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45)화 (345/393)

<던전리셋 345화>

그들에게 ‘세계수’가 마지막으로 말을 걸어왔다.

[업적 달성!]

“격의 증명!”

세계수의 성장을 위해 끌려왔던 제물들이 앞으로도 살아갈 자격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던전이 당신들의 업적을 부담스러워합니다.

- 보상 : 던전이 당신들을 원래 세계로 추방합니다.

“스, 승우 형? 이거 설마 진짜로?”

“승우야, 이거 진짜…….”

스테이지-1부터 함께했던 동료들, 구호열과 윤진수가 동시에 류승우를 쳐다봤다.

류승우는 업적에서 눈을 못 뗀 채 입을 더듬거리다 간신히 소리쳤다.

“빨리…… 정다운을 불러!”

“아참! 다운이 형!”

“……!”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아아! 귓말! 귓말!” 

“빨리! 빨리! 우리 다운이도 집에 가야 하는데……!” 

“이 게이트 언제까지 열려 있는 거지? 지금을 놓치면 설마 다시 닫히나!?”

중간부터 합류했던 지서연과 오동민 등 다른 동료들도 허둥지둥 정다운을 향해 귓말을 보냈다.

“그런데 다운이 형을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하죠?”

“으악! 그러게! 당장 오라고 하기엔 우리 너무 멀리까지 올라왔는데?”

“이, 이쪽에서 게이트 못 열어 주나요?”

“우린 게이트 설치 스킬이 없다고요!”

두서없는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정다운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정다운 : 아, 먼저들 가요! 나는 에르테아가 좌표 알려 줘서 게이트 스킬로 언제든 왕복할 수 있으니까!>

“……!”

그의 귓말을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봤다.

“그, 그렇다는데?”

<정다운 : 아, 그리고.>

이어서 귓말 한 줄이 더 날아왔다.

<정다운 : 이곳에서의 한 달이 지구에선 하루래요. 내가 한참 늦게 가도 어차피 도착하는 타이밍은 비슷할걸?>

“……어, 음.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그, 글쎄요. 대충 2년쯤?”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달력을 넘기는 일행들이었다.

“그럼 저쪽에선 대충 한달쯤 우리가 실종된 셈이네. 부모님이 나 가출한 줄 아시겠다.”

“엄청 혼나겠네요.”

“난 어쩌죠?”

던전에서 지내면서 키가 거의 30센티쯤 폭풍 성장해 버린 오동민이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성장기라고 우겨.”

“한 달 동안 컸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컸는데요?”

“동민이 형, 행복한 고민 때려치워요. 난 2년간 2센티 컸다고요.”

움찔?

지난 2년 동안 거의 키가 크지 않은 윤진수의 말에 오동민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윤진수는 지서연을 비롯해서 이곳에서 한 번 죽고 숲의 일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었다.

“설마 강제로 채식주의자가 돼서 키가 안 크는 건 아니겠죠? 하아,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편식하지 말라고 엄청 뭐라 하겠다.”

“…….”

당장 집에 돌아가려 하니 고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이건 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럼 진짜 우리 먼저 가도 되는 거야?”

“진짜? 진짜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드디어 그토록 그리던 집에 가는 것이다!

“다운아.”

류승우는 씨익 웃으며 정다운에게 귓말을 보냈다.

“그럼 우린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 같이 회식이나 한번 하자. 치킨과 피자로.”

파아앗!

그리고 과감히 눈앞의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   *   *

그렇게 모두를 지구로 보낸 뒤. 

알파의 잔소리에 못 이겨 시멘트를 발라 대신전을 보수하고 있던 정다운에게 토끼가 히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거 아셈?]

“그거가 뭔데?”

[에르테아 님이 그랬는데, 일기에서 태어난 세계수는 빈 화분에만 뿌리를 뻗는대요.]

“그게 갑자기 뭔 말이야?”

정다운이 손을 멈추고 토끼를 바라봤다.

토끼는 땅과 하늘 위로 사방팔방 뿌리를 뻗고 증식해 있는 세계수를 가리켰다.

격이 낮았던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수의 투명한 뿌리들이 이제는 너무나 잘 보였다.

[세계수는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 겉모습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어도, 어느 세계든 세계수는 존재해요. 그 세계수가 사라지면 그 세계엔 종말이 찾아오죠.]

“그래서?”

[말했잖아요. 세계수는 빈 화분만 탐낸다고요. 다른 세계수의 영역은 절대 침범하지 않아요.]

“……잠깐 설마.”

순간 정다운은 한 방 먹은 표정이 되었다. 토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눈치챈 것이다.

[그런데 세계수가 하필 님들이 사는 지구에 구멍을 뚫고, 빨대를 꽂았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음?]

