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26)화 (326/393)

<던전리셋 326화>

“……!”

자신을 노리고 날아드는 각다귀들의 모습에 종말의 용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대처는 즉각적이었다.

“이깟 날벌레들 따위 불태우면 그만이다!”

화르륵!

그가 손을 그의 손짓을 따라 뜨거운 불길이 휘몰아치며, 각다귀들이 허공에서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종말의 용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럴 수가. 생명의 서가 창세의 힘을 사용하다니! 설마 생명의 서에도 죽음이 기록되었단 말인가? 나조차도 이제야 간신히 이 힘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창세의 기록을 종말의 용처럼 마음껏 사용하기 위해선 ‘독자(읽는 자)’의 높은 격이 필요했다.

행여나 기록을 읽을 수 있다 해도 독자의 격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그 기록이 오히려 독자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었다.

그런데 메모리는 창세의 기록을 감당하기엔 아직은 너무도 어리고 나약한 존재였다.

<생명의 서가 택한 방식은 일종의 편법이었습니다. 성녀가 일기장에 기록했던 ‘죽음’의 격에 맞게, 그녀가 손수 적은 일기장의 내용들만 꺼내 쓰게 한 것입니다.>

딱 거기까지가 성녀에게 허락된 기록이었다고 알파는 설명했다.

<즉, 생명의 서 전체가 창세의 서로 격상한 것이 아니라, 성녀가 쓴 일기장만 창세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와작와작, 와작와작.

“야, 팝콘 더 튀길까?”

[좋죠. 이번엔 내가 해 보겠음.]

<…….>

이 둘만 보면 자꾸 힘이 빠지는 알파였다.

반면에 저쪽은 지금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시간을 벌었어! 이 틈에 빨리 다른 일기도 읽어!]

“아앗, 그럼 이거!”

팔락팔락!

메모리는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손이 가는 대로 책장을 넘기고, 눈에 띄는 내용을 아무거나 읽어야 했다.

[계란]

계란이라는 건 무슨 맛일까?

맛이 전혀 상상이 안 가.

꼭 한번 먹어 보고 싶…….

물커엉-.

탑에서 갇혀 살 때는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계란의 추억이 메모리의 앞에 몽실몽실 나타났다.

거대한 점액질 군집체, 슬러그였다.

[때려치워! 이 와중에 계란 먹어서 뭐하게!]

“아앗. 그, 그렇네요!”

솔리아가 버럭 화를 내자, 메모리는 화들짝 놀라며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슬러그들은 그 옆을 흐물흐물 그냥 지나가 버렸다.

[다음 장!]

“넵!”

[문어]

머리가 크면 그만큼 머리도 똑똑하겠지?

그럼 문어는 얼마나 똑똑한…….

“뿌우!”

“뿌이이!” 

이번엔 괴물 문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나자마자 하늘에서 날아오는 공격들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뿌우! 뿌우우!”

의리도 뭐도 없는 진짜 영악한 녀석들이었다.

[또 꽝이야! 빨리 다음 장!]

“으아아아……!”

계속되는 재촉에 메모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생명의 서에는 그동안 적었던 일기들이 너무 빼곡해서 보기만 해도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시간과 여유만 충분했다면 그중에서 뭔가 딱 적절한 내용을 골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종말의 용의 공격이 메모리의 보호막을 끈질기게 두드려 대고 있었다.

“같잖은 짓거리를 하는구나! 창세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하찮은 수준 아닌가!”

파지직! 콰르릉!

그 충격에 메모리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꺄악! 흔들려서 글씨가 잘 안 보여요!”

[눈 딱 크게 뜨고 어떻게든 읽어 봐! 내 보호막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

그때였다.

“황녀님!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세계수에 모여 있던 숲의 종족들이 메모리의 곁으로 달려와 그 앞을 막아섰다.

“저희가 황녀님이 생명의 서를 읽을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들이 결사의 표정으로 저마다 양손에 마법진을 생성시켰다.

파앗! 파앗!

메모리를 중심으로 보호막이 겹겹이 둘러졌다.

식물을 자라게 해서 물리적인 방어벽도 세웠다.

하지만 그 위를 두들기는 종말의 용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져 갔다.

