한아름 씨! 발을 묶어!”

“넵! 물의 정령이여!”

부장의 다급한 명령에 앳된 여직원이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투명한 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둥글게 뭉쳐졌다.

“물폭탄!”

퍼엉!

그녀가 쏘아 올린 작은 물폭탄이 코모도의 얼굴에 적중했다.

샤아아?

고작 물 한 바가지 맞았다고 코모도가 데미지를 입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 벌이로는 충분했다.

코모도가 물을 털어 내기 위해 그 자리에 멈춰 얼굴을 푸르르 흔드는 동안.

“좋아! 그렇게 계속 시간을 끌어! 마무리는 내가 한다!”

어느덧 뒤에서 부장이 거만한 표정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불꽃꼬리!”

화르륵!

그의 양손에서 새빨간 화염의 꼬리가 둥글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 스킬은 불꽃을 여러 번 회전시킬수록 폭발력이 점점 올라간다.

발동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누가 시간만 끌어 주면 엄청난 데미지를 보장했다.

“터져랏!”

콰아앙!

최대로 완성된 불꽃꼬리가 코모도의 몸을 덮쳤다.

실로 엄청난 폭발력!

저 거대한 괴수가 단 한 방 만에 뒤로 넘어갔다.

쿠웅!

“됐다! 내가 코모도를 잡다니!”

부장은 자신이 해낸 업적에 본인 스스로도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귀가 어두운 도마뱀들이라도 지금처럼 큰 폭발음에는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샤아아아-.

“이, 이런…….”

그들은 어느새 소리를 듣고 모여든 괴물 도마뱀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코모도 정도로 큰 개체는 없었지만 사람만 한 크기의 뿔 도마뱀들이 수십 마리나 있었다.

“이런 제기랄! 더 모여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여길 뜨자!”

“크윽!”

결국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난전이 시작되고 말았다.

각성자는 스킬로, 비각성자는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며 이를 악물고 뿔 도마뱀들에게 달려들었다.

“끄아악!”

김 실장이 가장 먼저 피를 뿌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도마뱀들이 휘두르는 굵고 긴 꼬리에 얻어맞으니 차에 치인 것처럼 아팠다.

고통을 참으며 바닥을 기어 뒤로 이탈하던 김 실장은 갑자기 앞이 가로막히자 위로 고개를 들었다.

샤아아.

“헙!?”

엎친 데 덮친 격.

불꽃꼬리에 죽은 줄 알았던 코모도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 살려……!’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코모도의 거대한 입이 김 실장의 몸을 통째로 뜯어먹으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파아앗!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게이트가 열렸다.

[이얍! 내가 왔닷!]

게이트 안에서 발랄하게 뛰쳐나온 존재는 놀랍게도 턱시도를 입은 새하얀 토끼였다.

샤아아?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코모도는 김 실장의 머리 위에 입을 벌린 채로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눈알만 돌려 그곳을 쳐다봤다.

그 밑에서 죽음을 직감하던 김 실장도 그대로 얼음이 되어 토끼를 쳐다봤다.

[오호라! 여기가 바로 지구로구나! 어떤 곳인가 항상 궁금했는데 그냥 폭삭 망한 동네였네요!]

깔깔깔. 

깔깔. 깔깔깔.

다짜고짜 웃음보가 터졌다.

정체불명의 토끼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등장과 동시에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주변 경치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분위기 파악 따윈 전혀 없는 그 이상한 광경에 급박하게 흘러가던 시간이 강제로 멈춰 버렸다.

흡사 축구 시합에서 심판이 휘슬이라도 불고 작전 타임을 외친 것처럼.

“뭐, 뭐야 저…… 토끼는……?”

“샤아아?”

혼잡하게 뒤섞여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회사원들과 뿔 도마뱀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토끼를 쳐다봤다.

그만큼 토끼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저렇게 갑자기 허공에서 게이트가 열렸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또다시 새로운 이계의 괴물들이 지구를 침입했거나.

