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36화>
* * *
그리고 현재.
마녀의 집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알파가 갑자기 정다운을 불렀다.
<이건…… 정말 놀랍군요.>
“뭐가 놀라워?”
<저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도? 뭔 기억인데?”
바하무트의 기억을 쫓아 이곳까지 온 정다운이 알파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알파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오래전, 저는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갑자기? 전에는 그런 말 없었잖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여기 마녀의 집은 그동안 망령석을 만들기 위해 뻔질나게 들락거린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다니?
<애초에 제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오래전, 저를 비롯해 모든 생명의 용의 사도들은 기억의 일부를 스스로 봉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억을 봉인했다고? 왜?”
<타인의 기억에 사로잡혀 자멸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에르테아 님께 온전한 충성을 바치기 위해 불필요한 기억들을 버린 겁니다.>
알파의 말에 바하무트가 반가운 내색을 했다.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이유는 다르지만, 한때 제가 섬기던 전 주인님들도 항상 예전 기억들을 지우고 싶어 하셨나이다.]
<당연한 일입니다. 마녀들도 저와 같은 에르테아 님의 도플갱어였으니, 스스로의 인격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녀들이 에르테아의 도플갱어였다고?”
깜짝 놀라는 정다운.
알파는 그에게 마녀들에 대한 진실들을 요약해서 전해 주었다.
“마녀들이 생명의 용의 도플갱어들이었다고? 이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야 말해 줘?”
<이 또한 봉인해 둔 기억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녀들이 다 죽은 마당에, 그런 케케묵은 기억들은 에르테아 님의 부활과는 아무 상관없는 불쾌한 기억일 뿐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말해 주는 건데?”
<그것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파는 대꾸를 하면서도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스스로 생명을 얻은 듯 제멋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토끼 님이 죽어 가는 저에게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기억들은 마치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했다.
* * *
[알파 님! 죽더라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셈!]
“큭. 그게 죽어 가는 사람한테 할 소리입니까…….”
과거.
알파는 마녀들의 공격에 당해 피를 뿌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에르테아를 노리는 마녀들의 총공격은 매서웠다.
가장 선두에서 에르테아를 지키며 싸우던 알파는 결국 마녀들의 도살자의 칼에 당해 급속도로 생기를 빼앗겼다.
“만세! 내가 잡았어! 수명이 엄청나! 꺄악!?”
“좋은 건 나눠 써야지?”
푹!
“왜…… 나를……!”
알파의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고 좋아하던 마녀는 금방 다른 마녀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에르테아를 공격하던 다른 마녀들도 알파의 수명을 노리고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일지라도, 알파가 가진 막대한 수명을 눈앞에 두자 탐욕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 틈에 잠시 숨을 돌린 에르테아는 다급히 죽어 가는 알파를 향해 다가왔다.
“알파!”
그리고 이미 생명의 서(사본)를 남기고 새하얀 재가 되어 가는 알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르테아시여, 먼저 가는 저를 부디 용서…….”
파스슥.
“안 돼! 내 허락 없이 죽지 마!”
번쩍!
에르테아는 알파의 숨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알파에게 강력한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육체가 사라지고 생명의 서(사본)밖에 남지 않은 알파가 황금빛에 휘감기며 에르테아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얽히며 황금빛 문자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에, 에르테아 님?>
[오?]
알파의 익숙한 모습에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이건 무슨?>
알파는 자신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에르테아는 알파의 황금빛 문자를 보며 크게 기뻐했다.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죽을 뻔했어!”
<아니, 그냥 죽어도 됩니다만.>
“안 돼! 나는 아직 네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어! 너도 도플갱어니까 죽는 게 싫잖아!”
<말씀은 감사한데, 이런 모습으로 살아 봤자 딱히…….>
정작 알파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육체가 죽어 사라지는 바람에 생명의 서(사본)만 남은 채로 어정쩡하게 부활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생명의 서(사본)조차 급속도로 기록과 권능을 잃어 가는 중이었기에, 지난 일들에 대한 기억들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토끼가 반가워하며 알파에게 인사했다.
[와우! 이제야 내가 아는 알파 님 같네요! 다시 살아난 거 축하축하요!]
<놀리지 마십시오. 저는 엄밀히 따지면 다시 살아난 게 아닙니다. 알파라는 존재의 잔재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재구성한 전혀 다른 자아입니다.>
[복잡한 소리 그만하고, 내가 말한 거나 잘 기억하고 있으셈!]
<……그림자 결계 말입니까.>
다행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토끼는 알파에게 안경 낀 마녀에게 빼앗은 ‘그림자 결계’의 마법서를 보여 줬다.
[네. 이 마법 대충 훑어봤더니, 그림자 비술과 한 쌍이더라고요. 난 인형이라 마법을 배우지 못하니까, 알파 님이 이 마법을 꼭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 인간에게 가르쳐 주셈!]
<누구한테 말입니까?>
[음? 그건 나도 모르죠? 에헤헤.]
<…….>
토끼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항상 뭔가를 바라고 있는데 그게 뭔지 본인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이 그림자 마법은 그 반대 속성의 정점인 에르테아 님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라고요. 인간이었을 때는 몰라도요. 그러니까 그 인간이 직접 배워서 써야 해요.]
혼돈의 존재인 인간은 워낙 천차만별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서 모든 속성의 마법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다 문득 토끼가 이마를 탁 치고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바하무트 님! 님은 어둠의 마법사니까 이 마법 쓸 수 있지 않음?]
