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28화>
“생명의 용 에르테아!?”
[히이익! 이게 무슨 일이람! 그럼 메모리 님이 생명의 용이었다는 거임!?]
정다운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종말의 용은 그냥 종말의 용이라 부르는데, 어째서 생명의 용만 처음부터 ‘에르테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 이유를 정다운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에르테아’라는 이름은 바로!
“메모리의 진짜 이름이었다니!”
[님이 임시로 만든 이름보다 훨씬 좋은 이름이었다니! 아얏. 왜 때려요?]
알파는 담담히 말했다.
<과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에르테아 님은 잃었던 자신의 이름을 돌려받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린 생명의 서에게서.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이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르테아의 일기’라고 적혀 있던 단 한 줄의 기록.
짤막한 그 기록의 내용은 결국 일기장의 주인이 바로 ‘에르테아’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다시 말해, 그 기록이 현실화된다면…….
<‘에르테아’가 바로 생명의 서의 주인이 된다는 뜻.>
“……!”
파앗!
그 순간, 그곳에.
‘빛’이 있었다.
태양을 녹여 만든 빛줄기들.
휘아악!
그 폭발적인 힘이 메모리의 몸을 휘감았다.
그 빛은 그녀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었으며.
슈와악!
핏줄이 되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생명의 뿌리를 내렸다.
찬란한 에너지가 황금빛 혈관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결국.
번쩍!
‘용의 심장’이 새겨졌다.
[잘했어, 에르테아. 너의 이름은 이제 태초부터 영원토록 생명의 서에 기록될 거야. 나의…… 주인으로서.]
“아아아……!”
생명의 용으로 현신한 에르테아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신을 휘몰아치는 막대한 에너지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만일 생명의 서가 격이 낮아지지 않았더라면, 이 강대한 힘은 그녀의 심장을 깨트리고 목숨을 앗아갔으리라.
그리고 그 육체에 깃든 영혼까지도 다 빨아들였으리라.
바분 황제가 그렇게 당했듯이.
하지만 지금은 다 괜찮았다.
[괜찮아. 조금만 아프긴 하겠지만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나의 격은 이제 네 수준까지 낮아졌으니까. 넌 절대 죽지 않아.]
솔리아는, 아니 생명의 서는 자신의 이러한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은 에르테아를 <항상 지켜주고 예뻐해 주는 언니>였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비록 지금처럼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다시 돌아온다 해도.
[미래의 모든 기록을 알고 있음에도. 몇 번이고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줘.]
자신은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게 최선이었어. 종말이 찾아온 세계에서 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솔리아는 말했다.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던 자신의 존재 이유를.
[내가 반드시 에르테아 너를 <낙원>으로 인도해 줄게.]
번쩍!
“……!”
그 순간 이내 ‘에르테아’가 눈을 떴다.
촤아악!
빛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날개가 태양 같은 빛을 뿜어냈다.
화르륵!
황금빛 눈동자가 앞에 보이는 종말의 용을 바라보며 태양처럼 뜨겁게 넘실거렸다.
“감히 누굴 따라하느냐! 캬오오!”
가고일로 변한 종말의 용이 바람을 가르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분노에 찬 그의 포효가, 발톱이, 이빨이, 걸리는 방해물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하지만 수많은 방해꾼들, 생명의 서를 든 수많은 도플갱어들이 끈질기게 그의 진로를 방해했다.
그 모습은 실로 처절한 광경이었다.
촤아악!
“나를 방해하지 마라! 이 하찮은 것들아!”
“……!”
그의 손짓에 메모리의 도플갱어들이 무참히 썰려 갔다.
생명의 서를 손에서 놓치고 하얀 재로 변해 하늘에 뿌려졌다.
하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들은 끝까지 기록을 읽어 내렸다.
그 기록들은 또다시 새로운 도플갱어들을 탄생시켰고, 그 손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의 서가 복제됐다.
하지만 다 소용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종말의 용을 쓰러뜨리기란 불가능했다.
[조심해! 아무리 네가 생명의 용이 되었더라도 상황은 여전히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해! ‘파괴’야말로 종말의 서의 전문이니까.]
희미해져 가던 솔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에르테아의 귓가에 들려왔다.
