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17)화 (317/393)

<던전리셋 317화>

놀란 건 토끼도 마찬가지였다.

[히익? 내가 인형이 되어 버렸잖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자 누가 봐도 인형처럼 생긴 몸뚱이가 달려 있었다.

실과 바늘로 꿰맨 짤막한 손과 발.

오동통한 배.

동글동글 꼬리.

[귀, 귀엽다요!]

인형이니까 당연히 귀여웠다.

[에헴! 나는 귀엽다! 신난다!]

토끼 인형이 되어 버린 토끼가 만세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럴수록 메모리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생명의 서가 들어 있는 자신의 소중한 인형이 오늘따라 상태가 많이 이상했다.

하지만 정다운은 바로 토끼를 알아보고 덥석 집어 들며 물었다.

“너 여기 어떻게 왔어?”

[훗. 내가 좀 천재임. 못하는 게 없죠.]

루갈이 들으면 으르렁거릴 소리를 뻔뻔하게 해 대는 토끼였다.

인형이 되었지만 다행히 움직임은 평소와 같았다.

토끼가 정다운의 손에서 둥실 떠올라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질렀다.

[호우! 이 난장판은 또 뭐임? 님 여기서 또 뭔 짓거리를 한 거임?]

“아냐. 나 이번엔 진짜 억울해.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나무만 벴어.”

[아하. 그렇군요? 나무는 벴지만, 숲을 분노하게는 안 하셨겠다?]

“…….”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안 했다는 느낌이었다.

쿠르릉!

하지만 정다운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퀘르쿠스의 존재감이 너무 엄청나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뿐이랴.

키키케케케!

케케케케케케케! 

정다운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몰려드는 해골 병사들까지 존재했다.

[우와, 저 뼈다귀들 대체 몇 마리임? 나무가 많아서 세기도 힘드네요.]

“대충 수백 마리쯤 될걸? 그런데 지금도 계속 늘어나는 중이야.”

[와, 쩐당. 여기 생긴 건 하룬인데, 하는 짓은 틈새 지역 저리 가라네요? 오! 저기 불귀신들도 돌아다니는 거 보면 하룬이 맞긴 하네요?]

“……?”

한편 메모리는 둘의 태평한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벙쪄 있었다.

“아, 아저씨? 지금 혹시 나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가요? 왜들 이렇게 태평해요?”

[아냐. 네가 정상이야…….]

솔리아의 한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그나마 솔리아는 둘의 이런 분위기를 몇 번이나마 겪어 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모리처럼 이 분위기에 적응 못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바분 황제.

미니맵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네놈들 지금……. 설마 내가 안 보이는 건 아닐 테고, 감히 나를 앞에 두고도 무시해?”

[앗? 처음 보는 영감탱이네요?]

“여, 영감탱……?”

[안녕하쇼! 난 귀여운 토끼 인형임! 할배는 누구셈?]

“하, 할배……?”

갑자기 토끼가 자신을 발견하고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바분 황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해맑은 반응에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분노를 터뜨려야 할지 헷갈렸다.

바분의 자기소개는 정다운이 대신해 줬다.

“저 할아버지, 바분이야.”

그 순간 토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누구라고요?]

“바분이라고.”

[…….]

그 말에 토끼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던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설마 저 영감탱이가 바분이라고요? 진짜 내가 아는 그 바분이라고요?]

“또 영감탱…….”

토끼의 말에 바분 황제의 표정은 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쩐지 노인네 얼굴이 말라비틀어진 개코원숭이 같더라니!]

“뭐, 뭐라? 개, 개코 원숭이? 감히 나에게 그런 건방을 떨어!?”

번쩍!

토끼 특유의 유치한 말투는 반복할수록 상대의 인내심을 긁어 내렸다.

점잖게 무게 잡고 있던 인간들의 황제에게서 결국 광기까지 섞인 살기가 터져 나왔다.

“나의 병사들이여! 모두 죽여라! 특히 저 건방진 인형은 사지를 찢고 머리를 잘라 버려라!”

[흥. 잔인한 척하지만 난 지금 인형이라 하나도 안 잔인하죠? 꿰매면 됨. 메롱.]

“저, 저 새끼를 당장 잡아와!”

[욕쟁이 영감이네! 꺌꺌꺌!]

