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29화>
* * *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록이었다.
정다운이 스테이지-1의 함정에 빠져 홀로 고립되었던 던전 초창기 시절.
땅굴의 지하수를 이용해 만들었던 그의 첫 작품, 사자 분수대 연못.
그걸 만들고 받았던 정다운의 업적 내용이 이번에 받은 보상으로 인해 ‘생명의 서’였던 빈 마법서 안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죽음과 파괴만이 가득하던 던전에서 그가 처음으로 이뤄 냈던 ‘창조의 기록’이었다.
“……당신이 만든 아름다운 연못에 물고기가 살게 됩니다.”
정다운의 입에서 결국 기록이 완전히 흘러나온 순간.
파아앗!
이 세계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종말이 찾아온 세계에 정다운이 일으킨 아주 작은 기적…….
밍기적.
그 순간 파괴만이 가득하던 세계에 작은 움직임이 피어났다.
그 움직임은 너무도 하찮고 작아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다운조차도.
“에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정다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찼다.
[그렇겠죠, 뭐. 님이 뭔 성녀도 아니고…… 으익?]
깜짝!
하지만 토끼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생명의 서를 품고 다니던 책가방으로서의 본능이었다.
[앗! 저기!]
토끼가 가리킨 곳은 바로 ‘바분 황제의 무덤’이 추락했던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는 정다운이 그림자 하인들을 시켜서 파 둔 곳이었는데, 그 밑에서 지하수가 샘솟고 있었다.
바분 황제의 무덤이 추락한 충격과 용들의 전쟁에 대지가 찢기면서 지반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자 그 거대한 구덩이 밑에서 점점 물이 고이며 물웅덩이가 되었다.
마치 ‘하룬의 호수’처럼.
즉 다시 말하면, 그곳은 ‘정다운이 만들어 낸 거대한 연못’이 되어 있었다.
조건이 충족되었다.
- 보상 : 당신이 만든 아름다운 연못에 물고기가 살게 됩니다.
밍기적.
꾸물꾸물.
토끼는 호수 위로 쌩 하고 날아가 정다운을 향해 소리쳤다.
[우와! 여기 좀 보셈! 호수 안에 쪼끄만 아기 물고기들이 돌아다녀요!]
“그래? 난 멀어서 안 보이는데?”
[눈 겁나 나쁘시네! 이래서 인간의 시력이란! 아무튼 겁나 신기함!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더니, 다 뻥이었나 봐요! 알파 님 뻥쟁이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한 템포 늦게 알파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진심으로 놀란 것이다.
<정다운 님의 업적들이 창세의 기록에 적히게 되었다곤 하나, 이런 일까지 가능할 줄이야. 하지만 그뿐입니다.>
그렇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대지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바다가 증발하고 있는 마당에, 물고기 몇 마리가 새로 태어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이 또한 사소한 오류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미 반쯤 망가졌고.
그리고 용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서로 공멸하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활을 꿈꾸며 던전을 통해 힘을 키우게 될 터.
<……그런데 뭐하십니까?>
팔락팔락!
알파가 뭐라 하든, 정다운과 토끼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히히! 이거 재밌네요? 또 뭐가 되는지 봅시당!]
“구경만 하느라 심심했는데 잘됐다!”
팔락팔락!
<…….>
그들은 엄청 신나 버렸다.
빈 마법서에는 사자상 연못 외에도 정다운의 업적들이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을 읽기만 하면 실제로 현실에 반영된다니! 엄청 끝내주자너!]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들을 계속 넘겨 봐도, 딱히 뭐…….
[음?]
“흠흠.”
책장을 넘기던 토끼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정다운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니, 뭐 이렇게 쓸데없는 기록만 가득해요? 알고는 있었지만, 님 진짜 인생 낭비 쩌시네!]
그렇다.
딱히 대단한 기록은 없었다.
[뭐? 된장찌개를 만들었습니다? 수박화채를 만들었습니다? 심연의 미역국? 얼씨구? 아주 요리사 납셨네요?]
“응, 여기 진짜 족발 세트 만들고 ‘던전의 요리사’라는 업적도…….”
