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44화>
* * *
마녀의 집에 도착하자, 마녀들의 리치 바하무트가 빗자루를 들고 그들을 반겨 주었다.
[감히! 주인님의 처소를 침입한 자가 누구냐!]
“집 잘 지키네. 얘한테는 따로 부탁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게요.”
정다운은 피식 웃으며 사납게 덤벼드는 바하무트를 발로 뻥 차 버렸다.
[크악! 분하다! 정화의 힘을 담아서 발차기를 하다니!]
“엄살은? 안 죽는 거 알아.”
[이번에도 또 벽에 구멍을 뚫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구멍 다시 리셋됐잖아?”
[땅을 파도 안 된다!]
“알았어, 알았다고.”
정다운은 자꾸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을 감시하는 바하무트를 적당히 상대해 주며 그림자 결계가 새겨진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결계의 중심에 흑토끼와 나란히 서서 그림자 비술을 펼쳤다.
“그럼 미래로 돌아가자. 그림자 비……!”
그때였다.
먀옹?
“음?”
“엥? 저 고양이?”
구석에서 마녀들이 키우던 검은 고양이가 이쪽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다운과 흑토끼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아, 맞다. 그럼 쟤가 세르파겠네? 주인 오기만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어쩌냐?”
세르파의 주인인 마녀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몇몇은 에르테아의 손에 죽었고, 또 몇몇은 에르테아의 손을 붙잡고 생명의 사도가 되어 잠든 것이다.
“그러게요. 어차피 나중에 님한테 쥐어 터지고 죽겠지만, 지금은 주인을 잃은 평범한 고양이라 좀 불쌍하네요.”
그러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흑토끼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 혹시 이런 것도 되나?”
딸랑.
“오, 되네?”
그러자 흑토끼의 손에 작은 방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벨을 만들 때 쓰는 그림자 방울이었다!
정다운이 눈을 반짝였다.
“오? 그 방울 어떻게 만든 거야?”
“어, 음. 세르파 보니까 생각나서 한번 만들어 봤는데 되네요? 다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원리까진 잘 모르겠음.”
“더 만들 수도 있어?”
“될 거 같아요.”
딸랑, 딸랑, 딸랑.
흑토끼의 손에서 마술처럼 계속 생겨나는 그림자 방울들을 보며 정다운은 뛸 듯이 기뻐하며 흑토끼를 덥석 껴안았다.
“세상에! 이러면 그림자 하인들을 전부 그림벨로 진화시킬 수 있겠어!”
“에헴. 더 칭찬하셈. 이게 바로 창세의 흑토끼 님이심! 음하하!”
흑토끼는 한껏 우쭐대며 그림자 방울들을 전부 정다운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것들을 받아 든 정다운이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지품에서 가죽끈 하나를 꺼내, 그 중심에 방울 하나를 매달았다.
흑토끼가 눈을 빛냈다.
“그건 설마?”
“생각해 보니까, 이거 하나는 쟤한테 돌려줘야 미래가 꼬이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야. 더 이상의 오류는 나도 싫다고.”
정다운이 그림자 방울이 달린 고양이 목걸이를 들고 검은 고양이 세르파에게 다가가자, 세르파가 사납게 털을 세우고 그를 경계했다.
“캬악!”
“에이, 도망가지 말고 이리 좀 와 봐.”
“캭!”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를 달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에이, 이리 줘 보셈.”
보다 못한 흑토끼가 그의 손에서 고양이 목걸이를 넘겨받고, 그의 곁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뿐사뿐 세르파에게 다가가 천천히 인형 탈을 벗었다.
샤라락.
그 순간 흑토끼의 인형 탈 안에 감춰져 있던 흑단 같은 머릿결이 폭포수처럼 찰랑였다.
“어? 역시 인간이었…….”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
마침 흑토끼의 뒤에 있던 정다운은 얼굴은 보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뜰 뿐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이쪽을 보고 있던 리치 바하무트는 흑토끼의 드러난 얼굴을 보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헉! 주, 주……!]
“니야앙.”
경계심 가득하던 세르파는 어느새 다가와 흑토끼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후훗.”
그 귀여운 모습에 흑토끼는 가볍게 웃으며 세르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목에 목걸이를 단단히 채워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력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진다면, 이게 분명 도움이 될 거임. 그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셈.”