그에겐 여전히 세계수의 힘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쟤만 치사하게 충전기 꽂고 싸우네?” 

정다운이 팝콘을 먹으며 혀를 찼다.

이제는 아예 소파까지 만들어 몸을 묻고, 사이다도 곁들어 마시는 중이었다.

토끼가 사이다를 쭉 빨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숲의 종족들도 실시간으로 ‘세계수의 가호’를 받고 있어요.]

“아, 그러네?”

사라락.

자세히 보니 마침 숲의 종족들 머리 위에서도 세계수의 은빛 꽃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생존자 전체 회복처럼 세계수의 가호가 그들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 충전기 하나를 서로 나눠 쓰고 있는 느낌인데? 이러다 결국 세계수가 말라 죽으면…….”

[끝이죠 뭐.]

<결국 종말의 용의 승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과거의 기록에도 그러했듯이. 역시 겨우 한 명의 인간이 만들어 낸 오류 따위로 역사는 크게 변하지 않을…….>

그때였다.

“앗! 혹시 이거라면!”

숲의 종족들이 도와준 틈에 메모리가 처음으로 쓸 만한 일기를 찾아냈다.

<그리핀>

그거 알아? 저 하늘 위에는 그리핀이라는 새가 산대.

새랑 호랑이랑 합친 것처럼 생겼다던데 엄청 무섭겠지?

그런데 나는 사실 까마귀가 더 무섭더라.

…….

파아앗!

“크르렁! 캬오오!”

생명의 서 안에서 범독수리 그리피오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됐다!”

환호성을 지르는 메모리.

종말의 용은 범독수리들이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습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네놈들도 그리핀을 소환하다니! 이번 기록은 생명의 서치고는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그리핀’ 같은 막강한 존재는 종말의 서에도 마땅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늘의 제왕 그리핀의 전설은 워낙 유명한 종말에 대한 기록이었으니까.

종말의 용은 그 그리핀의 힘을 끌어와서 자신의 날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해도, 종말의 기록과 메모리의 일기장에서 나온 그리핀들은 미묘하게 설정이 달랐다.

메모리의 일기장 말미에는 쓸데없는 사족이 붙어 있었다.

…….

그런데 까마귀라도 밤은 무서운가 봐. 

어두워지면 잘 안 보이더라.

문제는 이 기록까지 다 읽어야만 범독수리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크하하! 제 입으로 스스로의 약점을 말해 주다니 고맙구나! 어둠이여! 심연의 안개여, 나오너라!”

스아아아……!

종말의 용은 광소를 터뜨리며, 온 하늘에 검은 안개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저 겁쟁이 까마귀들에게 심연의 공포를 보여 주리라!”

청명하던 하늘 위에 새까만 어둠이 차올랐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범독수리들은 그 광경에 기겁하며 푸드덕 날갯짓을 하고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때 정다운과 토끼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메모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오! 하늘 위에 심연의 바다가 생겨나고 있어요!]

“그렇다면 역시 심연어를 불러내야지! 메모리! 심연어의 기록을 읽어!”

[심연어임!]

알파가 안타까워하며 대꾸했다.

<소용없습니다. 당신들의 목소리는 저들에게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아싸! 읽었다!”

<……!?>

우연찮게도 때마침 메모리의 입에서 반가운 내용이 흘러나왔다.

<물고기>

오늘따라 생선이 너무 먹고 싶어.

물고기가 물 밖에서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파아앗!

“꾸어엉-!”

거대한 물고기들이 생명의 서 안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말의 용에게서 흘러나오는 안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말의 용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들이댔다.

그 모습에 응원단들이 이제는 팝콘까지 다 내려놓고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야호! 괴수 대전쟁이다!]

<잘한다! 이겨라!>

“응?”

<…….>

어느새 알파조차도 응원단에 가입되어 있었다.

“큭. 뭔 일기를 이렇게 많이 썼어?”

이번에는 종말의 용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메모리에게 가하던 공격의 방향을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심연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파지직! 콰르릉!

“꾸어엉!”

방어력이 약한 심연어들은 그의 공격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다.

심연의 안개에서만 헤엄을 칠 수 있기에 그의 공격을 피할 곳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죽여도 뒤따라오는 심연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종말의 용이 짧게 혀를 찼다.