[허이구? 자랑이다? 가문의 영광이시겠음.]
“너 지금 요리사 무시하냐? 전국의 요리사들에게 대국민 사과해!”
[눼이, 제가 아주 죽을죄를 지었음다! 어? 아주 내가 대역죄인이야, 내가. 전국에 계신 요리사님들 죄송합니다! 됐냐? 앙?]
“어흠흠.”
처음의 기대는 싹 사라지고 토끼의 표정은 짜게 식어 있었다.
정다운도 조금 머쓱했다.
대부분 자질구레한 업적들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책장을 넘길수록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좀 자질구레하면 어때? 이게 다 내가 지난날 열심히 살아온 소중한 흔적들이라고. 그래, 이를테면 일기장 같은 거지!”
정다운의 표정은 이미 추억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토끼의 표정은 더 짜게 식어 갔다.
[네, 축하해요. 남들은 이력서 준비하는 동안 일기장이나 써서 좋으시겠어요.]
“자, 이거 봐. 요리 말고도 이런 기록도 있네? ‘부유석 탄생’이라든가 ‘온돌을 만들었습니다’라든가.”
[그런 건 지금도 그냥 직접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창세의 힘으로 온돌 생기면 퍽이나 신기하겠네요.]
“그럼 이건 어때?”
[또 뭐요?]
그러다 정다운은 결국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의 성공 사례를 이어 갈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을.
“최초 업적 달성. 물고기 사육사.”
[최초 업적 달성!]
“물고기 사육사!”
연못에서 태어난 은린어들을 훌륭히 먹여 키워 냈습니다!
은린어들이 격이 올라 일제히 진화를 경험합니다!
- 보상 : 멍청한 은린어들이 밥 준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합니다.
“……멍청한 은린어들이 밥 준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합니다.”
그 순간,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번쩍!
은린어들이 격이 올라 일제히 진화를 경험합니다!
“꾸우엉-!”
하룬의 호수 안에서 작게 꼬물거리던 물고기들의 덩치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녀석들이 전부 하룬의 호수 밖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앗. 은둥이들이 또!]
“……야, 지금 쟤네들 왠지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냐?”
[어라라? 그, 그런 것 같은데요?]
말 그대로였다!
“꾸엉! 꾸엉!”
“꾸우엉-!”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하늘로 날아오른 은린어들이 일제히 정다운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보상 : 멍청한 은린어들이 밥 준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합니다.
정다운이 만든 연못에서 태어나, 정다운이 손수 먹여 키웠던 은린어들.
그 거대한 물고기들은 창세의 기록에 의해 다시 태어났기에, ‘태초부터 영원까지’ 밥 준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볼 수 있었다.
흑백 처리가 되어 이 세계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다운’의 존재를!
“꾸우엉!”
꾸엉, 꾸엉, 꾸엉!
밥을 달라! 밥을 달라!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정화된 뼈를 달라!
“아, 쫌! 줄게, 줄 테니까 주둥이로 밀지 좀 마! 이 멍청한 물고기들아! 아니, 근데! 얘네들 대체 어떻게 날 만질 수도 있는 거야!?”
콕콕! 콕콕! 콕콕!
그것은 진정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은린어들은 정다운의 존재를 단순히 알아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밥 달라고 들이대는 대형견들처럼 거대한 주둥이로 정다운의 몸을 이리저리 밀치는 것도 가능했다.
그 반대도 물론이고!
[우왓? 뭐임? 이거 진짜 뭐임!? 더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할 수 없다더니, 어떻게 님이 지금 은둥이들을 만질 수 있는 거냐고요! 은둥이들은 색깔이 있고, 우리는 여전히 흑백인데!]
토끼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신나는 경지를 넘어서 대흥분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알파는 머리가 멈췄다.
그때 정다운이 은린어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아하! 알겠다! 이런 거 아닐까? 가끔 키우는 개나 고양이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을 쳐다보면서 멍멍 짖을 때가 있잖아? 사람의 눈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지금 나처럼!”
<……궤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당.]
