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32화>
* * *
종말의 용이 사라진 이후.
세계는 하루하루 멸망해 갔다.
땅이 찢기고 바다가 말랐으며, 온갖 천재지변과 이상 기후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인구는 급속도로 줄어 갔다.
이 저주받은 땅에선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지 않았으며, 농사를 지어도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생명의 용 에르테아를 섬겼다.
그녀를 위한 신전을 짓고 제단에 제물을 바치며 끝없이 기도했다.
살려 달라고.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그들의 소망에 에르테아는 기꺼이 응답했다.
자신의 신전을 중심으로 일정 지역에 죽어 가던 식생들과 동물들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준 것이다.
“리셋.”
파아앗!
그러자 더 이상 열매가 맺히지 않던 나무에 열매가 맺혔고, 말라 버린 땅에 풀이 돋아났다.
죽은 동물들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한 기적이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지 않으니, 시간을 되감아서 일정 지역을 생명이 있던 시절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아아! 역시 생명의 용이시다!”
“감사합니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시여!”
그녀의 은총에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식량들을 수확했다.
그 모습은 마치 던전의 기원을 보는 것 같아서, 토끼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설마…… 내가 알던 던전들과 유적지들이 원래는 전부 에르테아 님을 위한 신전이었을 줄이야.]
토끼는 틈만 나면 혼자 끙끙댔다.
[에효.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과거가 바뀌어서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랬었는지 통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 토끼를 에르테아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토끼야,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중요한 건 ‘아저씨’가 나를 구해 줬다는 거야.”
[그리고 우린 ‘어떻게’ 구해 줬는지 통 기억이 안 나죠.]
“그래. 하지만 그분께 고마운 마음만큼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있어. 그러면 된 거야. 그러니까 우린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자. 아니, 살아남자.”
[……님은 진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네요. 그리고 그렇게 좀 웃지 마셈. 용 얼굴로 아련하게 웃으면 굶주린 괴물 같다고요.]
“…….”
에르테아는 조금 상처받았다.
그 표정이 또 무서워 보인 토끼는 괜히 말을 돌렸다.
[흠흠. 근데 ‘리셋’은 금기 아님? 이렇게 자주 써도 되는 거였어요?]
“응, 괜찮아. 내가 쓰는 권능은 금기를 어기는 게 아니라 살짝 비트는 수준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격이 많이 떨어진 덕분이랄까.”
종말의 용이 바분 황제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려 그를 살려 냈던 금단의 마법은 생명의 서에도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격이 극도로 떨어져 있는 생명의 서는 그 기록을 온전한 형태로 사용할 수 없었다.
“내가 쓰는 ‘리셋’은 생명 에너지를 원료 삼아, 일정 지역을 예전 모습대로 다시 만들어 내는 수준에 불과해. 이것도 물론 시간을 되감는 느낌이긴 한데, 조금 애매한 수준이지.”
[불법이 아니라 위법이라는 말이네요. 효율도 더럽게 안 좋고요.]
토끼가 혀를 찼다.
결국 이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생명 에너지를 계속 재활용해서 근근이 먹고 사는 느낌이었다.
[이건 어째 남은 식량을 최대한 아껴 먹으며 야금야금 죽어 가는 느낌이라고요. 무슨 수를 내긴 해야 함.]
“그러게. 그래서 계속 연구하고 있잖아.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절대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게 바로 아저씨가 나에게 남겨 준 교훈이니까.”
에르테아는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즐겁게 웃고 떠들며 살아날 방법을 찾아냈던 ‘그’가 남기고 떠난 궁극적인 희망의…….
토끼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 미화 오지네요. 그런데 그 인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인데, 이러니까 꼭 죽은 사람 같지 않아요? 알파 님?]
“뭡니까. 용건 없이 쳐다보지 마십시오.”
[…….]
토끼가 자신을 쳐다보자, 알파는 단호하게 토끼의 관심을 거절했다.
저 토끼 인형은 참 이상한 존재였다.
인형이 말도 하고 날아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만 보면 자꾸 친한 척을 하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게다가 에르테아 님의 정식 사도도 아니면서 항상 곁에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무척 수상한 존재. 멍청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서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
[님, 지금 실수로 생각을 말로 한 것 같은데요.]