여전히 꽁꽁 묶인 채 제압되어 있던 바하무트는 갑자기 토끼가 자신을 향해 그림자 결계 마법서를 들이밀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큭! 치우거라! 감히 나 따위가 주인님들의 마법을 보는 것은 크나큰 불경이다!]
[에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보셈, 보셈. 일단 보고 말하셈.]
[크윽. 분하다! 봐 버렸구나! 눈꺼풀이 없는 해골이라 눈을 감을 수 없다니 원통하도다!]
바하무트의 두개골 앞에 활짝 펼쳐진 마법서의 내용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토끼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쓸 수 있겠음?]
[쓰, 쓸 수는 있을 것 같다만. 그건 왜 묻는가.]
[그럼 쓰셈. 당장.]
[싫다! 내가 어떻게 감히 주인님들의 마법을 함부로……!]
상상만으로도 불경스럽다며 펄쩍 뛰는 바하무트의 귀에 대고 토끼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아니면 님들 다 죽어요. 저거 보라고요. 지금 에르테아 님이 폭주하는 거 안 보이심?]
[……!]
콰콰아앙!
토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자신의 첫 사도를 잃을 뻔한 에르테아는 크게 분노해 마녀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처음엔 자신에게서 태어난 도플갱어들을 가엾이 여겨 직접 거둬 가려 왔지만, 이들이 종말의 용을 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타협은 불가능했다.
“이만 사라지렴. 내 과거의 망령들아.”
“정말 멋대로네! 우리가 왜 사라져야 해!”
“네 멋대로 우리를 태어나게 했으니, 우리를 위해 네가 죽으면 되잖아!”
콰쾅, 쾅!
전투는 치열했다.
애초에 여기가 넓은 지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전투가 아니었다.
에르테아가 거대한 몸으로 마녀들을 밟아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선 철저히 마법으로 마녀들을 상대해야 했다.
에르테아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마녀들의 마법을 파쇄하며 착실하게 마녀들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옆에서 알파의 황금빛 문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생명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면서 싸우셔야 합니다! 마법을 쓰실수록 아까운 생명 에너지만 축나고 있습니다!]
평소에 아끼고 아껴 왔던 생명 에너지가 오늘 하루 만에 미친 듯이 소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한 구석에서는 토끼와 바하무트가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다.
[자, 봤죠? 더 시간 끌면 님 주인님들 다 죽을 텐데 어쩔 거임? 님이 충성스런 하인이라면 이 상황에서 뭐라도 거들어야 하는 거 아님?]
[큭. 진짜 이 마법을 사용하면 주인님들께 도움이 되는 것이 확실한가? 애초에 난 이 마법이 어떤 효과인지도 모른단 말이다. 설마 나를 속이는 건 아니겠지?]
[에이, 잘 생각해 보셈. 이건 애초에 마녀들의 마법이잖아요. 직접 쓰는 사람도 님인데 뭘 걱정함? 마법을 쓰는 순간 무조건 마녀들에게 이득이라고요.]
모든 게 사실이기에 바하무트는 결국 솔깃하고 말았다.
[흠. 듣고 보니 그렇긴 하군. 그런데 대체 네놈은 누구편인가? 생명의 용과 함께 왔으면서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려 하다니.]
바하무트가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토끼는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야 당연히 이기는 편 우리 편이죠.]
[……알겠다. 하지.]
바하무트는 결국 토끼의 말대로 그림자 결계 마법서의 주문을 본격적으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꽁꽁 묶여 있지만, 결계 마법 정도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림자 결계 각인!]
결국 바하무트에게서 마법이 실행되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토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됐다.]
번쩍!
그 순간 바하무트를 중심으로 흑백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뻗어나더니, 연구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 안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에르테아와 마녀들은 깜짝 놀라며 바하무트를 돌아봤다.
“이, 이건 뭐지!?”
“그림자 결계?”
“이건 아직 실험 단계의 마법일 텐데?”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토끼는 이 그림자 결계를 딱 한번 본적이 있었다.
바로 미래.
바분 황제의 무덤 위에서.
‘그 인간’을 과거로 불러들였던 하룬의 유적지, 그 표면에 각인되어 있던 마력 패턴이 마녀의 집에 새롭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알파 님! 바하무트 님! 지금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셈!]
토끼가 외쳤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미래의 누군가를 향해.
[바로 내가 여기에 있다고!]
그리고 그 순간.
번쩍!
그림자가 드리워진 연구실의 바닥에서 갑자기 그림자 하인이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저건 뭐…….”
정적.
순간 치열한 전쟁터였던 연구실에 소리 없는 긴장감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샤아아.
그림자 하인의 전신에 흑백의 물감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색깔이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토끼를 쳐다봤다.
“귀찮게 왜 자꾸 오라 가라야?”
[그 입꼬리나 내리고 말하셈.]
히죽.
토끼는 ‘그’를 마주보며 활짝 웃음 지었다.
그도 웃었다.
“되게 오랜만이다? 나 보고 싶었냐?”
[아뇨? 님 없으니까 세상 꿀잼이었는데요?]
아아, 미래에서 ‘정다운’이 소환되었다.
“아, 그리고.”
절그럭.
“혹시 몰라서 이번엔 얘도 데리고 왔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 사슬에 칭칭 감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나까지 왜!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