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35화>
* * *
과거.
마녀의 집에서는, 어둠의 리치 바하무트가 갑자기 쳐들어온 토끼 일당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특히 알파에게.
“꿇어라, 불길한 존재여. 어디 감히 어둠의 존재 따위가 생명의 용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가.”
[크하하! 침입자들 주제에 미친 소리를 하는 구……!]
척.
[……크으! 분하도다!]
정신차려 보니 바하무트는 알파에 의해 꽁꽁 묶인 채 에르테아 앞에 강제로 엎드려 있었다.
알파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에르테아의 첫 번째 사도이자, 그녀의 도플갱어였던 알파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서(사본)’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으니까.
바하무트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주인님들과 똑같이 생긴 알파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큭. 분하도다! 마녀님들의 배반자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너는 그만 말해라. 어둠의 리치 따위가 내뱉는 목소리가 에르테아 님께 들리는 것조차 불경이다.”
[그렇게까지!?]
바하무트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네놈들은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더냐!]
“없다.”
알파는 가차 없이 바하무트의 말을 묵살하고 그의 엉덩이를 뻥 차며 말했다.
“그만 떠들고 당장 우리에게 마녀들이 있는 곳을 안내해라.”
[웃기지 마라! 내가 왜!]
“아니면 여기를 전부 불태울 것이다. 네 주인들이 불타 죽는 꼴을 보고 싶은가?”
[……안내하겠다.]
애초에 마녀들의 하인에 불과한 바하무트에게는 전직 마녀인 알파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온 생명의 용 에르테아는 아직 나서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생명의 용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격’에 바하무트는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결국 바하무트는 미로처럼 된 마녀의 집 복도를 앞장서서 걸으며 마녀들이 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곳을 발견한 거지? 이곳은 생명의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결계로 철저히 감춰져 있을 텐데?]
그 말에 토끼의 품에 안겨 있던 에르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엄청 애먹었어. 심지어 내 눈을 가리기 위해 태양석과 대치되는 월석으로 결계석을 짰을 줄이야. 아마 토끼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평생 찾지 못했을 거야.”
[에헴.]
토끼가 한껏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코를 치켜들었다.
자고로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생명의 용이 빛이라면, 마녀의 집은 철저히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곳이었다.
결코 빛이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토끼가 조언하기 전까지는.
[후후. 나도 물론 처음엔 마녀의 집이 설마 이런 식으로 쓰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하지만 내가 누규? 바로 천재 토끼 님이시지! 냐하핫!]
신나서 쫑알거리는 토끼의 모습에 바하무트가 어리둥절하며 알파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시끄럽게 구는 저 인형은 대체 뭐냐.]
“알 것 없다.”
[……진짜 가차 없군.]
알파는 용건이 없으면 불길한 존재와 말도 섞기 싫었다.
[이 계단만 내려가면 연구실이다. 마녀님들이 모여서 마법을 연구하시는 곳이지.]
[오호? 금단의 마법을요?]
토끼의 말을 바하무트가 비웃었다.
[금단? 이미 망해 버린 세상에서 그딴 게 뭐가 중요한가.]
“그 말은 맞아. 그리고 내 도플갱어들이 금기를 어겼다면, 그 또한 결국 내 잘못인걸.”
에르테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재촉했다.
“자, 이제 내려가자. 아마 모두가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흠칫.
바하무트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쳐다봤다.
[알고 있었나? 대체 언제부터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눈치챘단다. 이곳 전체가 종말의 용을 위한 제단이라는 사실을.”
“헉! 종말의 용!?”
그녀의 말에 알파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경계했다.
“제단에 제물이 들어왔는데, 제사장들이 눈치 못 챌 리 없지. 설마 내 도플갱어들이 종말의 용의 사도가 되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에르테아는 줄곧 표정이 어두웠다.
반면에 토끼는 ‘마녀의 집’이 제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던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즉, 마녀의 집 전체가 제단인 셈.
