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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320)화 (320/393)

<던전리셋 320화>

*   *   *

참으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의 연속이었다.

바분 황제가 2층으로 올라온 건 정다운이 막 2층을 완성하고 3층을 짓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림자 하인들이 으쌰으쌰 힘을 합쳐서 2층의 핵심 전력인 고릴라 골렘을 완성시킨 직후였다.

참고로 이 그림자 세계에서 정다운은 게이트를 열 수 없었다.

좌표가 없기 때문.

같은 이유로 바하무트와 철갑 골렘들이 대기하고 있는 마법 창고도 열 수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소지품은 무사히 열렸다.

소지품 능력이 정다운에게 속해 있는 스킬인 덕분이었다.

[역시 내 말 듣길 잘했죠? 낙원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흙 골렘의 핵을 소지품에 몇 개 빼놓으라고 조언한 게 누구? 누구긴 누구야! 바로 나 토끼 님이지! 냐하하핫!]

정다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우쭐우쭐 생색부터 내는 토끼였다.

사실 핵만 있으면 골렘쯤이야 어디서든 즉석에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몸 전체에 나전칠기를 해야 하는 철갑 골렘 같은 경우엔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직접 싸우지 않고 멀리서 흙뭉치만 굴리는 일에는 굳이 철갑 골렘까지는 필요 없었다.

쿠르르르-!

복도를 따라 일직선으로 굴러 내려오는 크고 동그란 흙뭉치.

그 앞에 바분 황제가 서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가 굳어 버릴 것 같은 상황.

하지만 바분 황제는 오히려 기가 찰 지경이었다.

참으로 조잡하고 유치한 레벨의 함정 아닌가.

그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뭘 준비했나 했더니 겨우 굴러오는 바위인가. 설마 진심으로 내가 이런 함정에 당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여정인데, 고작 이딴 상대와 싸우느라 시간을 낭비해야 하다니.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1층은 미로가 복잡했지만, 2층은 저 바위를 굴리기 위해서라도 복도가 일직선의 단순한 구조였다.

대신 천장이 높아서 한 번에 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같은 방법에 또 당할 순 없다는 정다운의 수작질이었다.

하지만 저 고릴라 골렘이 있는 복도 끝은 경사가 높아서 천장이 비교적 가까웠다.

그 말은 결국.

‘저 복도 끝까지만 가면 천장을 부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인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단순하고 뻔한 구조로군.’

쿠르르르-!

“흥. 이딴 바위 따위.”

파앗!

바분 황제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바로 앞까지 굴러온 흙덩이 위에 수직으로 실선이 그려졌다.

“잘라 내면 그만이다!”

쩌적!

바분 황제를 사이에 두고 흙덩이가 두 쪽으로 깔끔하게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울컥!

“무, 무엇!?”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히익! 소오름! 한 방에 당첨되셨네요!]

밉살맞은 토끼의 환호성과 함께.

흙덩이가 갈라지며 그 안에 있던 투명한 점액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마치 호떡 안에 들어 있는 꿀처럼 찐득하게.

철퍼덕!

“……!”

그의 몸을 뒤덮었다.

“…….”

그렇다. 또 슬러그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토끼가 뾰로롱 나타나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역시 천재 마검사다! 모든 흙덩이마다 슬러그가 채워져 있는 건 아닌데! 천재라서 운도 좋으시네요! 꺌꺌꺌!]

“…….”

후우.

이젠 뭐, 화도 안 났다.

일일이 화냈다간 고혈압으로 죽을 것 같았다.

찐득거리고 미끄덩거리는 투명한 점액질.

그 안에 파묻힌 채로 바분 황제는 진지하게 사색에 잠겼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잠시 현실 자각 타임을 가져 보는 바분 황제였다.

설마 영원한 생명 얻으려 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다. 불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소망. 가장 고귀한 인간인 내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 소망을 이루겠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학살해서?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이유가 늙어 죽든, 병들어 죽든. 오히려 황제인 내 손에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

아니면 세계수를 원해서?