아니면 새로운 귀환자들이 던전 게임에서 돌아왔거나.

전자라면 최악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건 토끼잖아?’

‘일단 사람은 아니니까, 괴물…… 이라고 봐야 하나?’

‘그런데 왜 말을 하지?’

‘왜 옷을 입고 있지?’

사람들의 머릿속이 수많은 물음표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어색한 반응에 토끼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임? 님들 기억 없어진다더니 설마 나도 기억 못하는 거임? 와, 너무하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흥.]

“……?”

뭘까, 이 분위기는?

처음 보는 토끼가 갑자기 자신들에게 삐쳐 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곧이어 말이 통하는 상대가 게이트에서 걸어 나왔다.

터벅.

“……여기 진짜 꼴이 왜 이렇게 됐냐. 무슨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분위기네.”

토끼의 뒤를 따라 게이트를 넘어온 정다운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구도 종말이 시작됐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흐읍.

오랜만에 맡는 도시의 공기는 텁텁했다.

공기는 오히려 던전 쪽이 훨씬 맑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돌아오니까 좋네.”

크게 심호흡을 한 정다운은 어딘가 간질간질한 표정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여느 귀환자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지구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게다가 정다운이 빠져나온 게이트가 다시 천천히 닫히는 모습에, 위기에 처해 있던 회사원들은 그가 귀환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귀, 귀환자다! 이제 살았다!”

“거기 학생! 우리 좀 도와줘요!”

“……네? 저요?”

“그래, 당신! 당신 귀환자잖아!”

“뭘 도와…….”

누군가에게 귀환자라고 불려 본 적 없던 정다운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했던 토끼가 드디어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아항? 여기 지금 전투 중이었나 봐요. 남들 레벨 업 방해하지 말고 얼른 지나갑시당.]

“아하, 그럴까?”

아니,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지나가지 마! 도와 달라고!”

“우릴 구해 달라고!”

[아하. 구해 달라는 말이었나 봐요.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그런데 그때였다.

회사원들이 동시에 기겁한 얼굴로 정다운의 뒤를 가리켰다.

“헉! 위험해! 코모도가……!”

샤아아-.

잠시 멍 때리는 사이 어느새 정다운의 바로 등 뒤에 거대한 괴수 코모도가 다가와 있었다.

괴물 도마뱀들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피해요! 물폭탄!”

물의 정령을 부리던 여직원이 정다운을 구하기 위해 다급히 스킬을 날렸다.

하지만 코모도는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앞발을 휘둘러 물폭탄을 튕겨 냈다.

그리고 곧장 그 앞발로 정다운의 머리를 위에서부터 내리찍었다.

“아, 안 돼!”

그 모습에 사람들이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완성된 스킬을 가지고 돌아온 귀환자라 할지라도 방심하면 죽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정다운은 그야말로 방심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여유나 부리고 있었으니까.

“돌 깨기.”

툭.

코모도의 앞발보다 정다운의 발뒤꿈치가 탭댄스를 하듯이 지면을 내리찍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런데 그 지점을 시작으로 단단한 아스팔트가 두 갈래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산산이!

쩌저적! 쿠릉! 콰르릉!

“샤아악!?”

쿠당탕!

발밑의 땅이 갈라지자 코모도는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저, 저게 무슨……!”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저 발을 한번 굴렀을 뿐인데 지진이 일어났다!

그것도 정확히 코모도의 발밑에만!

하지만 진짜 놀랄 만한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도시라도 한 꺼풀 벗겨 보면 그 밑엔 흙이 있었다.

드러난 흙을 가리키며 정다운이 손바닥을 휙 뒤집었다.

마치 직접 손으로 흙 한 줌을 만지는 듯한 가벼운 손길로.

“흙 뭉치기.”

쭈와아악!

그 순간 땅바닥이 통째로 뒤집히며, 거대한 흙의 파도가 코모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샤아아?”

철퍽!

코모도는 끝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동그란 흙뭉치에 갇혀 도로 위를 굴러다니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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