생명의 용이 현신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모든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종말의 용도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크하하! 그 말이 맞다! 생명의 서 따위가 감히 나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몸집이 나보다 큰 이유는 그저 ‘창조’가 네 전문이기 때문! 결코 네가 나보다 강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콰콰쾅!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진 종말의 용의 앞을 막아서는 도플갱어들은 그저 무력한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음, 불쌍하네요. 본체가 워낙 약한 여자애라서 그런지, 스치기만 해도 그냥 막 녹아 버리네요. 음? 저건 뭐지?]
안타까움에 혀를 차던 토끼가 한 가지 신기한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도플갱어들이 죽어 재가 된 곳에 ‘복제된 생명의 서’들이 점점 쌓여 가고 있었다.
[도플갱어가 죽으면 들고 있던 무기도 사라지는 거 아니었음?]
“그러게. 그러면 저 책들이 설마 마녀의 서재에 꽂혀 있던 마법서들이 되는 건가?”
정다운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지금 목격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지금까지 자신이 던전에서 지나쳐 왔던 모든 걸 연상시켰다.
<본래 생명의 서는 영원불멸. 찢겨져도 불에 타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불멸의 권능이 복제된 생명의 서에도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권능도 이제 사라졌을 겁니다.>
그저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소유주였던 도플갱어가 죽는 순간 그 책들은 더 이상 생명의 서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격이 떨어져 버렸다.
이제는 불에도 타고 찢기기도 하는, 평범한 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종말의 용이 생명의 서를 크게 비웃었다.
“꼴좋구나! 생명의 서여! 지금 네 꼴을 보아라! 그 책 쪼가리들이 바로 네 무덤이다! 고작 나 하나를 막기 위해 대체 어디까지 몰락할 생각이냐!”
그는 생명의 서의 선택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낱 인간을 위해,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의 격을 깎아내리다니!
계속 창세의 격을 향해 노력하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행보 아닌가!
“네가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덕분에 이제는 내가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의 서를 없애고, 종말의 서만 이 세상에 남게 되리라! 캬오오!”
결국 종말의 용은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앞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가 종말의 기운을 집중시켜 에르테아를 공격했다.
[피해! 저 힘을 정면으로 맞았다간 네가 파괴될 거야! 최대한 도망치면서 그가 힘이 빠질 때를 노려야 해!]
솔리아의 다급한 경고에 에르테아가 힘껏 날아올랐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그녀는 대답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콰앙! 콰쾅!
결국 에르테아의 몸에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크하하! 몸집이 크니 공격할 곳이 많아 좋구나!”
[너도 힘을 집중해서 입에서 뿜어내!]
흐으읍!
그 말에 에르테아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종말의 용을 향해 황금빛 광선을 뿜어냈다.
콰아앙!
[히익. 거대 괴수들이 본격적으로 격돌했네요. 우리가 감히 끼어들 싸움이 아닌 듯. 아, 어차피 끼지도 못하지? 휴, 안심.]
토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 비술에 의해 흑백 처리가 된 정다운과 토끼는 이 세상과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다.
용들이 격돌하면서 몰아치는 후폭풍조차 그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도 이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응원뿐.
그런데 문제는 이 싸움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정다운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VVIP 관중석에서 싸움 구경하는 건 좋긴 한데, 이대로라면 우리 편이 질 것 같지 않아? 아, 원래 지면서 끝나지?”
[그렇겠죠. 여기서 생명의 용이 죽어야, 님도 죽음의 산맥에서 생명의 신전을 발견하고 신전의 주인이 되는 거니까요. 에이, 결말을 알고 보니까 좀 지루하긴 하네요.]
이건 애초에 결말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파괴 전문인 종말의 용과 창조 전문인 생명의 용 에르테아.
둘의 싸움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용의 패배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 어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아라! 그래 봤자 승리하는 건 나다!”
콰르릉! 쿠와앙!
용들의 격돌에 온 세상이 휘말리고 있었다.
종말의 용에게서 뿜어져 나온 힘은 대지를 가르고, 바다를 증발시켰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던 세계가 더없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갔다.
바야흐로, ‘종말’이었다.
[세계가 파괴될수록 그의 힘은 더 강해질 거야! 어떻게든 돌려놔야 해!]
솔리아의 외침에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게 된 에르테아가 숲의 종족들에게서 배운 마법을 펼쳤다.
“테라리움(Terrarium)!”
이것은 본래 밀폐된 공간 안에 인위적인 지구(地球)를 조성하는 마법.