딸랑-
검은 고양이는 흑토끼의 선물을 귀찮아하면서도 항상 목에 걸고 다녔다.
소중히.
“……이제 진짜 돌아가죠.”
“그림자 비술!”
번쩍!
그 순간 그림자 결계가 정다운과 토끼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모두가 그들을 잊었다.
* * *
그리고 미래의 마녀의 집.
번쩍!
“……림자 비술!”
정다운과 토끼는 무사히 미래로 돌아왔다.
“뽀뀨우-!”
[오오! 주인님! 무사하셨나이까!]
마녀의 집에 남아 있던 은빛 날다람쥐 뽀뀨와 눈사람 바하무트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들을 반겨 주었다.
“뀨잇! 뀨뀨!”
“오구. 그래, 그래. 나 많이 보고 싶었다고?”
정다운은 한달음에 날아와 품에 쏙 안기는 뽀뀨를 안아 들고, 바하무트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하무트, 우리 방금 옛날의 너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너 많이 말랐더라.”
[허허.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이었나이다. 물론 리치라서 원래 혈기는 없지만.]
바하무트는 부끄럽다며 민망해하다가, 흑토끼로 변한 토끼의 모습에 뒤늦게 감탄해 주었다.
[토끼 선배는 몰라볼 정도로 격이 상승하셨구려!]
“이히히! 이게 바로 님과 나의 눈높이임. 앞으로 나를 존경하셈!”
[허허. 잊으셨소? 저도 전에 격이 상승했지. 그 정도 변신쯤은 저도 가능하나이다.]
휘오오!
신나서 우쭐거리는 흑토끼가 얄미웠는지 바하무트도 눈보라를 일으키며 몸을 새롭게 구축했다.
휘오오!
하얀 눈이 뭉쳐지며 흑토끼처럼 길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바하무트에게 생겨났다.
그러자 그 모습은 마치…….
흑토끼가 황당하다는 듯 바하무트를 쳐다봤다.
“그 모습은 뭐임? 검은 여왕의 눈사람 버전임? 따라쟁이네!”
[허허. 내가 아는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이 이런 모습인 걸 어쩌겠나이까.]
정다운은 평상시처럼 서로 티격태격하며 수다 떨며 놀고 있는 토끼와 바하무트의 사이를 지나치며 말했다.
“자, 그만들 하고. 이제 진짜 에르테아를 마중하러 가자.”
<아아, 드디어……!>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알파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눈은 없지만.
* * *
정다운이 과거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그의 골렘들은 계속해서 불귀신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대신전에 잠들어 있던 에르테아의 몸은 완전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파앗!
찬란한 빛에 휘감긴 에르테아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뛰고 있었다.
그 앞에서 정다운이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에르테아,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
그리고 그의 부름에, 몇 백 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생명의 용이 눈을 떴다.
몇 번을 몽롱하게 눈을 깜빡이던 에르테아의 눈빛이 정다운을 발견하고,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을 냈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이 덩치만 큰 꼬맹아.”
정다운도 마주 웃어 주었다.
<아아아……!>
알파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드디어 생명의 용 에르테아가 부활하고 만 것이다!
알파는 그녀와 함께 잠들어 있던 모든 사도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뭐하는가! 죽은 자는 살아나 무덤에서 기쁨의 함성을 지르라! 생명의 용이 부활하셨다!>
번쩍!
그 순간, 에르테아의 대신전이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까마득한 아래.
언젠가 정다운이 쥐똥 비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공동묘지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생명의 사도들이 몸을 일으켰다.
찬란한 빛과 함께.
그리고 그 빛에 이끌려, 한 어둠의 존재가 은린어를 타고 대신전에 도착하고 말았다.
꾸어엉!
“……드디어 찾았다. 신전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었을 줄이야.”
은린어들의 등에서 뛰어내린 도플갱어의 왕.
그는 정중히 에르테아의 앞에 나아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당신의 사도가 되어 이 땅을 수호하겠나이다. 그러니 부디 잠과 밥의 축복을…….”
“허락합니다.”
에르테아는 기꺼이 그를 생명의 사도로 삼아 곁에 두었다.
종말의 서는 그의 배신에 극히 분노했지만, 혼자 씩씩거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도플갱어의 왕은 드디어 정다운이 차려 준 푸짐한 밥상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
“뽀뀨?”
“왜. 뭐.”
