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43)화 (343/393)

<던전리셋 343화>

*   *   *

“우와. 원래 여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어?”

과거의 생명의 신전을 본 정다운의 감탄사에 알파가 이때다 싶어 투덜댔다.

<그렇습니다. 제발 지금 이 모습을 꼭 기억하시고, 미래로 가시면 똑같이 복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파, 넌 지금 그게 중요해? 에르테아가 오늘 죽는 마당에?”

[그러게요. 사이코패스인가? 이래서 도플갱어 출신들이란.]

<…….>

정다운과 토끼의 연합 공격에 알파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한편 에르테아는 대신전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 그럼 죽어요. 아저씨, 미래에서 봐요?”

“인사가 너무 발랄한 거 아냐?”

“어차피 부활까지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정다운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는 에르테아.

종말의 서가 그녀를 재촉했다.

[크흐흐. 그만 닥치고 어서 죽거라! 그럼 이 세상은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수많은 죽음들이 이 땅에 도래할 터!^-^ 낙서하지 마랏!]

[앗, 죄송? 웃길래요.]

토끼가 낄낄댔다.

에르테아는 토끼의 손에 들린 종말의 서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왜 저 혼자 죽는다고 생각하세요? 종말의 서, 당신도 같이 죽을 건데?”

[……뭐? 그게 무슨 헛소리냐.]

순간 종말의 서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가리키며 에르테아가 정다운을 불렀다.

“아저씨, 토끼 등 뒤에 지퍼가 있을 거예요.”

“있지.”

“지퍼를 열고 인형 안에 종말의 서 좀 넣어 주실래요?”

“그래.”

[……?^-^]

찌익, 하고 지퍼가 열렸다. 

정다운이 종말의 서의 책장을 덮고 토끼의 몸속에 쑥 집어넣었다.

종말의 서가 당황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수작이지?]

“그 토끼 인형은 제가 직접 만든 책가방이에요. 아주 오랫동안 생명의 서를 담고 있었죠.”

[……?]

에르테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종말의 서가 느끼는 불길함도 점점 커져 갔다.

“처음부터 그 책가방의 목적은 생명의 서를 담기 위함이었어요. 토끼 님은 그걸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말이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생명의 서를 담았던 책가방 속에 종말의 서가 들어갔다.

“그럼 닫는다?”

[얍얍!]

찌익!

그 순간 정다운이 토끼의 지퍼를 닫았다.

[……!]

읍읍읍!

그러자 종말의 서의 목소리가 더 이상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생명의 서를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던 토끼 인형이, 이번엔 종말의 서를 완전히 숨겨 버린 것이다.

아니, 가둬 버린 것이다.

정다운이 그를 불렀다.

“안에서 내 말 들려? 그래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계속 말해 줄게.”

덥석.

정다운이 계속 설명을 이어 가며 두 손으로 토끼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에르테아를 위한 제단 위로 올렸다.

“우린 토끼를 이대로 제물로 바칠 거야.”

[에헴. 여기에선 내가 아직 생명의 사도가 아니거든요. 몸뚱이도 다르고요. 그래서 나는 이 인형 몸뚱이를 제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사도가 될 거임. 그럼 어떻게 되게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정다운은 짓궂게 웃으며 종말의 서에게 말해 주었다.

“너도 덩달아 생명의 사도가 되는 거지. 정확히는 생명의 사도의 아이템쯤 되려나. 마녀들이 들고 다니는 생명의 서 사본처럼?”

[……!?]

읍읍읍!?

종말의 서는 극도로 당황했다.

비로소 이들의 목적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번거로운 과정 없이 당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오히려 당신은 제 몸을 빼앗아 종말의 용으로 만들겠죠. 당신은 죽은 제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방식이라면 괜찮았다.

제물로 바치는 건 어디까지나 토끼 인형뿐이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에르테아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괜찮겠지.”

“맞아요. 저도 이제 생명의 용으로 산 지 꽤 연차가 생겨서 제물에 대해서는 빠삭하답니다.”

“자, 그럼! 이 인형을 제물로 바칩니다!”

[얏호!]

파아앗!

정다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빛이 토끼의 몸을 휘감았다.

씨익.

그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 안에 담긴 죽음의 기록들 또한.”

슈와악!

그 순간 하얗던 토끼 인형의 몸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 검은색 기운이 뭉게뭉게 연기처럼 토끼의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치 바분 황제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을 때처럼.