그래서 참가자들은 이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실 제단에 바쳐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던전 게임이 시작되지 않은 이때, 벌써부터 종말의 용을 위한 제단이 되어 있을 거라고는 토끼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그 말 진짜임? 왜 마녀들이 종말의 용의 사도가 되려고 하겠어요?]
“그렇습니다. 쉽게 믿기 힘든 말씀입니다. 지금이야 흩어졌지만, 한때 그들은 모두 힘을 합쳐서 종말의 용과 맞서 싸웠던 존재들입니다.”
“……그 이유는 직접 물어보기로 하자.”
에르테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계단 너머를 직시했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 잠시 복도를 걷자, 그 끝에 거대한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에르테아의 말대로 그녀를 닮은 도플갱어들이 한곳에 모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소란스러웠다.
“야! 오늘 고양이 밥 당번 누구야? 얘가 배고프다잖아!”
“뭘 또 찾고 그래? 애가 울면 네가 좀 주면 되지!”
“그런 말을 하는 거 보니까 네가 당번이었구나!”
“아닌데? 아닌데? 얼굴 헷갈린 거 아냐?”
“어차피 똑같이 생겼잖아! 빨리 밥 줘! 애가 운다고!”
“다들 시끄러! 손님 왔잖아!”
“앗? 벌써 도착했네? 아직 찻물 덜 끓었는데!”
“꺅! 반가워요! 오랜만!”
“야호! 진짜 생명의 용이야! 나 직접 보는 거 처음임!”
……?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게 연구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무, 무슨?”
그 모습에 에르테아와 알파, 토끼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도플갱어들의 모습은 모두 에르테아의 인간일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건 얼굴뿐, 표정이나 말투는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도플갱어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학구적인 표정으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고.
어떤 도플갱어는 거울 앞에서 하얀 로브를 펄럭이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검은 로브를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검은 고양이와 쎄쎄쎄를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도플갱어들은 에르테아에게 겉모습과 기억만 이어받았을 뿐, 성격과 자아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지성체들이었다.
토끼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헤에, 사이코패스들치고는 많이 발랄하네요. 아니, 태어난 지 몇 년 안 된 꼬맹이들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게 정상인가?]
그 말에 알파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도플갱어들은 나이를 따질 때 알에서 깨어난 때를 기준으로 잡지 않고, 본체의 나이를 기준으로 셉니다.”
[굳이 왜요? 나이에서 꿀릴까 봐요?]
둘이 또 투덕거리려는데, 그들의 앞으로 사뭇 진지한 표정의 도플갱어가 대표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생명의 용 에르테아시여. 만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무튼 환영합니다. 제가 마녀들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너희들 진짜…….”
에르테아는 참담한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도플갱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미 눈치채셨듯이 저희는 모두 종말의 용을 섬기고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거지?”
알파가 차갑게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에도 도플갱어들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저희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루살이에 불과한 저희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녀의 대답에 에르테아는 울컥 화를 냈다.
“살고 싶었다면 나에게 왔으면 됐잖아? 내 사도가 되면 내가 생명 에너지를……!”
“어차피 당신도 죽어 가지 않습니까.”
“…….”
우뚝.
그 말은 에르테아의 심장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할 말을 잃은 에르테아를 향해 도플갱어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완전히 망한 거죠.”
“이런 망해 버린 세계에서 생명의 용인 당신이 힘을 회복할 방법은 없어요. 그저 천천히 죽어 갈 뿐.”
“…….”
사실이었다.
에르테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요즘엔 심지어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들을 리셋해 주더라고요? 그때마다 생명 에너지가 계속 소모될 텐데, 보충할 방법은 없잖아요.”
사실이었다.
“리셋된 땅에서 수확한 제물을 바쳐 봤자, 크게 보면 이 세계에 남은 생명 에너지의 총량은 점점 소모될 뿐. 결국 그 에너지가 바닥나는 순간 종말은 예정된 일이에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일수록 종말의 용은 오히려 힘을 얻겠죠. 그런 존재니까요.”
전부…… 사실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생명의 사도가 될 바에는 차라리 종말의 사도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들의 본체이신 분께는 조금 죄송한 일이지만.”