밥상 위에 먼저 올라온 은빛 날다람쥐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척.
뽀뀨는 선심 쓴다는 듯이 그의 앞에 뼛조각 하나를 내려놓았다.
“뽀뀨.”
“…….”
신입 식객에게 주는 선배의 선물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부유섬의 끝자락.
“어? 이 느낌은?”
아라크네의 탑에서 숯을 만들고 있던 작은 소녀 ‘메모리’는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없는 함성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세르파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누가 부른 것 같아서.”
에르테아의 불행했던 과거의 한 조각.
거기서부터 태어난 허상에 불과한 메모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본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곳은 사방이 꽉 막힌 마녀의 탑.
밖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에르테아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젠 괜찮아.’
메모리는 그 목소리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수고 많았어요. 내가 이렇게 좋은데, 당신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야 당연하지. 넌 나니까.’
메모리의 대답에 에르테아도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메모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우린 하나가 될 거야. 그동안의 너의 모든 기억들과 나의 모든 기록들을 동기화할 거야. ‘아저씨’와 만났던 모든 순간들을 없애기는 아깝거든.”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메모리의 중얼거림에 세르파가 걱정스럽게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메모리는 미소 지었다.
“응. 나는 어느 때보다도 괜찮아. 비로소 우리가 하나가 됐거든. 난 여전히 이곳에 있지만, 내 이름은 ‘에르테아’야.”
비로소 메모리는 에르테아의 완벽한 분신이 되었다.
그녀가 그동안 자신들이 만났던 모든 참가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났으니, 이 땅에서 일어난 모든 죽음들도 무효야.”
……!
그 순간 빛이 있었다.
몇 백 년간 이어져 온 던전 게임에서 가엾이 죽어 갔던 모든 죽음들이 생명의 빛을 얻었다.
에르테아가 정다운에게 말했다.
“던전 게임에서 죽은 사람들을 전부 원래 세상으로 돌려보낼게요. 이곳에선 여전히 죽은 사람들이니까요.”
“그럼 진짜 되살아나?”
“네. 대신 그들은 이곳에서 얻은 모든 ‘격’을 잃게 될 거에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요. 레벨 초기화죠, 뭐.]
토끼의 말에 에르테아가 긍정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들의 모든 기록을 말소시켰어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용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의 죽음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그 부작용으로 그들이 이곳에서 경험했던 ‘기억’까지 전부 지워지겠지만, 어쨌든 살아나면 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그럼 된 거지.”
“그리고 종말의 서가 여전히 제 사도인 흑토끼 님의 안에 있는 이상, 앞으로도 던전에서 죽는 사람들은 전부 이렇게 되살릴 수 있게 됐어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업적을 종알종알 자랑하는 거대한 용 에르테아에게 정다운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딱 하나만 더 물었다.
“그러면 말이야. 던전에서 안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
“그야…… 계속 던전 게임을 해야겠죠? 물론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죽으면 되겠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스스로의 격을 세계수에게 증명하게 된다면…….”
* * *
등천로보다 아득히 높은 곳.
그곳에 둥둥 떠 있는 수많은 구름섬들.
그곳에는 저마다 ‘작은 세계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세계수 정원사’가 딱 하나 남겨 둔 세계수는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하늘까지 뿌리를 확장시켰다.
기껏 다른 세계에서까지 끌고 온 자원들, 던전 게임의 참가자들이 세계수가 닿지 않는 하늘 위로 올라가자 그들을 따라서 부유섬과 구름섬들까지도 자기 영역으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름섬들은 본래 바다가 끓어오른 수증기로 만든 ‘테라리움’.
더없이 세계수가 자라나기 좋은 환경이었던 그곳에 세계수는 자신의 작은 묘목들을 하나씩 심어 두었다.
언제 또 그 무서운 ‘세계수 정원사’가 나타나서 자신을 벌목할지 모르니 보험을 만들어 둔 것.
그런데 오늘 마침 그곳 끝자락에서, 그동안 세계수의 수많은 시련들을 이겨 내고 ‘자격을 증명한’ 이들이 나타났다.
파아앗!
“저건 뭐야……?”
류승우 일행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게이트를 보고.
“설마 환상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믿고 싶은 환상인데.”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 너머에는 그들이 그토록 그리던 회색의 도시가 보였다.
지구.
바로 자신들이 살던 지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