그리고 그 순간, 토끼를 제물로 바친 정다운에게 새로운 업적이 나타났다.

[최초 업적 달성!]

“창세의 토끼 인형!”

창세 이래, 지금까지 이런 인형은 없었습니다!

생명의 서를 보관하기 위해 태어난 책가방이 종말의 서까지 담아내며, 창세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토끼 인형이 격이 올라 진화를 경험합니다!

- 보상 : 인형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게 뭔 소리야? 인형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를……?”

정다운이 업적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털썩.

검은 연기가 모두 빠져나간 토끼는 다시 평범한 인형으로 돌아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휘오오!

토끼 인형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허공에서 휘감기며 어떤 형상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샤라락.

검은 실루엣이 길고 늘씬한 팔과 다리로 변해 간다.

그 끝에서 가녀린 손가락이 생겨났고, 맵시 있는 허리와 가슴 위로 검은 턱시도가 휘감겼다.

그리고 얼굴은…… 토끼.

“냐하핫! 흑토끼 대령이오!”

‘사람처럼’ 우월해진 기럭지와 길고 검은 귀를 까딱이며, 토끼가 허공에서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온몸에서 힘이 넘쳤다!

말 그대로 인형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 모습에 정다운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야? 너 설마 사람이 된 거야? 그 인형탈은 또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건데?”

“어허, 이거 왜 이러셔? 이게 내 얼굴임! 예쁘지 않음? 이히히!”

샤랄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렵한 검은색 턱시도를 휘감고 나타난 토끼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뽐냈다.

그때마다 턱시도 뒤에 달린 제비꼬리가 망토처럼 흔들렸다.

“짠! 이것을 보시라! 세상 우월한 기럭지!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완벽한 몸매!”

“…….”

생긴 건 영락없이 맵시 있게 차려입은 집사 같은데, 하는 짓은 경박하기 그지없었다.

정다운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저 얼굴에 뒤집어쓴 새까만 토끼 인형탈은 대체 뭘까.

왜 인형 주제에 진짜 얼굴처럼 입을 벙긋거리고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저거, 벗길 수는 있을까? 

그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알고는 싶은데, 무리해서 벗겼다간 굳이 몰라도 되는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될 것 같아 겁났다.

그냥 인형에서 격이 올라 괴상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토끼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에르테아가 물었다.

“토끼 님, 종말의 서는 어디 있나요?”

“짠. 여기 있죠.”

찌익!

토끼가 허공에서 지퍼를 열며 자신의 옷장에서 종말의 서를 불쑥 꺼냈다.

그러자 그 순간, 토끼가 다시 작아지며 하얗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인형의 모습이 아닌, 미래에서 도우미였을 때의 모습으로.

[오? 원래대로 돌아왔네요? 종말의 서를 지퍼 안에 넣을 때만 흑토끼로 변신할 수 있나 봄! 음하하! 내가 바로 변신 토끼 님이시다!]

잔뜩 신나 버린 토끼의 손에서 종말의 서는 절망했다.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아, 안 돼!ㅇㅍㅇ 이래선 내가 열심히 모은 죽음의 기록들이!]

이래서는 안 됐다!

이건 반칙이었다!

아니, 오류였다!

[이 망할 오류종자! 네놈이구나! 설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느냐!ㅇㅍㅇ]

그동안 쌓인 게 많은지 이번에도 괜히 정다운을 탓하는 종말의 서를 보며, 에르테아는 미소 지으며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요. 저는 그동안 당신이 열심히 모은 참가자들의 죽음을 제가 다 떠안고 대신 죽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언젠가 다시 부활하는 날…….”

그동안 던전 게임에서 죽었던 모든 참가자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때는 모두가 다 같이 부활할 수 있기를.”

종말의 서는 절규했다.

[으아아아……!^0^ 낙서하지 말라고 했다!!]

[히힛.]

그리고 이날. 

에르테아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기리며, 정다운은 비로소 자신의 업적을 완성시켰다.

[최초 업적 달성!]

“그림자 비술의 완성!”

그림자 비술을 연구한 이들조차 미처 이루지 못했던 그림자 비술의 원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림자의 기록이 <종말의 서>가 일으킨 오류를 일부 수정합니다.

- 보상 : 당신의 모든 업적들이 <생명의 서>와 <종말의 서>에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구히 기록됩니다!

*   *   *

“이제 우리도 슬슬 돌아갈까?”