“실수가 아닙니다만.”
[……아하?]
에르테아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둘은 도통 친해질 조짐이 안 보이는 구나.”
“죄송합니다, 에르테아 님.”
알파는 토끼를 철저히 무시한 채 에르테아에게 이번 사냥의 성과를 보고했다.
“이번에도 마녀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대부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흔적을 찾았으니, 제가 반드시 찾아내어 말살하겠습니다.”
[워워. 살살 하셈. 같은 얼굴들끼리 좀 친하게 지내야죠.]
“…….”
토끼가 또 깔짝대며 알파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알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종말의 용과의 전투 이후, 이 세계 곳곳에는 이상한 존재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새하얀 백발.
무표정한 얼굴.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들.
사람들은 그 존재들을 ‘마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종말의 용과의 전투 중에 태어난 하루살이들이었다.
숲의 종족들과 에르테아에게서 태어난 도플갱어들.
그들은 숙주의 모든 기억과 능력을 이어받았으나, 인격과 자아는 이어받지 못한 완전히 별개의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인격’이라는 건 인간에게나 해당되는 표현이었기에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태어난 도플갱어들은 종말의 용과의 전투에 참전해 큰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전투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 문득 자신들의 수명이 겨우 하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살인.
정확히 말하면, 메이플의 알이 붙어 있는 인간을 찾아 죽이는 것만이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면 하루의 수명이 늘어난다.’
‘누구에게 메이플의 알이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닥치는 대로 죽여야겠군.’
‘그럼 일단 약한 인간부터 죽이는 것이 효율적이려나.’
그렇게 도플갱어들은 숲의 종족과 에르테아의 모습을 한 채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멸망한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리 없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쯧쯧. 솔리아 님도 아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임. 종말을 막기 위해 도플갱어들을 만들어냈더니, 오히려 그 악마들로 인해 이 세상 전체가 무간도로 변해 버릴 줄이야.]
토끼가 혀를 차며 알파를 쳐다보자, 같은 ‘마녀’ 출신이었던 알파의 얼굴에 살짝 욱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도플갱어들은 악마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살기 위해 가축을 잡아먹듯, 도플갱어들도 살기 위해 인간을 죽일 뿐입니다.”
도플갱어들은 인간이 아니라 하루살이일 뿐이었다.
애초에 같은 종족이 아니었기에 인간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그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에 불과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알파 또한 지난 몇 년 간은 마찬가지였다.
알파는 말했다.
“저 또한 마녀로 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없습니다. 어차피 살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살인을 일삼는 건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알파는 분연히 일어나 에르테아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르테아 님께 제 자신을 의탁하기만 하면 수명이 해결된다는 사실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굳이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파는 자신이 에르테아의 사도라는 사실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도플갱어의 수명은 용의 사도가 되는 순간 무한대로 변한다.
에르테아가 생명 에너지를 나눠 주는 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엔 에르테아도, 도플갱어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년이나 흐른 지금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사도가 되기를 거부하는 마녀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살인에 취해 사는 미치광이들일 뿐.”
[동족 혐오 쩌네요. 마녀 출신이라 마녀 겁나 싫어하시네.]
“그러니까 다시는…….”
흠칫.
습관적으로 깐족대던 토끼는 자신을 노려보는 알파의 눈빛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를 마녀라 부르지 마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넵. 그럼 혹시 앞으론 알파 선녀님이라 부를…….]
“쓰읍.”
[넵.]
토끼는 냉큼 대답하고 에르테아의 뒤로 숨어 버렸다.
에르테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되돌렸다.
“알파, 그래서 이번에 찾았다는 흔적은 뭐였니?”
“네.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마녀들은 땅속에 은신처를 만들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토끼가 불쑥 튀어나와 생색을 냈다.
[와, 치사하게 혼자 깨달음 얻은 것처럼 말씀하시네? 내가 전부터 계속 땅속을 찾아보라고 말했잖아요! 분명 땅속 어딘가에 ‘마녀의 집’이 있을 거라고요!]