토끼가 얄밉게 웃으며 공중에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때 솔리아의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다들 정신 차려! 너희 지금 포위당했단 말이야!]

“아, 그러네?”

정다운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키키케케케!

케케케케케케!

어느새 해골 병사들이 달그락거리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앗! 진짜 포위당했음! 님이 너무 느림보라 잡혔잖아요! 좀 더 빨리 뛰었어야죠!]

토끼의 말은 틀렸다.

정다운은 토끼와 대화하면서도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신체 능력 4배의 도주 속도는 감히 해골 병사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포위당했다는 말은 해골 병사들이 처음부터 정다운의 앞에서 소환되었다는 뜻이었다.

메모리가 다급히 정다운의 어깨에서 발을 동동거렸다.

“아저씨! 저 내려 주세요!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도 같이 싸울게요!”

“응. 도움 안 될 거니까 계속 업혀 있어.”

“네…….”

의욕은 좋았지만 메모리는 앉아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전투에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키키케케케케!

흉악한 기세로 사방에서 덤벼들기 시작하는 해골 병사들.

그런데 그 앞에 선 정다운은 겁도 없이 씨익 웃고 있었다.

“미안한데, 너네 지금 난이도 조절 실패했어.”

토끼는 정확히 미니맵의 바분 황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맞아. 이 인간은 오류종자란다, 바분 똥꼬야. 하필이면 이 인간 앞에서 꺼내도 해골 병사를 꺼내다니.]

키케케케케!

사실 해골 병사들 따위가 몇 마리 있어도 정다운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정다운이 받아 놓은 수많은 업적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업적 달성!>

“해골 파괴자!”

혼자의 힘으로 해골 병사 1천 명을 파괴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 뼈를 2배로 더 잘 부수게 됩니다.

‘이건 틈새 지역에서 받은 보상.’

그리고.

[최초 업적 달성!]

“용기사 살해자!”

종말의 용을 섬기는 죽음의 기사에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을 선사했습니다!

당신들의 위대한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1 : 당신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이 벌벌 떱니다.

(언데드들의 공격력이 20% 약해집니다.)

- 보상 2 : 용기사를 사냥한 당신의 위엄에 주변 언데드들이 위축됩니다.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20% 느려집니다.)

- 보상 3 : 용기사의 힘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언데드 대상으로 당신의 공격력이 20% 상승합니다.)

‘이건 거인 기사 반다이크를 쓰러뜨리고 받은 보상들.’

흠칫!

정다운과 눈을 마주친 해골 병사들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심지어 무기를 휘두르는 움직임들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파사삭!

그리고 정다운의 손에서 해골 병사들의 몸이 나무젓가락처럼 부셔져 갔다.

그 모습을 본 바분 황제의 두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정다운에게 덤벼드는 언데드들이 말 그대로 녹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성기사들보다도 언데드들에게 더 상극이라니!”

토끼가 바분 황제에게 이죽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바분 영감아. 너는 상대를 잘못 만났어.]

“……!”

바분 황제가 발끈했다.

이젠 토끼가 아무 말이나 막 던져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상극이라도 격의 차이가 현격하다면, 어둠의 힘 또한 네놈들에겐 상극일 터! 내 친히 네놈들을 상대해 주겠노라!”

파아앗!

결국 바분 황제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서 수많은 해골 병사들이 몸을 합치더니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 위에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불길한 기운이 뒤덮여 갔다.

크워어어어!

솔리아는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바분 황제가 종말의 용을 세상에 현신시키고 말았어! 과거에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는데!]

물론 제대로 된 종말의 용은 아니었다.

일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소환된 종말의 용은 지능도 없고 자아도 없는, 그저 거대한 몸뚱이만 존재하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세상을 파괴하기에는.

[앗, 저게 종말의 용이라고요? 님 요즘 큰 괴물들한테 인기가 많네요?] 

“그러게 말이다…….”

정다운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쿠르릉!

퀘르쿠스와 종말의 용이 나란히 자신을 잡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쿠릉! 쿠구구……!

그 육중한 괴물들이 움직일 때마다 아름답고 평화롭던 자연 경관이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파괴되어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륵!

원래 주인을 잃은 소환수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법.

성기사들이 봉인되었어도 그들이 소환해 놓은 거대한 불귀신들도 여전히 숲을 불태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하룬처럼.