[그럽시당.]

에르테아가 죽고, 정다운과 토끼는 은린어들을 타고 마녀의 집으로 향했다.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림자 결계가 펼쳐진 마녀의 집을 통과해야 했다.

[잠깐만요. 그 전에 어디 좀 잠깐 들를래요?]

“어디를?”

[하룬이요.]

토끼의 말에 마녀의 집에 가는 도중에 하룬의 유적지가 있는 곳을 들렀다.

“하룬에는 왜?”

[잠깐 인사 좀 하려고요.]

은린어들을 타고 바분 황제의 무덤 앞에 내려선 정다운과 토끼.

이곳은 이미 지반이 무너지며 터져 나온 지하수로 인해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었다.

“잘도 이런 호수 밑에서 그림자 결계를 새겨 넣었네.”

[그러니까요. 마침 ‘루가루 일족’에게 물의 정령 세이렌을 부려 먹는 권능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그거 아니었으면 물 다 빼고 작업했어야 했을 듯?]

고고한 야수들의 왕.

난폭한 숲의 지배자.

누구보다도 지혜로우며 흉포했던 숲의 귀족 루가루 일족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라면 족히 책 몇 권은 나올 것이다.

달빛을 닮은 풍성한 은빛 갈기.

냉혹한 사냥꾼의 지성과 들끓는 맹수의 야성을 동시에 품은 눈빛.

하지만 그들에 대해 한 단어로 설명하라면 이것이면 충분했다.

늑대인간.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 땅을 수호하는 에르테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생명의 사도이기도 했다.

물의 정령들을 부려 호수에 잠긴 유적지에 그림자 결계를 새기는 일을 한 것도 전부 루가루 일족들이 해낸 업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하룬에 돌아와 보니 그들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조용하네? 에르테아가 죽으면서 다들 죽었나 본데?”

[그러게요.]

에르테아는 자신이 죽으면서 모든 생명의 사도들도 다 같이 잠들게 했다.

나중에 다 같이 부활하기 위해서.

그런데 단 한 마리.

아직 너무 어리고 약한 탓에, 물의 정령을 부릴 힘조차 없어서 공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루가루 일족의 하룻강아지 한 마리가 아직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아르르! 왈왈! 캬르릉!

[아, 찾았다. 저기 있네요!]

태어날 때부터 너무 약골로 태어난 아이라서, 루가루 일족은 차마 이 아이를 에르테아의 사도로 삼지도 못했다.

이런 약골이 생명의 사도가 된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기에.

[루갈! 잘 지냈어요?]

“아르르, 왈왈!”

[뭐임? 아직도 말 못 함?]

‘어린 루갈’이 토끼를 향해 사납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꽁무니에선 짧은 꼬리가 본능적으로 살랑거렸다.

토끼는 종말의 서를 지퍼에 넣고 바로 흑토끼로 변신했다.

그리고 늘씬해진 두 팔로 자그마한 루갈을 안아 들며 낄낄댔다.

“히히. 언제 클 거임? 난 이렇게 컸는데.”

“캬르륵!”

토끼에게 안긴 루갈이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는 폭신폭신한 루갈의 은빛 털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내가 미래로 돌아가고 나면, 님이 내 말을 어디까지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음?”

“캬릉?”

“나중에 ‘내’가 깨어나면 잘 좀 챙겨 줘요.”

“……?”

토끼의 영문 모를 부탁에 루갈이 품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끼는 자신이 머물렀던 토끼 인형의 껍데기를 스테이지-1에 버려두고 왔다.

한때 생명의 서와 종말의 서를 담고 있었던 그 특별한 인형은, 언젠가 또 던전 게임의 도우미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꼭 좀 기억해 주셈.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과거로 올 수 있을 때까지 하룬을 좀 지켜 줘요.”

하룬을 지켜 달라.

그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루갈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이곳은 일족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묘지나 다름없었기에, 루갈은 영혼을 담아 토끼에게 대답했다. 

“멍!”

“아, 그리고 말 좀 얼른 배우셈. 지금 알겠다고 대답한 거 맞죠?”

토끼는 낄낄대며 루갈을 내려 주었다.

바닥에 내려와서도 루갈이 계속 진지한 눈빛을 하고 토끼를 향해 왈왈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제 돌아갈까?”

“그래요.”

정다운과 흑토끼는 다시 은린어 한 마리를 불러 나란히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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