원래는 작은 동식물을 키우는 조경 마법에 불과했던 마법이 조각난 대지를 가까스로 붙들고, 구름이 된 바다를 감싸 올렸다.
그러자 구름이 된 바다가 서로 뭉치며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마치 ‘부유섬’처럼.
아니, 마치 ‘낙원’처럼.
그리고 에르테아는 그 ‘낙원’ 하나를 덥석 잡아, 종말의 용에게 냅다 집어 던졌다.
콰아앙!
“커흑!?”
종말의 용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명의 용의 기운으로 가득 찬 구름 덩어리라서 그런지, 이건 상당히 아팠다.
“격이 낮아지더니 별 이상한 공격을 하는…… 헉!?”
그를 향해 구름 덩어리들이 계속 날아왔다.
이쯤에서 정다운과 토끼는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저기, 알파야. 혹시나 하고 물어보는 건데, 옛날에도 저런 식이었어? 방금 에르테아가 구름 던지는 자세가 좀…….”
[흙뭉치 던지는 느낌이었는데요.]
<……사소한 오류일 뿐입니다.>
그렇다.
정말 사소한 오류일 뿐이었다.
정다운의 곁에서 여러 모습을 봤던 에르테아가 하필 구름을 뭉쳐서 공격하는 정도는.
토끼가 골똘한 표정으로 알파를 다시 불렀다.
[그런데 혹시요. 우리가 여기 과거에 개입하는 바람에 돌아가는 상황이 옛날보다 더 꼬이고 있는 건 아니죠?]
<괜한 걱정입니다. ‘사소한 오류’는 기록의 디테일을 수정할 뿐,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합니다.>
알파는 담담히 대답했다.
정다운은 분명 과거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가 일으킨 오류는 지극히 사소한 수준이었다.
<태초 이래, 인간이라는 종족은 언제나 크고 작은 오류를 범하며 살아가는 혼돈의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류는 오류일 뿐.
창세의 서는 그 오류들을 전부 포용해 가면서 역사를 기록해 왔다.
종말의 서가 만들어 낸 치명적인 오류만 아니었다면, 모든 일들은 기록대로 흘러갔으리라.
[어려운 말 말고요. 그래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예전의 과거와 달라진 점들은 뭔데요?]
알파는 대답했다.
<일단 숲의 종족들이 전보다 훨씬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차피 이 전쟁이 끝난 후에 종말의 용에게 잡혀 죽고 말 겁니다.>
정다운은 세계수의 가지를 들고 부유섬으로 뿔뿔이 흩어진 숲의 종족들과 그들의 도플갱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음, 그래도 저렇게 많이 살아남았으니까 몇 명쯤은 안 들키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도 분명 있긴 합니다만.>
정다운도 재차 물었다.
“그리고 또 달라진 건 뭔데?”
<두 번째로, 최후의 전투 장소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응. 그리고?”
<그게 끝입니다.>
“……뭐? 끝?”
[으잉? 더 없다고요?]
의외의 대답에 정다운과 토끼는 잠시 당황했다.
<그렇습니다. 일개 인간이 어떤 오류를 만들어 내더라도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에 의해 뭐가 만들어졌든.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일을 겪었든.
개인적인 오차들은 수도 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부 사소한 과정일 뿐.
기록된 역사는 거의 그대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생명의 서와 종말의 서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기록은 창세의 기록 그 자체. 오류는 오류일 뿐, 모든 것은 기록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에이. 노잼이네요. 결국 중간 과정이 좀 바뀌어도 결과는 비슷하다는 거임?]
토끼가 김샌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다운은 알파의 설명을 듣더니 딴 생각에 빠져들었다.
“흠. 지금처럼 생명의 서와 종말의 서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기록이라…….”
[뭐하심?]
그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자신의 ‘소지품’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빈 마법서 한 권을 꺼내 펼치더니, 갑자기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태초부터 영원까지라더니! 여기 진짜 쓰여 있네?”
[으잉? 뭐가 쓰여 있는데요? 어디 나도 봐요.]
토끼는 어리둥절하며 그가 보고 있는 페이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이건 그거네요?]
문득 정다운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떠올랐다.
“……나도 혹시 되려나?”
정다운은 무심결에 그 ‘기록’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최초 업적 달성!>
"사자 분수대가 있는 연못을 완성하였습니다!"
- 보상 : 당신이 만든 아름다운 연못에 물고기가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