‘아니다. 그깟 나무 한 그루. 황제인 나를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대체 누굴 위해 사용될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숲의 종족들을 말살시키려 해서?

‘그 또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혹시라도 그들이 또 다른 세계수를 키워 내면 어쩌겠나. 황제인 나 외에 누군가 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선 안 되니까.’

아니면 어린 딸을 좀 활용했다고?

‘기왕 성녀의 재목으로 태어났으니 황제를 위해 쓰이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지. 어차피 자식은 또 낳으면 된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잘못한 건 전혀 없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진리였다.

“그리고 위대한 황제인 나야말로 바로 그 ‘대’가 아니겠는가!”

화르륵!

바분 황제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그의 전신이 뜨겁게 불타오르며 모든 슬러그를 태워 버린 뒤였다.

하지만 완전히 깨끗해진 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너무 더럽고 꾀죄죄했다.

태워 먹은 계란 프라이처럼 새까만 재가 되어 버린 슬러그의 잔재가 위대한 황제의 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

차분하게 그 지저분한 것들을 손수 떼어 내는 바분 황제의 모습에 토끼가 의외라며 정다운과 수다를 떨었다.

[오? 반응이 도우미 때랑은 좀 다르네요? 이쯤 되면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요.]

“그러게. 화를 안 내네?”

“……후우. 나는 화가 날수록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성격이지.”

바분 황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미니맵 너머의 정다운을 노려봤다.

그는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였던 적국의 기사가 비겁하게 암습을 했을 때도 오늘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결심했다. 네놈들은 결코 쉽게 죽이지 않으리라. 그 입에서 제발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오게 해 주마.”

오싹.

한계치를 돌파한 그의 분노에 정다운과 토끼는 동시에 몸을 떨었다.

그래서 비명초의 차를 정답게 호로록 나눠 마셨다.

[흐음. 향이 좋군용.]

“두 번 우린 차라서 그래. 호로록.”

쿠르르르-!

마침 고릴라 골렘의 흙덩이가 또다시 바분 황제를 향해 굴러왔다.

그는 찝찝한 꼴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흙덩이를 베려 하지 않았다.

“사실 굳이 검으로 벨 필요도 없지. 이깟 건 그냥 힘으로 멈춰 세워도 될 터.”

인간을 뛰어넘은 그의 힘이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쾅!

바분 황제가 오러를 머금은 손을 앞으로 뻗어, 굴러오는 흙덩이를 맨손으로 멈춰 세웠다.

멋진 포즈였다.

[호우! 쩐다! 는 뻥.]

미끄덩!

“……이런 제길?”

[이때 뭔가 아차 싶더라고요. 낄낄.]

젠장, 깜빡했다!

지금 발밑이 온통 미끄럽고 물컹거리는 점액질투성이라는 사실을!

우당탕탕쿵탕!

흙덩이의 무게에 떠밀려 바분 황제의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꼴사납게 뒤로 튕겨 나갔다. 볼링핀처럼.

[이히히! 아무리 힘이 좋아도 발이 미끄러우면 밀면 넘어지지롱!]

날달걀과 계란 프라이를 밟고 다니면서 몇 톤이나 되는 흙덩이를 막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덕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게 된 바분 황제.

그가 야차 같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크아악! 이놈들! 진짜 죽여 버린다! 진짜 죽일 거라고!”

[어허. 아까 화가 날수록 머리가 차가워진다는 분 어디 가셨나?]

“크윽! 더 이상 마력을 아끼지 않겠다! 화염 방패! 바람의 폭탄!”

그의 눈이 뒤집히자, 양손에서 전혀 다른 마법이 동시에 펼쳐졌다.

콰르릉! 콰쾅! 쾅!

그리고 이후로 굴러오는 모든 흙덩이들을 사전에 폭발시키며 핏발 선 눈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크워어!”

콰쾅! 쾅!