도플갱어들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에르테아를 쳐다봤다.
[미안하긴 하지만 후회는 없다는 표정이네요.]
토끼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박수를 짝짝 쳤다.
[오케이. 좋아요. 님들의 의견은 잘 들었음. 아무튼 그래서 요즘 종말의 사도 복지는 좀 어때요? 먹고살 만함?]
토끼는 먼 훗날에 종말의 사도, 아니 도우미가 될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곳은 마치 훗날 대기업이 될 예정인 회사의 아담했던 초창기 시절을 보는 기분이었다.
토끼의 질문에 도플갱어들은 일제히 품속에서 식칼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오? 그 식칼 설마?]
토끼가 눈을 반짝였다.
“현재 종말의 용은 저희들에게 생명 에너지를 줄 여력이 안 됩니다. 하지만 대신 스스로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려 줬습니다.”
그들이 꺼낸 식칼은 바로 ‘도살자의 칼’이었다.
“우리가 이 칼로 다른 도플갱어들을 죽이면 서로의 수명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생명의 서로 메이플들을 만들어 내고, 메이플들이 새로 낳은 알에서 태어난 도플갱어들을 찾아내서 사냥합니다.”
[창조 경제네요.]
토끼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도플갱어들은 서로에게 동족의식이나 의리는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 목표인 그들은 그렇게 동족을 죽일 때마다 하루치의 수명을 늘려 왔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메이플들이나 새로 태어난 도플갱어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그건 별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당장 우리부터 살아야 하니까요. 누구나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법 아니겠어요?”
“그래도 우리끼리는 서로 죽이지 않아요. 당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서, 생명의 서를 가진 도플갱어들은 더 늘릴 방법이 없거든요.”
“거짓말.”
그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르테아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너희끼리는 죽이지 않았다고? 그럼 너희 뒤에 있는 책들은 뭔데?”
“…….”
날카로운 지적에 이번엔 도플갱어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주인을 잃은 ‘생명의 서(사본)’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이곳은 무덤이에요.”
동그란 안경을 쓴 도플갱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에르테아의 도플갱어들 모두가 종말의 용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수많은 논쟁 끝에 결국 우리가 이겼어요.”
“그리고 논쟁에서 진 쪽은 우리에게 모든 힘을 뺏기고 책이 되어 책장에 꽂혔죠.”
“…….”
처음부터 줄곧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던 도플갱어들이 더 이상 순수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히도 순수했다.
순수악.
“뭐 어때요?”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던 에르테아의 도플갱어들은.
“어차피 우리는 마녀잖아요.”
이제는 스스로를 ‘마녀’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신 김에…….”
오싹!
그 순간 갑자기 에르테아를 둘러싼 마녀들에게서 순수하고 농밀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우리들에게 수명 좀 적선해 주고 죽지 않을래요?”
“뭐 어때요? 어차피 조만간 죽을 텐데.”
“마침 이곳은 종말의 용을 위한 제단이거든요. 이 안에서 당신이 죽어 준다면 종말의 용이 무척 기뻐해 주겠죠?”
[아따! 언제까지 지루하게 수다만 떨 거임?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싸워? 싸울 거면 후딱 싸웁시다!]
그들의 말에 토끼가 불쑥 끼어들었다.
토끼는 살벌한 기세로 에르테아를 호위하고 있는 알파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알파 님! 싸우더라도 저기 제일 똑똑해 보이는 안경 쓴 마녀 님 한 명은 살려 두셈.]
“이유가 뭡니까.”
[아까부터 노트에 끄적거리는 연구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요.]
그 말에 안경 쓴 마녀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노트를 뒤로 숨겼다.
토끼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거기 안경쟁이 님. 이따가 싸움 끝나면 그 마법 좀 나 가르쳐 주면 안 됨?]
“이걸 왜…….”
그 맨 위에는 ‘그림자 결계’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그녀는 이 마녀의 집에 그림자 결계를 펼쳤던 도플갱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