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30)화 (330/393)

<던전리셋 330화>

*   *   *

집에서 키우는 어항 앞에서 물고기 밥이 든 사료통을 집어 든 적 있는가.

뻐끔?

‘밥?’

뻐끔뻐끔!

‘밥? 밥!’

아무리 멍청한 물고기들이라도 사료통은 알아보는 법.

주인이 사료통만 들어도 일제히 수면 위로 올라와 입부터 뻐끔거리는 금붕어들처럼.

은린어들에겐 정다운의 정화 스킬이 바로 그 사료통과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화 스킬은 은린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맛집의 포장지였다.

‘정화 구체 = 맛있는 밥’

[공식이니까 외워 둡시당! 이히!]

꾸어어어어엉-!

퍼버버벅! 퍼벅! 퍽!

“아니, 무슨! 컥!”

그렇기에 지금 은린어들의 행동은 그저 눈앞에서 자꾸 도망치는 ‘밥’을 쫓아다니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자꾸 부딪히고 밟히는 건 알 바 아니었다.

“대체 이 물고기들은, 컥! 갑자기, 윽! 어디서, 억! 튀어나온 놈들이야! 커흑!?”

거대한 몸뚱이와 꼬리지느러미로 종말의 용을 줄줄이 후려치고 지나가는 몇 백 마리의 어깨깡패, 아니 어류깡패들.

그 모습은 마치 막 점심시간 종소리가 울려 퍼진 학교 복도를 연상케 했다.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아, 씨! 앞에 좀 비키라고!’

‘나! 밥! 먹을! 거라고!’

‘비켜, 이 자식아!’

꾸우엉!

[가랏! 은린어 몸통 박치기!]

“꾸엉! 꾸엉!”

퍼버벅! 퍽! 퍽!

어느새 토끼는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나타나서 은린어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다운은 그 뒤에서 무척 얄밉게도.

“자! 다시 유턴! 밥은 이쪽이지? 잡아야지? 못 잡았지? 여기 있지?”

정화 구체가 은린어들의 입에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해 가면서 종말의 용을 계속 몰아붙이고 있었다.

종말의 용은 억울하고 당황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대체 이 물고기들이 왜 나만 공격하는 거야!’

정다운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정화 스킬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종말의 용은 지금 자신의 주변을 계속 빙빙 돌고 있는 정화 구체의 존재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멍청한 물고기들이 갑자기 미쳐서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할 뿐.

하지만 이깟 멍청한 물고기들 따위는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큭! 지옥의 불이여! 타올라라! 내 앞을 막아서는 모든 어리석은 놈들에게! 뜨거운 파멸의 불꽃을!”

화르륵!

그의 입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져 나와 은린어들을 덮쳤다.

꾸엉! 꾸우엉!

불이 붙은 은린어들이 하나둘씩 잘 익은 생선구이로 변해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온 하늘에 생선 굽는 냄새가 퍼져 갔다.

고소하고 맛깔나고, 아무튼 입에 침부터 고이는 맛 좋은 냄새.

종말이 찾아온 세계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온 세상에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불태워도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젠장! 광역 마법을 썼는데도 겨우 몇 마리만 죽을 뿐이라니!’

은린어들의 덩치가 너무 큰 탓에 종말의 용의 화염은 가장 선두의 은린어들에게만 닿을 뿐이었다.

덕분에 그 거대한 몸뚱이 뒤에 가려진 후발대 은린어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종말의 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퍼어억!

“이 같잖은 물고기들이 감히!”

콰앙!

종말의 용이 분노의 기운을 담아 은린어들의 몸을 후려쳤다.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꾸억?

퍼펑!

“……!”

은린어들의 몸이 터지면서, 그 안에서 대량의 물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물풍선처럼.

그리고 그 물이 종말의 용을 덮쳤다.

촤아악!

“어풉!?”

난데없이 터져 나온 물폭탄에 날개가 쫄딱 젖어 버린 종말의 용은 하마터면 밑으로 추락할 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은 잡았지만,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은린어들을 쳐다봤다.

‘큭! 한 마리씩이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들인데!’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다니니까 그 스케일이 마치 숲의 수호신 퀘르쿠스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날아다니는 퀘르쿠스.

종말의 용은 흔들리는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젠장.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설마 이 세계가 아직 종말을 원치 않는 건가? 그래서 이상한 강제력을 발휘해 내 계획을 저지하려는 건가?’

물론 오해였다.

아니, 오류였다.

무릇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법.

생명의 용 에르테아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광경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종말의 용에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던 에르테아 입장에선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이었으나, 영문을 모르니 마냥 좋아하기도 애매했다.

“솔리아 님,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몰라. 나도 진짜 모르겠어…….]

솔리아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은린어들은 에르테아를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딱 한 놈, 종말의 용만 잡아 죽일 듯이 몰아붙이며 후려 팰 뿐이었다.

“설마…… 이것도 ‘아저씨’가 어딘가에서 도와주시는 걸까요?”

움찔.

[…….]

갑자기 에르테아의 입에서 정다운에 대한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자, 솔리아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에르테아가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저씨’는 대체 누구였을까요? 이상해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아저씨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이름조차도.”

……!

놀랍게도 에르테아는 더 이상 정다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누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 봐도 떠오르지 않아요. 그분이 누구였는지.”

그 말을 들은 정다운과 토끼는 대번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건 좀 서운한데?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생명의 용 되더니 바로 날 까먹냐?”

[그러니까요. 기억력이 거의 은둥이들 수준인 듯. 바보다, 바보.]