‘곤란하게 됐군. 세계수의 힘을 흡수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물론 세계수의 힘이 생각보다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그 때문에 지금 종말의 용은 세계수에 손을 박아 넣은 채로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는 처지였다.

메모리의 기록들은 창세의 서의 원본 기록에 비하면 한참이나 격이 낮지만, 이렇게 물량 공세로 덤벼들면 종말의 용으로서도 조금 난감했다.

솔리아가 쾌재를 불렀다.

[잘했어! 이제 종말의 용은 진퇴양난이야! 안개를 뿌리면 물고기들이 덤빌 테고, 안개를 거두면 그리핀들이 덤벼들 테니까! 자, 이틈에!]

“네!”

메모리가 숲의 종족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메모리는 초심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 여러분! 종말의 용이 주춤한 틈에 세계수를 지키러 가세요! 여기는 제가 막고 있을게요!”

“화, 황녀님……!”

“저는 걱정 마세요!”

메모리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엥? 어떻게 지킴?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선 종말의 용을 죽이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아니. 하나 있어. 지킬 방법이.”

[음?]

마침 정다운도 메모리의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나무는 다시 심으면 되잖아?”

그의 말과 동시에 메모리의 입에서도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무는 언제든 다시 심으면 돼요! 각자 세계수의 가지를 하나씩 꺾어 들고 멀리 도망치세요!”

“하, 하지만…… 저희가 떠나면 황녀님은……!”

“어서요! 저는 괜찮다니까요! 세계수를 어떻게든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요!”

메모리는 자신을 두고 가기 주저하는 숲의 종족들을 다그치듯이 쫓아냈다.

숲의 종족들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점점 말라 죽어 가고 있는 세계수에게서 그나마 생기가 남아 있는 굵은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꺾어 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지금 너희들은 종말의 용을 물리칠 수 없어. 어떻게든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렴.]

솔리아도 그 말에 동의해 주었다.

<그들의 선택은 현명했습니다.>

알파도 과거의 기록을 읽어 내렸다. 솔리아가 했던 말을.

<세계수는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 오늘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한 그루의 세계수를 심는다면…….>

[이 세계는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종말의 용이 강림해 버린 이 세계에 그것만이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파라락!

“여기 있다!”

때마침 메모리가 일기장에서 적절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늘은 화분에 나무를 심었어……!”

<화분>

오늘은 화분에 나무를 심었어.

지금은 비록 내 키보다도 작지만 언젠간 엄청나게 커지겠지?

나무들아,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나중에 세계수처럼 훌륭한 나무가 되렴.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메모리는 세계수의 가지를 품은 숲의 종족들이 눈물을 머금고 다른 부유섬을 향해 뛰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나중에 세계수처럼 훌륭한 나무가 되렴!”

파아앗!

생명의 서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뿔뿔이 흩어진 세계수의 가지들에게 날아갔다.

“됐어……!”

[그래. 이거면 된 거야. 넌 잘해 주었어, 내 동생아…….]

솔리아가 완전히 진이 빠져 버린 메모리를 측은해하며 위로해 주었다.

왜 무섭지 않겠는가.

스물도 안 된 이 어리고 여린 아이가…….

세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순순히 보내 줄 수는 없지.”

절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죽어라.”

“……!”

오싹!

심연어들을 간신히 뿌리친 종말의 용이 다른 부유섬으로 도망치고 있는 숲의 종족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쾅!

“안 돼!”

메모리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끄아악……!”

아아, 가족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고 외톨이가 된 자신에게 기꺼이 가족이 되어 주었던 숲의 종족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나약한 자신에겐 그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니, 있어!”

갑자기 메모리가 독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일기장을 펼쳤다.

“내가 지킬 거야! 어떻게든!”

“어, 저건 설마?”

문득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메모리의 머리 위에.

그리고 숲의 종족들의 머리 위에.

갑자기 왕만두처럼 크고 하얀 알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살이]

하루살이는 징그럽긴 해도 정말 대단한 애들이야.

하루를 살아도 어떻게 저리 열심히 살까?

힘내, 애들아!

“……힘내! 애들아!”

어떻게든 살아남아!

부우욱! 팡!

하루살이의 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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