“……저 토끼의 조언대로였습니다. 이건 인정하겠습니다.”
[에헴. 그래야지.]
알파도 이번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의 조언을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하니 마녀들이 땅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키메라 엔트들을 풀어 무기와 마법 시약의 재료들을 수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도 이미 내가 다 말해 준 대로고요.]
“그래서 위치는 파악했니?”
에르테아의 질문에 알파는 고개를 숙였다.
“찾았습니다. 분부만 내려 주시면 제가 모든 사도들을 이끌고…….”
“아니, 이번엔 나도 갈 거야.”
알파의 말을 자르며 에르테아가 몸을 일으키고 황금빛 날개를 펼쳤다.
그녀의 행동에 알파도 토끼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직접 가게요?]
“응. 내가 직접 보고 싶어.”
에르테아는 궁금했다.
“아니, 봐야겠어. 내 기억을 이어받은 아이들이 어째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지.”
[흠. 그걸 봐야 아시나. 난 이미 알 것 같은데.]
토끼는 어깨를 으쓱하며 에르테아를 따라나섰다.
[사람을 죽이는 이유야 뻔하잖아요. 도플갱어들 절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비난당하던 에르테아 님의 기억을 이어받았을 텐데, 정작 인격은 제각각. 그럼 파국 아님?]
그 말에 알파도 긍정했다.
“저도 그 기억만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억의 일부를 스스로 봉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타인의 기억에 사로잡혀 자멸하지 않기 위해.”
[호오? 님들도 나름 열심히 사는 인생…….]
“쓰읍.”
[넵.]
그들은 순식간에 마녀의 집이 숨겨진 지역에 도착했다.
휘오오.
천재지변으로 인해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설산 위에서 토끼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 여기였구나. 항상 게이트 열고 돌아다니다 보니 막상 찾아오는 길은 몰랐거든요. 그렇다면, 이쯤에 분명!]
토끼는 잽싸게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법진이 새겨진 작은 석판을 찾아내고 우쭐거렸다.
[짠! 여기 키스톤 찾았지롱! 이것만 있으면 집 안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어요!]
“역시 우리 토끼는 모르는 게 없구나.”
[에헴. 내가 쫌 유능하죠.]
“그럼…… 들어갈까.”
파아앗!
에르테아가 단호한 눈빛을 짓자, 그녀의 거대한 몸이 빛에 휩싸이며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마녀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크기를 줄인 것이다.
그런데…… 너무 작아져 버렸다.
토끼는 자신보다 작아져 버린 에르테아를 품에 안으며 깔깔거렸다.
[우와, 너무 작아진 거 아님? 이렇게 귀여워서 싸울 수나 있겠음? 하지만 걱정 마셈! 누가 나타나도 이 토끼 님이 다 해결하겠다구!]
“토끼야, 난 싸우러 온 게 아니야. 회유하러 온 거지. 내 사도가 되어 달라고.”
미니 사이즈로 변한 생명의 용 에르테아가 토끼의 품에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척.
그때 알파가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서며 눈을 번뜩였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이 차가운 눈바람에 휘날렸다.
“에르테아 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가 되지 않겠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오로지 죽음뿐.”
[아앗. 알파 선녀님. 지금 쫌 멋진 언니 포스가…….]
“쓰읍.”
[넵.]
그들은 주저 없이 키스톤을 사용해 마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가 마주치고 말았다.
차가운 복도 끝에서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고 있던 어둠의 존재를.
[감히 누가 주인님의 처소를 침입하느냐!]
마녀들의 하인.
아이스 그렘린들의 왕.
리치 바하무트가 침입자들을 향해 사나운 기세를 뿜어냈다.
그를 보자마자 토끼는 웃었다.
[이제야 찾았네. 우리 눈사람.]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더없이 환한 미소를.
그리고 무기를 꼬나드는 알파에게 단호히 경고했다.
[알파 님, 저 리치는 절대 건드리지 마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아서 그 인간에게 내 말을 전해 줘야 하거든요.]
“무슨 말을 말입니까.”
[내가 여기 있다고.]
그래.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나를 찾아 달라고.
토끼는 바하무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