토끼는 단호히 말했다.

[결국 지금 님들이 살던 지구도 멸망하는 중이라는 거임. 본래 있던 세계수가 어떻게 됐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빈 화분일 테니까.]

“……!”

그리고 그 사실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에르테아는 정다운이 돌아갈 세계를 위해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지구로 돌아가는 류승우 일행을 향해, 에르테아는 중요한 이야기를 귓말로 속삭였다.

“여러분들의 세계는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이곳에서 얻은 힘으로 직접 당신들의 세계를 구해 내시길 바랍니다.”

“……!”

“던전 게임에서 살아남은 당신들이 성취한 모든 업적들은 고스란히 지구에도 기록될 테니까요.”

‘자, 잠깐……!’

‘그게 무슨 말…….’

에르테아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들은 빠른 속도로 지구로 보내졌다.

정다운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을 왜 이제야 얘기해?”

[그럼 언제 얘기해요? 지금 얘기해 줬으면 됐지. 게다가 어차피 여기서의 하루가 저쪽에선 1시간도 안 되잖아요. 서둘러 봐야 고작 몇 분 차이일 텐데요.]

“아, 하긴 그러네.”

토끼의 말에 정다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벽에 시멘트를 발랐다.

“하긴 저번에 게이트 너머로 보니까 아직 멀쩡하더라.”

[맞아요. 그리고 좀 멸망하면 어때요? 그래서 그쪽에 번개맨 보냈잖아요.]

“아, 그러네? 승우 형이라면 걱정 없지.”

[그럼요. 종말의 때엔 역시 영웅이 필요한 법이죠.]

무려 세계수에게도 인정받을 정도로 격이 상승한 류승우를 떠올리자, 정다운의 얼굴은 더욱 편안해졌다.

*   *   *

그리고 지구에서는.

이미 종말이 시작되고 있었다.

크르렁! 캬오오!

“으아악! 살려 줘!”

일제히 개방된 게이트에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가 질서가 붕괴되었고, 인류가 멸망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 살려! 괴물이다!”

“누가 좀 구해 주세요!”

지구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인류에게도 아직 희망의 씨앗은 남아 있었다.

“……어?”

던전 게임에서 목숨을 잃고, 에르테아 덕분에 다시 살아나 지구로 돌아온 참가자들.

그들은 던전에서 이룩한 모든 힘을 잃고, 기억조차 잃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스킬.

화르륵!

“이, 이건……?”

‘석정호’는 자신의 손에서 나타난 ‘화염충’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록 기억이 사라지고, 모든 스킬들이 1레벨로 초기화되었을지라도. 

위기에 처하는 순간 그들의 육체는 그 스킬을 스스로 기억해 냈다.

사람들은 스킬을 각성한 이들을 가리켜 ‘각성자’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지만 얼마 후, 사람들은 곧 깨닫고 말았다.

각성자들은 이제 막 능력을 개화한 던전의 초보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과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울 정도로, 던전 게임에서 당당히 살아남은 ‘귀환자’들이 게이트를 열고 지구로 귀환한 것이다!

등장할 때부터 이미 완성에 가까운 힘과 격을 가지고 있는 영웅들이 본격적으로 종말에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기 시작했다.

“뇌전이여!”

콰르릉! 콰앙!

평범한 태권도 사범이었던 류승우는 한순간에 인류의 영웅이 되어 버렸다.

그가 괴물들에게 시민들을 구해 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뭐가 이래? 왜 원래 세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싸워야 하는 거지?”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 샌가 그는 또 다시 사람들에게 ‘푸른 광휘의 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칭송받고 있었다.

물론 정작 당사자는 부담스럽고 민망할 따름이었다.

“대체 이 민망한 별명은 누가 먼저 부르기 시작한 거냐고!”

그의 말에 뒤에 있던 윤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승우 형. 역시 이번엔 ‘인류의 희망’이나 ‘인류의 구원자’라는 별명이 나았을까요?”

“범인이 너였냐!”

“애들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누구보다 오늘밤 회식을 기대하고 있던 구호열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물론 손으로는 무모하게 덤벼드는 괴물의 사지를 가차 없이 찢어발기면서.

“그럼 피자는? 치킨은? 우리 오늘 설마 회식 못 하는 거야?”

“무리예요, 형님. 가게 건물도 무너졌고, 사장님도 도망쳤잖아요.”

“으악! 그래도 재료는 남아 있을 거 아냐! 이런 젠장! 오늘 드디어 맥주 좀 마셔 보나 했더니!” 

크르락!