혼란스러워하는 알파의 반응에 토끼가 낄낄대며 정다운에게 말했다.
[히히. 님, 그런데 얘네한테 밥은 줄 수 있겠음? 님이 꺼내는 아이템들은 죄다 흑백이잖아요.]
“잠시만. 뭐가 되고 뭐가 안 되는지 확인해 보자고. 이러다 그냥 나를 잡아먹을 기세야.”
“꾸우엉!”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안 됐다.
정다운은 은린어들에게 아무것도 먹일 수 없었다.
그저 서로 알아보고 만질 수만 있는, 딱 거기까지의 관계였던 것이다.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놀라운 기적이긴 했다.
“어, 이건 좀 미안하네. 막 태어나서 엄청 배고플 텐데 밥을 줄 수가 없다니.”
<거 보십시오. 이 또한 결국 사소한 오류일 뿐입니다. 물고기 몇 마리가 날아다닌다고 역사가 바뀌진 않습니다.>
“알파 너는 대체 누구 편이야?”
<……죄송합니다.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말을 했을 뿐입니다.>
바로 사과하는 알파의 반응에 정다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알파야? 먼저 하나만 말해 둘게. 내 입장에선 이 세계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아. 알고 있던 모든 상식들이 파괴된 곳이라고. 그리고 또.”
<하나만 말씀하신다고…… 아니, 계속 하십시오.>
피식.
진짜 한결같은 녀석 아닌가.
정다운은 자신에게 우르르 몰려든 은린어들을 향해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리고 겨우 물고기 몇 마리가 아니야. 은둥이들 중에는 번식왕이 있거든.”
<그게 무슨……?>
정다운은 사자상 연못을 꾸준히 넓혀 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연못이 커지는 만큼, 은린어들의 숫자도 그 크기에 맞게 늘어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을 보라!
거대한 하룬의 호수를!
그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태어나 날아오르고 있는 막대한 양의 은린어들의 모습을!
꾸우어엉-!
거기서부터 번식왕 은둥이의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충 세어 봤는데, 족히 수백 마리는 되겠는데요?]
“그래, 이 정도 숫자라면 뭐가 됐든 할 수 있지 않겠어?”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손바닥을 하늘 위로 펼쳤다.
그리고 자신의 메인 스킬을 펼쳤다.
범위형이 아닌 방출형으로.
“정화! 정화! 정화! 정화!”
파앗! 파앗! 파앗! 파아앗!!
<……?>
[으잉?]
어리둥절한 행동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커다란 정화 구체 수십 개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손짓을 따라서 자유자재로 하늘 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꾸엉? 꾸엉? 꾸엉?
서로 짜기라도 한 걸까.
모든 은린어들의 고개가 동시에 정화 구체들의 궤적을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힘차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었다.
꾸우엉!
수백 마리의 은린어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정화 구체를 따라서 우르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앗! 쟤네들 정화 스킬도 기억하나 봐요!]
“그래, 왠지 이건 될 것 같더라고. 내가 정화 스킬 쓸 때마다 계속 지켜보던 놈들이니까.”
그렇다.
은린어들의 주식은 괴물의 뼈.
그중에서도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는 역시 정화 스킬이 듬뿍 발라진 뼈였다.
“즉, 이런 거지.”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손짓을 따라 정화 구체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러자 그 뒤를 줄줄이 따르는 수백 마리의 초거대 물고기들.
꾸어어어엉-!
“헉? 갑자기 이건 무슨……?”
그리고 그 끝에서 한창 생명의 용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종말의 용.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 잠깐! 왜 하필 이리로……!”
그런 그를 엄청난 양의 은빛 물고기들이 사정없이 후려치고 지나갔다.
꾸어어어엉!
퍼버버버벅! 콰쾅!
끝도 없이.
“크헉……! 자, 잠깐!”
끝도 없이.
“으헉! 크악!”
끝도 없이.
퍼버버버버벅……!
[윽. 아프겠다…….]
토끼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정다운은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반대로 흔들었다.
“자, 다시 유턴!”
꾸어어어어엉-!
“오, 오지 마아-!”
종말의 용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