이 그림자 세계의 모습은 점점 루갈이 관리하던 던전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아아, 하룬이……. 하룬이!”

메모리는 결국 절망적인 얼굴로 탄식했다.

[정다운, 이제 그만해. 넌 할 만큼 했어.]

급기야 정다운의 귀에 솔리아의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도…… 수많은 이들이 종말을 막기 위해 노력했어. 지금의 너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그들도 나름 최선을 다해 발버둥을 쳤단 말이야. 하지만…….]

그때 머리 위에서 바분 황제의 광오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무리 네놈들이 발버둥 쳐 봐야 종말의 힘은 피할 수 없다! 종말이란 결국 그런 것이니까! 나는 드디어 세계의 왕이며, 죽음까지도 지배하는 진정한 왕이 되었다! 크하하하!”

어느새 종말의 용이 정다운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솔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이제 돌아가, 정다운! 아무리 네가 애써 봐야 변하는 건 없어! 어차피 여긴 지나간 과거일 뿐이니까!]

그녀의 말을 다 듣고 있던 정다운이 입을 열었다.

“나, 딱히 바꿀 생각 없는데?”

[……뭐?]

정다운은 웃고 있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나 그냥 바분만 잡고 갈 거라고. 바분 잡으면 던전이 업적이라도 줄지 모르니까.”

[너, 아직도 그런 소리를…….]

잠시 아름다운 경치가 망가지는 모습에 허탈하긴 했지만, 정다운은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토끼가 그에게 아까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그런데 님, 왜 정화 스킬은 안 써요? 해골 병사들한테 즉효 아님?]

“괜히 먼저 썼다가 바분이 도망가면 어떡해? 범위가 은근히 좁아서 저기까지는 안 닿는다고.”

[아하.]

“뭐, 뭐라? 내가 도망?”

둘의 대화에 바분 황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의심해야 했다.

정다운이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정화.”

파아아앗!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참고로 상급 정화 스킬은 일정범위를 통째로 정화시킨다.

그리고 그 빛은…… 해골 병사들의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어둠의 마력을 녹여 버린다.

투둑, 투두둑…….

거짓말처럼 그를 포위하고 있던 해골 병사들이 힘을 잃고 형체가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가까이 있던 종말의 용 또한. 

콰르르르!

몸을 지탱하고 있던 어둠의 힘이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녹아 버리고 말았다.

쿠르르릉-!

[<정화> 스킬이 상급 2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정화> 스킬이 상급 3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정화> 스킬이 상급 4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종말의 용을 보며 바분 황제는 경악했다.

“아, 아닛! 이건 말도 안 된다! 설마 성기사가 아니라 성자급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친딸인 성녀조차도 이런 힘은 사용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힘이 자라기 전에 일찌감치 싹을 잘라 버렸으니까!

높은 탑에 가둬 아무도 못 만나게 하고.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게 하고.

단순히 숨만 쉬며 제국을 위해 기도만 하는 존재로 키웠거늘!

“그런데 대체 어디서 이런 종자가 튀어나왔단 말인가!”

오류였다.

바분 황제가 그동안 그려 놓은 완벽한 그림에 오류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아, 세상에……!”

메모리는 여전히 정다운에게 업혀 있는 채로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똑똑히 눈에 담고 있었다.

“역시 아저씨는 성자셨어!”

콰르르르!

처참하게 허물어져 내리는 종말의 용. 

그 위에 있는 황제를 향해 정다운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황제 아저씨? 잠깐 내려와.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오셈, 오셈!]

“이놈들이이-! 감히! 하찮은 것들이 나를 무시하느냐!”

엄청난 살기가 정다운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오싹.

“아니다. 그냥 튀자.”

[그러죠.]

정다운은 씨익 웃는 표정 그대로 빠르게 뒷걸음을 쳤다.

토끼는 아예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휴, 바분 놈. 옛날에도 성질은 여전했네요. 님, 저기로 숨으실?]

그곳은 정다운이 그림자 하인들을 시켜 만든 ‘은신처’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토끼에겐 그곳이 다른 곳으로 보였다.

[저 유적지, 내가 한번 들어가 봤는데요. 함정들이 진짜 자질구레함. 숨기 딱 좋아요.]

0