알파가 그들을 다독였다.

<상처받지 마십시오. 이건 당연한 순리입니다. 정다운 님 당신이 본래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단순한 원리였다.

정다운이 이 그림자 세계에서 배제되어 흑백 처리가 된 순간, 그에 대한 기록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얼굴도. 이름도.

그에 대한 모든 것들이.

<미래의 기록을 앞 페이지에 먼저 쓸 수 없듯, 이곳에서 당신은 아직 네임리스(Nameless, 이름 없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업적’이 남아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정다운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얼굴과 이름은 사라졌어도, 그가 남긴 ‘업적’들은 전부 창세의 기록에 남아 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류였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감히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분은…….”

에르테아는 그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와 함께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이미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 처음부터 친근하게 다가왔다.

‘딱 봐도 수상해 보였지. 그래서 처음엔 경계했어. 그런데…….’

그런데 그는 그 경계심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다가와서 순식간에 자신과 친해졌다.

그리고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척척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했어. 그분이 한 모든 일들이 놀랍고 신기했지. 그리고…… 즐거웠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다.

세세한 기억은 사라졌으나, 그때 느꼈던 놀라움과 즐거운 감정들만큼은 그 어느 것보다도 뚜렷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에르테아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빵과 야채를 다듬어 숲의 종족들에게 나눠 줬을 때의 즐거움.

‘정말 즐거웠지. 탑에서만 살다보니 그렇게 바쁘게 다 같이 일해 본 건 난생 처음이었어.’

그리고 맛있는 소스를 개발하겠다며 둘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맛을 보며 깔깔대던 즐거움.

‘정말 재밌었어.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것이 이토록 설레는 일인지 처음 알았지.’

그리고 은신처를 만들겠다며 엄청난 속도로 땅을 파는 모습을 구경하던 신기함.

‘그건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였어. 그 방법을 미리 알았더라면 무작정 멀리만 도망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땅속 깊이 숨었을 거야.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죽이겠다며 쫓아다니던 망할 친아버지, 바분 황제를 함정에 빠뜨려 된통 괴롭혀 주던 통쾌함!

‘그건 정말 짜릿했어. 미리 함정을 파 두고 적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을 지켜 주겠다던 이의 뒷모습에서 느껴졌던 듬직함.

이 사람이라면 절대 자신을 구하려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

그리고 자신을 들쳐 메고 도망치면서도 다양한 계획으로 적들을 계속 농락해 나가던 멋진 모습.

‘그때 아저씨 정말 멋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 알았다면 그때 말해 줄걸.’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도와주고는, 또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

‘아저씨’의 존재가 에르테아의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또르륵.

결국 에르테아의 눈에서 의미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금빛으로 아롱진 용의 눈물이 종말이 찾아온 세계에 떨어졌다.

“그분은 진짜 누구였을까요? 솔리아 님은 혹시 아세요?’

[……어차피 내가 말해 줘도 넌 금방 또 잊어버리고 말거야. ‘그’는 기록에 없는 존재니까.]

솔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끼가 뒤에서 투덜거렸다.

[흥. 거 되게 치사하네요. 계속 까먹더라도 옆에서 자꾸 말해 주면 되는 거 아님? 우리가 그동안 해 준 게 얼만데!]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해 주고 있었다.

“종말의 용을 물어뜯어라! 은둥이들아!”

파아앗!

정다운이 정화 구체를 종말의 용의 몸에 다닥다닥 붙였다.

그러자 그 순한 은둥이들이 그를 향해 득달같이 다가와, 거대한 주둥이를 쩍 벌렸다.

아그작!

“크악!”

정신없이 얻어맞다 보니 지칠 대로 지쳐 버린 종말의 용은 결국 은린어들의 이빨을 전부 피해 내지 못했다.

그 바람에 강인하던 그의 날개가 넝마처럼 찢겨지고 말았다.

그는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극도의 수치심으로 몸부림쳤다.

‘내가 왜 이런 하찮은 미물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나처럼 격이 높은 존재가 어째서!’

“큭! 내가 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왜!”

쾅!

종말의 용은 자신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은린어들의 몸을 찢어발기고, 그 등을 밟고 사력을 다해 뛰어올랐다.

저 위에 떠있는 세계수를 향해서.

그 모습에 솔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가 다시 세계수에게서 힘을 빨아들이면 다시 원점이야!]

“제가 막을게요!”

에르테아가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종말의 용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를 향해 계속 몰려드는 은린어들 때문에 다가서는 게 쉽지 않았다.

턱!

결국 종말의 용은 말라비틀어진 세계수를 간신히 움켜잡는 데 성공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끊겼던 생명 에너지가 다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크하하! 보아라! 세계수가 존재하는 이상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을 내가 다 흡수하고 나면, 이 세계는 진정한 파멸을……!”

그때였다.

갑자기 세계수가 크게 요동쳤다.

쩌적!

콰르릉!

“헉! 무슨?”

종말의 용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세계수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일이냔 말이다!”

그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창세의 기록에 새겨진 정다운의 업적 중에는 이런 터무니없는 기록도 있었음을.

“최초 업적 달성. 세계수를 베다.”

<최초 업적 달성!>

“세계수를 베다!”

혼자의 힘으로 세계수를 벌목했습니다!

당신의 소름끼치는 업적에 던전이 벌벌 떱니다.

- 보상 : 세계수의 가호

흑백 처리가 된 정다운과 토끼가 나란히 서서 종말의 용을 향해 씨익 미소 짓고 있었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음? 히히. 이건 우리 거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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