열심히 볼링공을 굴려 접근을 저지하는 고릴라 골렘과 신중하게 거리를 좁혀 가는 바분 황제.

서두르고 싶어도 또 미끄러질까 봐 모든 걸음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 와중에 전신이 찐득거리고 찝찝해서 엄청 짜증났다.

[히히! 역시 여기 따라 들어오는 게 정답이었음! 이런 꿀잼이라니!]

다들 바쁘고 열심히 사는 가운데 토끼 혼자만 한가로웠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곧 끝이 났다.

콰쾅!

“크워어……!”

쿠르르!

결국 바분 황제의 마법에 고릴라 골렘의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명색이 그래도 스테이지-1 보스인데 그냥 한 방감이네요.]

“리턴!”

정다운은 적당한 시점에 흙 골렘의 핵을 회수했다.

그리고 천장을 부수고 3층으로 올라온 바분 황제를 환영해 주었다.

“효과가 좋은 것 같아서 볼링장 한 번 더 준비해 봤어.”

“…….”

3층은 3층이라, 고릴라 골렘 3마리가 다양한 각도에서 흙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1층과 2층의 장점만 합친 곳이라 길도 미로처럼 복잡했다.

바분 황제는 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젠 지겹군.”

[인정. 지겨울 만함. 그런데 어쩌겠어요? 시간 끄는 게 목적인데.]

“네놈들의 알량한 잔재주를 구경하는 것도 이젠 못해 먹겠다. 그냥 죽어라, 버러지들.”

촤라락!

바분 황제는 결국 종말의 서를 꺼내 펼쳐 들었다.

“네놈들 따위에 종말의 힘을 사용하는 건 아까운 짓이라 여겼다. 이 힘을 끌어 쓰면 내 수명이 깎이기 때문이지.”

[앗? 신사다! 그런 중요한 비밀을 막 스스로 까발리다니!]

“중요한 비밀이 아니기 때문이지. 내 수명은 여전히 많이 남았고, 네놈들을 죽이고 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다 해결될 문제일 터.”

촤라락!

그는 강박적으로 종말의 서의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네놈들이 자꾸 시간을 끌려는 이유를.”

그의 눈이 미니맵을 통해 정다운의 속셈을 꿰뚫어 봤다는 듯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러는 사이에도 밖에서는 여전히 불귀신들이 숲을 불태우고 있을 터였다.

“네놈들은 나에게 반기를 든 성기사들처럼 내가 세계수를 얻지 못하게 숲을 전부 불태울 속셈이었구나.”

[앗, 그런 거였음!?]

그 말에 토끼가 화들짝 놀라 정다운을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닌데?”

“웃기지 마라. 황제를 감히 속이려 하느냐. 나는 황제다! 네놈처럼 천한 것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존재다!”

촤라락!

천한 것들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바분 황제는 종말의 서에 손을 얹고 사납게 명령했다.

“나오너라! 나의……!”

두쿵!

그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그가 서 있던 3층 전체가 통째로 흔들렸다.

“이, 이런!”

깜짝 놀라 다급히 몸의 균형을 잡는 바분 황제.

하마터면 종말의 서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 모습을 미니맵으로 지켜보던 정다운이 한가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가 세계수를 왜 불태워?”

토끼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랑 같이 도망쳤던 숲의 종족들이 지금까지 어디서 뭐하고 있게요?]

“……뭐?”

그 순간 바분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미니맵 너머에는 정다운과 토끼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상한 거 못 느꼈음?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퀘르쿠스가 왜 우리를 못 잡고 있겠음?]

“……!”

쿠르릉!

그때 또다시 바분 황제가 서 있던 3층, 아니 피라미드 형태의 은신처가 통째로 흔들렸다.

마치 고장 난 비행기가 출렁이듯이.

“서, 설마…….”

바분 황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때마침 솔리아의 목소리가 정다운을 불렀다.

[이 정도면 어때? 퀘르쿠스보다 높이 올라왔는데, 숲의 종족들에게 망령석 더 심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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