무시무시한 기세로 울부짖으며 괴물들에게 모든 화풀이를 쏟아붓는 구호열의 살벌한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행들의 입에서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다운아, 제발 빨리 와라.”

“다운이 형, 와서 피자 좀 만들어 줘요. 재료는 다 있으니까.”

*   *   *

“가시게요?”

부활한 후에도 여전히 대신전에 웅크리고 있던 에르테아가 한쪽 눈을 슬쩍 떠 정다운을 쳐다봤다.

“응, 잠깐 집에 좀 다녀올게.”

가벼운 차림으로 서있는 정다운의 모습에 에르테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거기선 잠깐이겠지만, 여기선 엄청 오랜 시간이겠네요.”

“넌 어차피 수명 길다며?”

“맞아요. 그나마 다행이죠. 저도 딱히 여기서 할 일이 없지만, 그렇다고 제가 이 세계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에헴! 그래서 대표로 내가 따라감!]

에르테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곁에 서 있는 토끼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그래도 틈틈이 게이트 열고 이쪽으로 놀러와 주세요.”

“그럼 당연하지. 여기가 내 집인데.”

“……!”

[오잇? 그런 말을 하다닛?]

정다운의 말에 에르테아와 토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정다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다 여기에 두고 가는데, 여기가 내 집이 아니면 또 어디겠어?”

“……가시는 곳까지 태워 드릴게요. 아직 류승우 님이 들어가신 게이트가 남아 있을 거예요.”

“그래. 같은 게이트로 나가야 금방 만나겠지? 오늘 회식하기로 했거든.”

<돌아오실 땐 게이트 열고 아무 데서나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촤아악!

잠시 후, 정다운은 생명의 용 에르테아를 타고 던전의 하늘 날아올랐다.

“와!”

탄성이 절로 터졌다.

그러자 그동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냈던 수많은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던전에 어울리지 않는 화창한 날씨.

그 아래 산과 골짜기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던전들!

그리고 뜬금없이 둥둥 떠 있는 네모난 인공위성 전망대들과 더 높이 올라가면 보이는 신비로운 부유섬들!

보랏빛의 구름섬들까지!

“풉, 저건 아직도 저대로 있네?”

문어 열차를 타고 구름섬을 빠져나오면서 생겨난 흔적들, 바로 공중 계단들과 공중 철도들이 허공에 줄지어 떠 있었다.

그 위치가 너무 뜬금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만들었던 것들을 이렇게 하늘 위에서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다. 

이 던전 전체가 바로 정다운의 아지트였다.

“……이번에 지구에 가면 백화점 탈탈 털어 와야지. 식재료도 사고, 전자렌지도. 아, 그러려면 휴대용 발전기부터 사 와야 하나?”

[님, 또 무슨 불길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거임? 요즘 던전 밸런스 딱 좋거든요? 제발 부탁이니까 다된 던전에 오류 뿌리지 마셈.]

옆에서 들리는 토끼의 잔소리에 정다운은 결심했다.

“아, 그럼 차라리 여기 있는 것들을 지구로 가져가는 건 괜찮지? 골렘이라든가, 아이템이라든가.”

[그건 맘대로 하시고요. 어차피 우리 던전도 아닌데. 아, 그보다 세계수의 씨앗은 챙겼죠?]

“당연하지. 없으면 업적 읽어서 다시 만들어 내도 되고. 내가 명색이 세계수 정원사라고?”

토끼가 묻자 정다운은 소지품을 열어 그 안을 확인했다.

그를 태운 에르테아가 빠르게 구름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잘 챙기세요. 그 씨앗을 지구에 심어서 잘 키워 내야 비로소 종말이 멈출 테니까요.”

“응. 마침 그쪽에 세계수 키우기 전문가인 숲의 일족들이 넘어가 있잖아? 걱정 붙들어 매라고.”

[걱정은 사실 님 같은 오류종자를 지구로 보낸다는 게 더……. 아얏. 헤헤.]

토끼는 옆에서 뭐라 중얼거리다 꿀밤을 한 대 얻어맞고도 뭐가 좋은지 실실 웃었다.

그런데 그 위로 뽀뀨가 갑자기 은빛 날개를 펼치더니 앞으로 뛰어내렸다.

“뽀뀨우-!”

폭신.

은빛 종이비행기처럼 가볍게 활강하던 뽀뀨가 착지한 곳은 분홍색 구름 위였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정다운이 앞을 바라봤다.

저만치 앞에 일행들이 먼저 들어간 게이트가 보였다.

그가 세계수의 씨앗을 손에 쥐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럼 취미로 지구 좀 구하고 올게!”

[기껏해야 나무 심고 오는 거면서 거창하게 말하지 마셈. 아얏.]

“뀨잇!”

(던전리셋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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